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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의 외모 변천사

평범한 남자 EP 77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해가 바뀌고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토익 스피킹(TOEIC Speaking) 시험을 치는 날이다. 영화회화의 중요성이 그 어떤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었다. 기업 채용에서 강조되던 영어실력은 항상 토익으로만 대변되던 것이 토익=영어실력이라는 공식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토익이 900점이 넘는 사람들이 인력시장으로 수두룩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외국인과 대화도 제대로 못하는 책벌레(책에 대한 모독이니 수험서 벌레로 정정)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서류전형에서 공식적인 영어스피킹 성적을 요구했고 실무면접 전에 영어면접이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서서히 관행으로 자리 잡혀 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토익스피킹 응시자 수도 늘어가고 있었다. 토익도 모자라 토익스피킹까지 취업과 이직의 길은 갈수록 험난해진다.


그동안 제시카의 도움을 받아 회화실력이 많이 향상되었다. 그녀와 거의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거의 1시간가량을 영어로 통화를 했다. 물론 오고 가는 모든 말이 영어는 아니었지만 되도록 영어를 쓰려는 나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었다.


언어는 역시 여자에게서 배우는 것이 맞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외국어를 쓰면 부끄러움이 사라진다는 장점이 있다. 모국어로 하는 사랑의 속삭임은 닭살과 함께 유전적 거부반응이 온몸을 엄습하지만 외국어는 그렇지 않다. 어휘와 문장 속에 녹아있는 그 기운들을 내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구 던져보고 본다. 그것이 때론 남녀 간의 애정전선에 불을 짚이는 효과를 발휘한다.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최영 장군의 말처럼 사실 '여자'가 아닌 '황금'이 맞다. 뭐 여자나 돈이나 남자가 밝히는 건 매한가지이다. 여자 앞에선 돌처럼 굳어져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상도 사나이지만 중국어만 쓰면 온갖 닭살스런 말들도 거리낌 없이 남발한다. 그래서인지 중국어을 아는 한국인이 나를 보면 깜짝 놀라곤 한다. 한국말을 할 때랑 중국어를 할 때 느낌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게 다 처음 여자에게서 배운 여성스러운 표현과 어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중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중문과(중국 학생 입장에서 국문과) 여학생 푸다오(辅导:과외 선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자주 듣는 발음을 따라가게 되어있다. 중국 남자들은 발음이 모호하고 흘리는 경우가 많고 사용하는 어휘량도 여자들보다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초기 중국어 회화 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중국에는 100가지가 넘는 방언이 존재한다. 여러 지방에서 학업을 위해 도시로 상경한 학생들이 각기 자기들끼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를 쓴다. 남자들은 특히나 그 억양(성조)이나 발음이 너무 각양각색이었다. 도무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들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천천히 푸통화(普通话:보통화 = 표준어)를 구사해주어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 중국어가 고급 수준에 올랐을 때는 중국어의 현지화를 위해 남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들 세계의 언어들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쉽진 않았지만 재미있는 세계다.


외국어 학습은 아기가 말을 배워가는 과정과 동일하다. 모국어(母國語)는 그냥 모국어가 아니다. 어머니로부터 배우기 때문에 모국어인 것이다. 아무리 들어도 부국어(父國語)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언어의 시작은 여자와 함께하는 것이 좋다.


[도슨~ God bless you!] (신의 가호가 있기를...)

토익 스피킹 시험장

시험장에 들어가려 할 때쯤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부산의 모 대학에 수험장이 마련되었다. 토익 스피킹 시험이 시행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토익 수험자 수가 많지는 않다. 더욱이 6만원이 훌쩍 넘는 응시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되는게 사실이다. 기존에 치던 필기시험과 달리 생소하다. 칸막이가 있는 시청각실에 앉아서 시험을 치른다. 여태껏 치러왔던 시험과는 다른 환경과 시스템에 어색하다. 시험이 시작되고 주변에서 한 명 두 명씩 입을 떼기 시작하더니 모두들 자신만의 영어로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긴장 때문인지 말이 잘 떨어지지가 않는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문을 열었다. 평소 밤마다 제시카에게 속삭이던 어조로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모든 문항에 답변을 다 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였을까? 시험 종료와 함께 피로가 쏟아진다.


"도슨! How was your test?" (시험 어땠어요?)

"음... 잘 모르겠어요 끝나고 나니 기억이 하나도 않나요"

"What?!"

정말 이상하게도 시험이 끝나고 시험장을 나서고 난 후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물음에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하지만 도통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나왔는지 무슨 문항이 있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다. 모국어와 달리 영어는 아직 나의 뇌가 오래 저장하고 싶을 만큼 친근한 언어는 아닌가 보다.




시험이 끝나고 대학 캠퍼스를 잠시 거닌다. 겨울 방학을 맞이한 캠퍼스 한산하다. 이따금씩 보이는 풋풋한 대학생 커플들이 모습에서 캠퍼스의 낭만이 느껴진다.

캠퍼스

잠시 눈을 감고 과거 대학생 시절을 회상한다. 냉정한 사회와는 달리 캠퍼스라는 울타리 안은 어머니 품과 같이 편안했던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체적 정신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한 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 대가는 값비쌌지만 그땐 그것이 내가 아닌 부모님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만 생각했다.


마냥 즐거운 캠퍼스의 생활은 내 생애 가장 낭만적이고 걱정 없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처음 맛본 자유는 방종으로 변질되었다.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천지도 모르고 날뛴다.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가고 먹고 대학생(놀고먹는 학생)은 졸업을 앞두고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대학의 낭만과 자유는 3학년까지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캠퍼스 울타리 밖의 현실과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얼굴에 조금씩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4학년이 되면 새내기 때의 파릇한 순수함과 싱그러움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여대생의 학년별 외모의 변화는 그것을 확연히 보여준다. 새내기 때는 치장(治粧)을 시작하고 2학년이 되면 본격적인 화장(化粧)술이 발전한다. 3학년이 되면 분장(扮裝)을 습득한다. 그리고 4학년이 되면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변장(變裝)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래서였을까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강을 하면 캠퍼스에서 4학년 여자 선배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실 그건 그녀들의 변장술 때문에 내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사회 속에서 감추고 살아가야 할 것이 많아서일까? 여자들의 얼굴은 무언가에 자꾸 덮이고 가려지며 화려 해지지만 그 속은 갈수록 어두워진다. 무대 조명이 밝고 화려할수록 그 뒤는 더욱 어두운 것처럼...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변장한 연기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 속에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어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여자들의 화장술에 속아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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