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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

평범한 남자 EP 76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잘 지내요 희택 씨"

"정말 그만두시는 거예요?"

"예 다른 일을 좀 해보려고요"


지호 씨가 회사를 떠난다. 진급 누락으로 상심이 컸던 것일까? 아니면 그전부터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성공한 것일까? 퇴사자는 말이 없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돌연 사표를 던졌다. 그의 퇴사 선언에 기획실 직원들은 다들 놀라고 당황한 눈치다.


항상 씩씩하고 밝게 생활하던 그였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퇴사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특히 도과장이 충격이 큰 것처럼 보인다. 기획파트에서 좌청룡 우백호의 한 축을 담당하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상훈 씨만 진급되고 그를 챙겨주지 못한 죄책감 때문인지 다음번 하반기 인사 때 꼭 진급되게 해 주겠다며 그의 퇴사를 만류시키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희택 씨~ 이거 가져요, 틈나면 한번 읽어봐요 재미있어요"


그는 자신의 책상을 정리하며 책상 위 서류꽂이에 있는 책을 한 권 나에게 건네며 말을 한다. 그전에 사무실에 남아 그가 읽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다. 혹시 그는 가난한 아빠가 아닌 부자 아빠가 되기 위해 떠나는 것일까?


그는 책상을 정리하고 다른 사무동 직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나누고는 본사 건물을 떠나 조선소 야드가 있는 진해 공장으로 이동해 과거 설계팀에서 일했던 동료들과의 작별인사를 나눴다. 그 또한 나처럼 타부서(해외영업)로 입사해 기획실로 온 특이한 케이스다. 당시 사장의 다양한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취지로 이뤄진 기획파트의 인원구성이었다.




"야~ 지호야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냐?"


그날 저녁 조촐한 그의 송별 회식이 진행되었다. 도과장은 쌓인 정 때문인지, 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홧김에 마구 들이킨 술 때문인지 꽐라가 되어 그를 붙잡고 서운한 마음을 담은 말들을 쏟아낸다. 도과장의 주사(酒邪)로 인해 송별회는 어수선하게 정리되었다.


"지호 씨 그런데 다른 갈 곳은 알아봐 놓은 거예요?"

"뭐 그런데가 있어요 하하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알려드릴게요"

"오~ 뭐 어디 좋은 데 가나 본데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는 말이 있잖아요 하하하"


과거 재계 순위 2위까지 올라왔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남긴 말이다. 세계 각지를 누비며 한국 수출 역군으로 한국 기업의 역사를 새로 쓴 그였다. 지호 씨도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역사를 쓰려는 건지 퇴사를 하는 얼굴에 뭔지 모를 자신감과 희망 같은 것이 엿보인다.


회사 인간은 한번 익숙해진 시스템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인간은 본디 안정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그 시스템 안에선 변화와 위험을 감지하기 쉽지 않다. 과거 대우그룹도 IMF라는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기와 변화는 서서히 다가오는 것 같지만 예고 없이 한순간에 터진다. 인간은 항상 터지고 난 뒤에야 후회를 한다. 그리고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세상에 의해 변형된다.


과거 토익 성적을 위해 공부하던 영어 문법에는 항상 '주어+be동사+p.p(과거분사)' 형태의 수동태 문장들이 자주 등장하곤 했다. 그냥 간단히 "I write a novel" 하면 될 것을 "A novel is written by me" 같이 복잡하게 뒤집어쓰는 것을 좋아하는 듯 보였다. 스스로 변화하기보단 변화되는데 익숙한 한국인의 모습이랑 닮아있다.


그가 떠난 뒤 사무실은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노 과장의 주재원 파견과 지호 씨의 퇴사로 기획파트의 인원이 두 명이나 빠진 공백은 누군가가 채워야만 했다. 누군지가 뻔히 보인다. 지호 씨의 홍보 파트 업무까지 떠안게 되었다. 물론 상훈 씨가 좀 떼어가긴 했지만 대리로 진급한 그였다. 이제는 나와 레벨이 다르다. 직급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기 마련이다. 그에 상응하는 직급 우대를 은연중에 바라는 게 사람의 심리이다.


자신은 이제 주담(IR : Investor Relation - 주식 공시담당)이라는 것을 명시하려는 듯 새로 짠 업무분장표에 보란 듯이 자신의 이름과 직급을 박아 넣었다. 사실 진급 전에도 그가 다 했던 업무이다. 단지 업무분장표에 사원이 주담을 한다는 것이 대외적으로 보기 좋지 않아 도대리로 적어놓은 것뿐이었다. 이제는 대리 직급의 후광을 받아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자신은 전문 IR 담당임을 공고히 했다.


반면 나는 국내외 전 계열사 관리부터 원가절감 프로젝트 TFT(Task Force Team) 운영, BSC전사 성과관리(Balanced Score Card), 전사경영현황 관리(수주, 매출관리)까지, 거기에 이제 지호 씨가 하던 홍보 PR(Public Relation)까지 도맡았다. 도과장은 그게 미안했는지 현지 씨를 부사수로 업무를 같이 하라는 지시를 했다.


입사 동기끼리 사수, 부사수의 관계가 말이 되는가? 어이가 없지만 회사는 항상 어이없는 일만 시킨다. 현지 씨가 내가 시키는 일을 할리도 만무하다. 솔직히 시키고 싶지도 않은 것이 내 마음이다. 일을 두번하는 것이 싫다. 그냥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얘기라고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나가면 충원을 얘기해야 옳지만 일체 그런 얘기는 없다. 인사팀에서도 경기불황으로 내년까지는 추가 채용이 없을 거라는 얘기만 나돌고 있었다. 사람은 줄어도 일은 줄지 않는다. 그러면 남아있는 자들의 고통은 배가 된다. 다시 이직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른다.


떠나는 자는 홀가분하지만 남겨진 자는 무거운 짐을 떠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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