평범한 남자 EP 74 (개정판)
"안녕히 가십시오 대리님, 아~ 아니 과장님"
"그래 이제 내가 너한테 잘 보여야겠는데... 하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제가 할 말인데요, 이제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내년초에 해외 계열사 경영감사 출장 오지? 그때 보자구"
"예~ 아마도 1월이나 2월쯤 가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 뵙겠습니다"
"그래 잘 지내고"
연말 인사발령 공지가 올라왔다. 불경기에도 승진할 사람은 승진하는 법이다. 노대리는 과장 승진과 동시에 기획실을 떠난다. 중국의 연태 자회사가 자체적인 영업력 강화를 위해 중국 현지 영업을 총괄할 한국 주재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연태 DB중공업은 조선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자회사 중에서 유일하게 수익이 나고 있는 회사이다. 더욱이 사장이 대주주로 지분이 가장 많다. 결국 자기 주머니이니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사장은 그런 연태 자회사의 발전을 위해 중화권 영업의 최고 실무자인 노대리를 그곳에 포진시키기로 이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기획실로 온 이유도 자회사로 보내기 위한 단기 트레이닝 기간이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연태 DB중공업은 각종 선박크레인(Ship Crane), 해상 구명정 크레인(Life Boat Davit) 그리고 갑판기계류(Deck Machinery)를 주로 생산하는 선박기자재를 주로 생산하는 공장이다. 선박 기계류도 물론 주문제작이지만 표준화가가 상당 부분 진행되어 있어 기성품(旣成品, ready-made)처럼 되어가는 실정이었다. 선박을 만드는 조선소가 아니기 때문에 중국에 있는 한국 조선소뿐만 아니라 현지 중국 조선소를 대상으로도 영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업영역이 구조물 사업(선박블록, 데크하우스 등) 보다 넓었다. 중국 조선소 입장에서도 경쟁사가 아닌 부품 공급사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격만 괜찮다면 한국 기술의 품질 좋은 선박기계를 마다할 리 없다.
연태공장은 부산에 있는 기계사업부의 사업모델을 그대로 중국에 옮겨놓았다. 사업 초기 기계사업부의 생산 관련 핵심 인력을 사장 주도하에 파견했다. 기계사업부 사업소장인 김 전무의 중요 심복들을 떼어내는 통에 초기 김 전무와 사장의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 있었다. 회장의 아들이 사장으로 등극하고 2세 경영체제로 돌입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기존 원로 임원들과 신임 사장 간의 알력 싸움 같은 거라고나 할까? 승자는 언제나 사장이다. 피로 맺어진 부자(父子)의 관계 그리고 재무(돈)와 인사권을 틀어쥔 살아 있는 권력은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다.
"아~ 이제 정 좀 들려했는데 아쉽네요 노 과장님"
"그러게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승진 축하드리고요 도 과장님"
기획실 팀장 대행인 도대리도 과장으로 진급했다. 내심 기대했던 기획실장의 타이틀은 얻지 못했다. 아직 시험대 위에서 사장과 임원들의 까다로운 눈높이를 통과하지 못한 듯 보였다. 기존대로 팀장대행이라는 권한 없는 책임만 주어지는 애매한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다만 심기에 거슬리던 부서 내의 경쟁자 노과장이 부서를 떠나게 되어 내심 기쁜 눈치다. 그리고 기획파트의 상훈 씨와 IT파트의 정우 씨가 대리로 진급했다. 사실 기획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입사 시기가 엇비슷하기에 막내인 나와 현지 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진급 대상자였다. 하지만 조선 불황과 팀 내의 일정 비율만 진급할 수 있는 내부 인사 규정이 나머지 팀원들에게 고배(苦杯)를 마시게 했다. 특히 IT파트장인 박 대리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인다. 도과장과 동급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자존감은 직급에 눌려 버렸다. 그리고 나의 업무 파트너인 지호 씨도 겉으로는 너털 웃음을 보였지만 마음속은 타들어갈 것이다.
진급한 사람들도 그런 다른 팀원들의 심정을 알고 있는 터라 승진의 기쁨을 티를 낼 수 도 없다. 그렇게 회사의 인사 공고로 사무실에는 싸늘한 적막함 속에서 속으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우는 연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기획실 뿐 아닌 전사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올해는 임금 동결에 승진 가뭄까지 겹쳐 우울한 연말이 되어 가고 있다.
"또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가는 건가?"
"그러게 매년 연말마다 우린 왜 이렇게 칙칙하냐?"
"아냐~ 좀 있다 초대 손님 한 명 올끼다"
"헐~ 누구누구?"
한 해의 마지막이면 독수리 오형제는 모인다. 지구 평화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솔로들의 안녕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해야 할까? 해마다 모이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솔로들이다. 거리 곳곳에는 연말을 알리듯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고 연인들이 넘쳐나지만 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비용 절감을 위해서인지 연말만 되면 여자가 없다. 하기야 연말에 애인이 있는 사람들은 돈 쓸 일이 솔로들에 비해 두 세배는 많아 보인다. 크리스마스 선물에 이벤트에 혹은 뜨거운 연말 밤을 같이 보내기 위해 극성수기 모텔방이나 펜션 방을 잡느라 없는 돈을 탈탈 털어야 한다. 그럼 새해엔 빵꾸난 카드값을 메꾸기 위한 연봉과 직급을 올리려 한해를 또 열심히 달린다. 우리 앞에 놓인 소주 몇 병과 노릇하게 구워지는 삼겹살은 머릿수로 나누어 내면 부담 없어 보인다. 거기에 몇 인분 더 추가한다고 화낼 사람은 없다. 그게 만약 여자라면 환영할 일이다. 난 암컷을 물어온 대가로 비용 집행 대상에서 면제가 되는 행운까지 얻을 수 있다.
"아~ 내 영어 선생님이야"
"뭐? 영어선생? 근데 영어선생이 여길 왜 와?"
"그냥 오늘 특별히 다른 약속도 없다고 해서"
"오~ 이건 무슨 분위기지? 여자 생긴 거야?"
"오 희택~ 우리 몰래할 건 다 하고 댕기네"
"아냐~ 아직 그런 거~ 너희들! 오면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녀석들의 흐리멍텅하던 동태 눈깔이 금새 먹이를 노리는 매서운 매의 눈으로 변해간다.
"하이~ 다슨! 안녕하세요 제시카예요"
"안녕하세요"(일제히)
"와~ 다들 듣던 데로 미남들이시네요"
"예? 희택이가 무슨 얘기를 했길래요?'
"아~ 그냥 조크예요 알면서~ 하하하"
"하하하 역시 희택이가 여자는 참~ 잘 만나는 것 같네요"
"그렇죠? 제가 좀... 하하하 한잔 해요!"
그녀는 입장과 동시에 청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인지 위트인지 모를 무언가가 있다. 오랜 강사생활 속에서 어린 학생부터 늙은 학생들까지 모든 관계의 기술을 마스터한 것 같다. 특히 남자들에게는 더욱 강한 면모를 보인다.
연말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일까, 재킷을 벗은 그녀는 평소보다 더 과한 노출과 짙은 화장으로 화려한 연말의 시내 분위기에 맞추려고 노력한 모습이 역력하다. 녀석들의 동공은 확장되고 아래위로 티 안 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평소 같았으면 의자의 등받이를 100% 아니 110% 활용하며 앉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등이 등받이와 만날 일이 없다. 공격적인 자세로 끊임없이 그녀에게 술잔을 들이민다.
"제시카 누나~ 난 연상도 괜찮은데... 어디 괜찮은 친구 없어요?"
"음... 한 명 있긴 한데..."
"오! 정말요?"
"돌싱 어때? 애 하나 있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하나!"
"아... 하하..."
"왜? 싫어요? 내 친구 엄청 이쁜데..."
"그게... 하하 연.. 하는 없어요?"
"저도요!"
춘곤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적극 활용해서 솔로 탈출을 꿈꿔보려 한다. 그에 질세라 나머지 하이에나들도 뒤늦은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오늘 밤의 주인공은 단연 그녀가 되었다. 역시 음양의 조화는 중요하다. 한 송이 꽃이 벌들에게 분주함과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귀덕씨는 술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아~ 네 그냥 오늘은 속이 안 좋아서요"
귀덕은 다른 하이에나들과 같은 부류로 섞이기 싫은 듯 유일하게 등받이에 기댄 채 일련의 상황들을 못마땅한 듯 지켜보고 있다. 그런 그를 의식한 그녀가 그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을 건넨다. 하이에나들은 녀석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준다. 그제야 못 이긴 척 술잔을 들어 부딪치고는 입에 털어 넣는다.
"여자한테 그렇게 인기가 많으시다고요"
"예?!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귀덕은 나를 한 번 쓰윽 흘긴다. 그녀는 타깃을 귀덕에게로 옮긴 듯 보인다. 그녀를 따르는 하이에나 무리들은 그녀의 관심을 돌리려 애써보지만 타깃을 정한 그녀는 녀석에게 계속 술을 권하며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려 한다.
그녀의 수업시간은 한 명도 소외되거나 열외 되지 않는다. 모두가 동참하는 참여 정부을 지향하는 그녀는 내성적이거나 반항적인 학생들을 먼저 공략해 수업 분위기를 주도한다. 그런 세력들이 일찌감치 세력을 확장하거나 분위기를 흐릴 수 없도록 사전에 손을 쓰는 것이다. 귀덕은 그런 그녀를 모른 채 그녀의 집중된 관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누나가 건네는 술잔이라 거절도 못하고 한잔 두 잔 받아마시며 그녀의 칭찬 공세와 가끔씩 오고 가는 가벼운 스킨십으로 그의 방어기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누나는 희택이랑 사귀는 거예요?"
"글쎄 그건 희택 씨한테 물어봐줄래요?~ 하하"
다들 취기가 오른 흐리멍덩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녀는 이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녀석들의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곤란하거나 애매한 상황은 자연스럽게 빠져나간다. 난 그녀의 그런 성향을 이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아~ 배야~ 너무 먹었나? 나 화장실 좀..."
"야~ 어디가?"
나도 그녀만큼 자연스럽진 못하지만 빠져나갈 순 있다. 그녀가 원하는 답은 무엇일까? 이런 상황은 어느 드라마에서 본 듯한 느낌이다. 남자가 박력 있게 말해주길 기대하며 마이크를 넘기는 제스처는 한국 여자들이 흔히 써먹는 드라마 속 상황이다. 이럴 때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 시나리오는 여자들이 상상하기 힘들다. 시청률을 반감시킬 우려가 크다. 난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니다. 그런 각본대로 연기를 하고 싶지도 않다.
그즈음 나는 한국 남성들에게 전형적으로 요구되는 드라마 속의 말과 행동에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드라마는 여자가 원하는 그런 남자의 사회적 표준을 만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