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는 해외로 나가는 인파로 북적였다. 공항에는 나처럼 도피성 여행을 떠나는 듯한 몇몇 젊은 여성들이 눈에 띈다. 그동안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로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면 스스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돈으로 비행기를 탈 때는 잘 몰랐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비하면 적지 않은 돈이지만 나를 위한 보상이라 생각하고 질러버렸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근검절약을 보고자란 터라 돈 쓰는데 인색했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모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모아도 물가와 집값을 따라가기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나의 견문을 넓히는데 투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명절이 아니면 따로 시간을 내서 해외여행을 갈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휴가 때는 성수기라 비용이 너무 비쌌다. 아버지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짐을 챙겨 집을 나왔다.
김해 공항 (Kimhae international Airport)
"도슨~ I envy you so much~" (부럽네요)
"쏘리~ 가서 영어회화 연습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
"Ok I'll check later, speak as much as you can!" (확인할꺼예요, 말 많이 하고 와요)
"옛썰"
혼자서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다. 제시카는 혼자 떠나는 여행이 부러운지 아쉬움 섞인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전달된다. 그녀는 학교 실습과제 때문에 연휴에 쉴 시간이 없다고 한다. 여태까지 해외출장은 많이 다녔어도 내 돈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태국 여행 책자와 커다란 백팩을 메고 공항에 앉아 여행 계획을 짜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08) 이후 주춤했던 해외여행이 붐이 다시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그즈음 명절 연휴를 이용해 해외로 떠나는 여행족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나만 불경기인가 다들 여행 가는 행색이 풍족해 보인다. 여행을 가는 건지 쇼핑을 가는 건지 두 손 가득 면세점에서 산 물건들로 묵직하다. 내 손에는 담배만 한 가득이다. 친구 녀석들의 위탁 배달을 위해 샀다. 부모님의 선물은 해외출장 때마다 사드린 터라 가뜩이나 가벼워진 지갑에 펑크를 내고 싶진 않았다.
"Good evening, passenger. This is the pre-boarding announcement for filght KE921 to Bangkok" (안녕하십니까 승객 여러분. 이 방송은 방콕행 KE921편 사전 탑승 안내입니다.)
비행기는 무거운 나의 몸을 띄우려 속도를 내며 활주로를 달린다. 등이 등받이와 밀착되며 롤러코스터의 시작 시점 경사처럼 몸이 45도로 기울어진다. 중력을 이기고 힘겹게 날아오른다. 비행기는 이륙할 때 연료의 80%가량을 소모한다고 한다. 비상(飛上)하는데 그만큼 많은 에너지와 힘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어려운 것처럼... 사회초년생은 어찌 보면 비상하려는 비행기와도 닮아있다.
밤하늘에 위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환한 불빛들로 곳곳을 밝히고 있다. 불빛들은 조금씩 멀어지고 비행기는 시커먼 바다로 향한다. 그곳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다. 멀리 도시의 화려한 불빛은 어둠을 밝히려 한다. 빛은 어둠을 밝히지만 때론 어둠이 빛을 삼키기도 한다. 육지에서 바라본 비행기의 불빛은 아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난 어둠을 뚫고 미지의 세계로 향한다.
Ladies and gentlemen, We will be arriving on Bangkok, Suvarnabhumi International Airport, in about ten minutes.(승객 여러분 저희는 10 본 뒤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5시간가량의 비행이 끝나고 비행기가 활주로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지듯 슬라이딩한다. 비행기가 채 멈추기도 전에 사람들이 안전벨트를 풀고 짐을 내리기 바쁘다.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한국의 초고속 성장의 배경에는 그들의 빠른 움직임이 있었다. 개개인의 행동양식이 모여 그 나라의 문화를 이루고 그 문화를 배경으로 경제는 성장한다. 그리고 그 문화가 경제성장을 촉진시킨다면 그 문화는 더욱 장려되고 주류가 된다. 그 이면에 가려진 폐해들도 같이 성장한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 (Suvarnabhumi International Airport)
어차피 늦은 밤 다른 일정도 없다.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창가 쪽이라 그냥 앉아서 분주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다. 이미 탈출 준비가 끝난 승객들은 복도에 서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사와디 캅"(안녕하세요)
가무 짭짭한 피부의 태국 여직원이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하고는 나의 여권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도장을 찍고는 다시 나에게 건넨다. 난 여행책자에서 본 '컵쿤 캅'으로 화답하고 이미그레이션을 빠져나왔다.
"Where can I get the bus to Khaosan Road?"(어디서 카오산로드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죠?)
"#$$%^#^#&"
후덥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더위는 가시지 않는 듯하다. 늦은 밤의 공항은 한산한 모습이다. 버스를 타야 한다. 근처에 인상이 착해 보이는 현지인에게 카오산로드(Khaosan Road)로 가는 버스 승강장의 위치를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영어 같긴 한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나의 리스닝에 문제일까? 토익 리스닝 컴프리핸션(Toeic listening comprehension) 발음에 익숙해진 나의 귀는 다른 세계의 영어를 영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실 영어는 말이 영어지 영어권 국가보다 더 많은 비영어권 국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모국어와 영어를 같이 구사하면서 그들만의 영어를 만들었다. 그들이 구사하는 영어는 한국인의 일상과 문화 속에선 (영화, 영어회화 등) 접하기 쉽지 않다. 해외에 나와보면 내가 아는 영어는 언어라기 보단 그저 내가 필요한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학습 과목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어도 다 같은 영어가 아니다.
난 다시 지도와 여행책자를 펼쳐 보이며 위치를 찍어 주며 그냥 크게 'Bus! Where?'을 외쳤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어느 지점을 가리킨다. 그곳에 몇 대의 2층 버스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난 또다시 '컵쿤 캅'을 외치고 그곳을 향했다. 어설프게 문장을 만드는 것보다 핵심 단어와 적절히 섞인 제스처가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영어는 더 이상 늘지도 않고 눈치만 늘어간다.
"Is this bus going to Khaosan Road?"(이 버스는 카오산로드를 갑니까?)
"Yes!"
버스 안은 사람으로 가득하다. 늦은 시간 도착한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버스 안에 뒤섞여 있다. 난 불안한 마음에 기사 바로 옆자리에 앉아 기사에게 최종 확인을 하고 서야 안심을 하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내쉰다. 차 안은 초겨울 날씨 같다. 들어올 때 시원함은 이내 추위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사람의 신선도 유지가 아닌 냉동이 목적인가? 가방을 뒤져 긴팔 옷을 꺼내 입고서야 팔에 돋은 닭살들을 잠재울 수 있었다.
카오산 로드는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땐 무슨 산에 사람들이 모이지 하는 단순무식한 생각을 했다. 모국어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의 사고체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의 벽을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은 치매에 걸릴 확률이 낮다고 한다. 그만큼 두뇌를 활성화시킨다는 말이다.)
카오산로드 (Khaosan Road)
불야성(不夜城)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 거 같다. 밤 12시가 다되어가는 시간에도 카오산로드는 인파로 북적인다. 곳곳에서 국적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언어들이 쏟아져 내 귀를 어지럽힌다. 전 세계의 백패커들이 모인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나서야 실감한다. 자기 키만 한 배낭을 앞뒤로 메고 거리를 누비는 여행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펍 안은 술을 마시며 정보를 교환하는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길거리에서 야식을 즐기는 사람들과 마사지 호객행위를 하는 태국 여성들, 이제 막 도착한 듯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사진기 셔터를 눌러대는 백패커들까지 정말 생동감 넘치는 거리이다.
피로가 밀려온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 때문인지 그 피로감이 배가된다. 빨리 숙소를 찾아야 한다. 지도를 펼쳐 들고 위치를 파악한다. 한참을 인파 속을 헤매다. 찾아낸 게스트하우스는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할 때 보던 것과는 달랐다. 보통 다르다는 건 대부분 나쁜 쪽에 속한다. 일단 그런 걸 따질 체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체크인을 끝내고 들어간 방은 더 큰 실망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불을 켜고 들어간 방의 하얀 벽에 뚜렷하고 커다란 점 하나가 눈에 띈다. 그 점은 빠른 속도 이동하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나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일단 녀석의 생명을 좀 연장시켜주기로 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오는 길에 거리에서 먹었던 꼬치가 잘못된 것인지 배속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무시할 수 없었다.
몸속의 찌꺼기들을 배출하고 몸밖까지 깨끗이 씻었다. 미리 켜놓은 에어컨 바람에 식혀진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온몸을 감 싸도는 시원 상쾌한 기분이 피로를 날려 보내는 듯하다. 벽에 있던 점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찝찝하다. 핸드폰과 카메라를 충전하고 침대에 누웠다. 몸속 피로와 몸 밖 개운함이 노곤함을 불러온다.
"쾅!"
"Come on! Baby~"
"Oh~ Fuck~"
눈이 감기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P2P 사이트를 통해 받아볼 수 있는 영상 속의 음향들이 라이브로 들려온다. 그제야 벽이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얇은 판자 같은 것으로 막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상 없이 사운드만 제공되는 야동은 처음이라 어색하다. 바닥이 삐걱거리며 그 진동이 내 방까지 전달된다. 그 진동으로 그들이 육중한 몸을 상상할 수 있다. 4D 영화관이 따로 없다. 화면만 없는...
"아~~~~~~"
마지막 긴 탄성과 함께 영화가 끝이 난 듯 보였다. 피곤에 절어 혼미해져 가던 정신이 또렷해져 버렸다. 잠을 이루긴 글렀다.
"쿵!"
마침 그때 다시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점을 슬리퍼로 후려쳤고 벽에 큰 소리를 내며 터진 잔해들을 휴지로 닦아냈다. 그 소리 때문인지 그 뒤로 옆방에선 개미 발자국 소리하나 들리지 않는다. 잠을 이루려면 알코올의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
1시가 넘은 시간 아직 밖은 대낮처럼 밝다. 이제 혈중 알코올 농도가 올라온 취객들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난 편의점에 들어가 500ml 현지 맥주와 컵라면을 사들고 나왔다. 해외여행을 가면 먹는 것은 철저히 현지화 전략을 취한다. 일단 입맛에 맞든 맞지 않든 먹고 본다. 그것이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모국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지 못하는 것을 하려고 나온 것이 아녔던가? 가끔 한국 여행객들이 김치와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을 잔뜩 들고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Thai Cup Noodle and Singha beer
카오산로드가 내게 남긴 첫인상은 화려한 조명을 찾아 모여든 다양한 배낭족들이 술과 유흥으로 어울려 밤을 지새우는 곳이 되었다. 나 또한 방 안에 홀로 알아듣지 못하는 태국 TV를 보며 맥주와 컵라면으로 심심한 배를 채우고 잠을 청한다.
여행은 항상 예상치 않은 일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여행이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가는 여행은 재미도 없을뿐더러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관광 가이드의 깃발만 쫓아다니는 그런 노년의 여행은 비추다. 청년의 여행은 가난하긴 해도 넘치는 체력으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 속에 놓여 보고, 듣고, 느낀 것들로 인생의 밑거름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