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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처녀와 노총각

평범한 남자 EP 81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여행의 셋째 날이 밝았다.


다시 원래 궤도로 복귀해야 할 시점이다. 어제 아침에 카오산 로드에 위치한 현지 여행사를 통해 오늘의 당일 교외 투어를 예약했다. 새벽 일찍 출발하는 여정이다. 서둘러 게스트 하우스를 나왔다. 다시 선선한 새벽 공기를 뚫고 여행사 앞으로 갔다.


"Are you Dawson?" (당신이 다슨이요?)

"Yes, I am" (예)

"Please come here, get in the car" (여기로 와서, 차에 올라요)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종이에 적힌 이름을 보고 나를 부르는 듯 보였다. 내가 제일 늦은 모양이다. 승합차 안에는 빈자리 없이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승합차 뒷문 입구에 한 자리만 남아있다. 그 옆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 둘이 앉아 있다. 비슷한 나이에 한 명은 작고 통통한 체형인 반면 창가 쪽에 앉은 여성은 키가 크고 호리 한 체형이다. 그 뒤로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서양인들과 동양인들이 섞여있다. 탑승자를 모두 확인한 기사는 차를 출발한다.


"수상시장에서 이거 먹어보자"

"응 그래 언니, 이것도 맛있어 보인다"


내 옆에 앉은 두 명의 여자들은 여행책자를 같이 드려다 보며 소곤거린다. 뒤에는 서양 커플이 프랑스어로 뭐라고 하는 듯하다. 그 옆에는 중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그가 신고 있는 리닝(李宁: LI-NING, 중국 스포츠웨어 브랜드) 운동화가 그가 중국인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 뒤로 앉은키가 유난히도 큰 금발의 여자가 말없이 자신이 들고 있는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다. 제일 뒷자리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모자(母子)가 보인다. 엄마는 잠시도 가만있질 않는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


"你是中国人吧?”(중국인이세요?)

”你怎么知道?你也是?” (어떻게 아셨어요 당신도?)

"我是韩国人”(전 한국인이예요)

”那你怎么汉语说得这么流利?”(그런데 어떻게 중국말을 이렇게 잘해요?)

“哪里哪里~ 还差得远呢”(에이 어디요~ 아직 한참 멀었어요)


여행의 묘미 중의 하나가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외국인이라는 것이 해외여행의 가장 큰 매력이다. 영어는 좀 힘들지만 중국어라면 부담 없이 말을 섞을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만만한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상해에서 교통대를 다니는 대학생이다. (상해교통대上海交通大学는 에서도 꽤 이름있는 대학교이다)부모님이 이곳 방콕에서 사업을 하신다고 한다. 설 연휴에 부모님을 찾아왔고, 하루 시간을 내어 근교 여행을 왔다고 한다. 나도 과거 상해에서 유학했던 얘기를 꺼내니 아주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한참을 중국과 한국 얘기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Your camera looks so nice!"(당신 카메라는 멋있어 보이네요)

"Oh~ thank you" (오 고마워요)

"Where are you from?" (어디서 왔어요?)

"Germany" (독일요)


짧은 영어지만 잉글리시 스피킹 연습을 소홀히 할 수 없다. 뒤에 홀로 조용히 앉아있는 금발녀도 이야기에 끌어들였다. 그녀는 홀로 배낭여행 중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시작한 아시아 투어는 한국, 중국을 거쳐 베트남, 태국까지 왔다고 한다. 독일에서 오랜 시간 언론사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녀의 영어 발음이 또렷하고 동양인을 배려해서인지 짧고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는 덕분에 어렵지 않게 대화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동양을 여행하면서 그녀 나름 터득한 언어 사용법인 듯 보이다.


"Do you want to eat?" (드실래요?)


뒤 쪽을 바라보며 계속 대화를 이어가던 나에게 옆에 앉아있던 한국 여성이 영어로 말을 건네 온다. 그녀들도 이야기에 동참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녀는 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태국산 과자가 들려있다.


"아~ 괜찮습니다. 드세요!"

"헉! 한국분이세요?"

"예 그런데요"

"저희는 외국 사람인 줄 알고 하하하"

"중국말도 하시네요"

"예 조금요"

"저희는 처음에 일본 사람인가 했어요. 근데 중국말 하시길래 중국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녀 둘은 반가움이 섞인듯한 놀란 표정으로 조금 전 천천히 더듬거리던 영어와는 달리 속사포 같은 한국어 실력을 발휘하며 무언가를 계속 물어본다. 그녀들은 나의 행색에 약간 오타쿠스런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한 듯 보였다.


나는 여행 중에는 외모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는 편이다. 대충 다닌다. 면도도 않지 않고 최대한 편한 복장으로 다니는 편이다. 발품을 많이 파는 나는 불편한 복장이나 불필요한 시간을 최소화하자는 게 나의 여행 철학이다. 한국 여자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여행스타일이다. 중국과 독일 친구들은 그런 우리들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녀들은 한껏 신경을 쓰고 나온 모양새다. 그런데 거지 몰골을 한 남자가 옆에 앉았으니 거부감이 드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차에 탑승할 때 나를 바라보던 불쾌한 눈빛과 지금은 사뭇 달라 보인다.


한국 여자들의 여행 복장은 장소와 상황에 따라 변한다. 유럽의 고풍스런 파리나 이태리 같은 선진국의 여행지에서는 현지인같이 되려는 듯 튀지 않는 의상과 패션으로 그들의 생활 속에 섞이려 하고 동남아 혹은 자국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나라라고 생각되면 그 속에 묻히지 않으려 돋보이고 화려해지는 경향이 짙다. 물론 케바케(Case by case)이겠지만 내가 여행하면서 느낀 한국 여성들의 복장은 그러했다. 그래서 더욱 눈에 띄고 쉽게 알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옆에 앉은 두 여성은 초등학교 교사이다.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은 많아 보인다. 그들은 처음엔 극존대 분위기로 말을 하다가 내 나이를 확인하고는 태도가 돌변한다. 그들은 명절과 방학만 되면 해외로 떠나는 여행 파트너라고 한다. 명절은 명절 스트레스를 피해 방학은 더위와 추위를 피해 떠난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참 매력적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시간적 여유가 많고 안정적인 초등학교 교사는 결혼정보업체에서 남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성 직업 순위 1~2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들은 해외여행에 쏟아붓는 돈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아 보인다. 교사 봉급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해마다 명절과 방학 때마다 해외를 나가면 일년에 최소 4번은 나간다는 얘긴데...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러움과 위화감이 뒤섞인 감정이 샘솟는다.


"혼자 여행해요?"

"예"

"와~ 멋있다. 난 혼자서는 무서워서 못하겠던데"

"영어에 중국어까지 하니 불편한 게 없겠다"

"영어는 저도 잘 못해요"


그녀들은 나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한 듯 보인다. 뒤에 앉은 중국과 독일 친구는 대화 상대를 뺏긴 걸 깨닫고는 취침모드로 들어갔다. 차 안은 나와 그녀 둘의 대화 소리만 들린다. 그녀들은 영어가 안돼서 너무 힘들다며 오늘 같이 동행을 제안한다. 어차피 같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같은 차로 계속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1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수상시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방콕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패키지 코스인가 보다. 입구부터 승합차와 관광버스가 가득이다. 기사는 1시간 반 뒤에 다시 여기 차량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전달한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시장으로 들어간다. 배위에 과일부터 수공예품들까지 다양한 상품을 팔러 나온 상인들이 관광객을 향해 끊임없이 손짓과 눈길을 보내며 호객행위를 한다.

담넌 사두억 수상시장 (Damnoen Saduak Floating Market)


우리는 출출해진 배를 채우려 노점상 앞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해산물 요리와 과일 등을 사서 늦은 아침을 해결했다. 유람을 즐길 타임이다. 작은 보트에 올라 수상시장 곳곳을 누빈다. 비좁은 도랑 위를 수많은 보트들이 움직이다 보니 잦은 충돌이 생긴다. 그 충돌의 진동과 흔들림이 더 재미있다. 뜨거운 햇살에 갈증이 밀려오면 옆을 지나가는 노점 보트에서 코코넛을 사서 마시면 된다. 보트 위에 올라 이곳저곳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다음 여행지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다. 항상 단체 여행에서 발생하는 상황 중에 한 가지가 일행이 사라지는 것이다. 집합시간 30분이 지나가도록 한국인 모자 둘이 보이지가 않는다. 차에 대기 중인 일행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저기 앞에 인파들 속에 모자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둘은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손을 잡고 이쪽으로 느긋하게 걸어온다.


"What took you so long?"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예?"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오셨냐고 물어보는데요?"

"아~ 아참! 시간이..."


그제야 그녀는 시계를 보더니 일행들이 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지 깨닫는 눈치다. 그녀는 잠깐 당황하는가 싶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 뒷좌석으로 들어가더니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손잡이 콘을 우걱우걱 씹어먹는다.

차량은 다시 칸짜나부리로 향한다. 다들 수상 시장에서 놀고먹은 체력을 보충하려 취침모드로 들어간다. 2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 죽음의 열차를 탄다. 느린 속도로 아슬아슬한 절벽 위를 달리는 열차에서 창 밖 비경을 바라보는 색다른 경험을 한다. 승객들은 경치보다는 절벽 위의 열차 안에 자신이 있다는 걸 남기려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사진을 찍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죽음의 열차 (Death Railway)

"남편 분은 같이 안 오셨나 봐요?"

"아~네 남편은 주재원으로 해외에 나가 있어요"

"아 그러시군요"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유치원생쯤으로 보이는 아들과 함께 방학이나 명절 때 해외여행을 다니며 아이의 견문을 넓혀 준다고 한다. 남편은 자동차 관련 회사 임원으로 인도에 주재원으로 3년째 근무 중이라고 한다. 보통 방학 때는 다른 또래 아주머니들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여행을 다니는데 이번 명절 때는 다른 친구들은 남편 따라 시댁에 끌려가는 통에 같이 나오지 못했다며 짜증스러운 말투로 아쉬움을 토로한다. 자신은 남편이 해외에 있어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자랑스러워 보인다.


"희택 씨~ 우리도 사진 찍어요!"


두 누님들께서는 서로 앞 뒤 창문에 자리 잡고 사진을 찍고 있다.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며 가끔 창밖의 풍경만 보고 있던 나에게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보라며 손을 잡아 끈다. 그녀들은 영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해야 한다며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두 팔을 벌려 환호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앗! 안돼~에!"


그녀의 창이 넓은 하얀 라운드 모자가 바람에 날려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환호하던 표정은 일그러지고 처량한 모습으로 떨어지는 모자를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이미 모자는 계곡 어딘가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나도 고개를 내밀어 눈을 감고 바람과 풀냄새를 느껴본다. 열차의 바퀴와 레일이 맞닿으며 내는 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열차 안의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한데 섞여 귀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다 눈을 떠 내려다본 밑은 아찔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통통한 누나가 나를 찍었다.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며 자화자찬이다. 사진이 나쁘지 않다. 덕분에 인생 샷을 하나 건진 기분이다.

콰이강의 다리 (The Bridge on the River Kwai)

기차가 도착한 곳은 영화로도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일명 죽음의 다리이다. 세계 2차 대전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들을 동원해서 만든 다리이다. 뭐 내용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된다. 수많은 자들의 죽음으로 세워진 그 다리 위 철도를 장난기 섞인 웃음과 함께 걷고 있는 이들은 전쟁의 참상을 조금이라도 알까?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는 현재의 풍요와 편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일까 오랜 시간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겪은 자들은 현재의 삶을 감사할 줄 안다.


그런 애도의 분위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국의 영원한 라이벌이라서 일까? 프랑스 커플은 어디서든 애정행각이 거침없다. 죽음의 다리 위에서 로맨스 영화를 찍고 있다. 그들의 행동은 차 안에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냥 눈만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키스한다. 죽음의 다리 위에서 죽음의 키스를 하려는 건지 이번엔 좀 길고 찐하다. 숨은 쉬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 모습을 침을 삼키며 한참 바라보다 옆에 있던 통통 누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어색한 나머지 멀쩡한 신발끈을 다시 고쳐 묶는다. 그녀도 어색했는지 갑자기 디지털카메라를 들어 다른 곳을 찍는 척한다.


해가 조금씩 기울어 간다. 당일 투어의 빡빡한 일정에 다들 지친 모양이다. 차에 올라탄 일행에 빛을 잃어가는 태양처럼 생기를 잃은 모습이다. 저녁 노을을 뒤로 한채 베이스캠프인 방콕으로 향한다. 다들 잠에 빠져든다.


"Thank you! Bye!"

"희택 씨! 우리 저녁 같이 먹을래요?"


밤이 되어 도착한 카오산로드는 다시 또 밤을 잊게 만든다. 일행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려는 찰나 그녀들은 그녀들이 찾아놓은 맛집이 있다며 같이 저녁을 먹자는 제안을 한다. 나 또한 저녁을 먹어야 하고 음식점 찾는 것도 귀찮아 흔쾌히 승낙했다.


역시 여자들은 분위기다. 한 참을 걸어서 찾은 그 음식점은 잔잔한 재즈음악과 은은한 조명이 동남아의 식물들과 조화를 이룬 운치 있는 식당이다. 건네받은 메뉴판에 적힌 가격 또한 예상한 것과 일치했다. 현지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면 서민들이 먹는 음식이나 길거리 음식을 즐기는 나에겐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이미 발을 들였으니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희택 씨 뭐 먹을래?"

"전 이 볶음면 먹을게요"

"맥주도 한잔 콜?"

"예 좋죠 하하"


그녀들은 레스토랑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가며 서로를 찍어준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초청된 신데렐라로 묘사하기 위한 소중한 한 장을 건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싸이월드의 메인사진 필요한 모양이다.


주문한 음식이 식탁에 놓이고 또다시 사진을 찍고 나서야 스푼을 들 수 있다. 음식값에는 분위기 비용이 포함된 듯 보인다. 맛으로 승부하는 곳은 아닌 듯하다. 그런 나와는 달리 그녀들은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시각과 청각이 미각을 가려버린 듯 보인다. 맛있다며 난리들이다. 여자들은 밥을 입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희택 씨는 무슨 일 해요?"


그녀들의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다. 맥주가 모자랐는지 와인까지 주문한다. 나의 호구조사로 시작된 이야기는 그녀들의 신세한탄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그녀들도 나처럼 명절을 피해 자유를 만끽하러 온 지 햇수로 10년이 다되어 간다고 한다. 짝을 찾지 못한 암컷들은 시간이 갈수록 신데렐라의 꿈이 더욱 간절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그건 수컷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말 회식 때 노대리 지금의 노 과장이 했던 말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여기서 장가 안 간 놈 중에 나이 젤 많은 사람 일어나서 건배사 한 번 해봐!"


사장의 짖꿎은 장난기가 또 발동했다. 그는 누군지 뻔히 알면서 면박을 주려 일부러 그런 것이란 것을 모든 부서원들은 알고 있다. 결혼은 곧 충성으로 이어진다는 공식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비공식적인 인신공격이 자행된다. 노대리는 해마다 겪어온 이 상황이 이젠 지겨울 때도 되었다. 듣는 사람들도 해마다 듣는 노총각의 건배사가 식상해져 가고 있었다.


"이젠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더 이상 쉽게는 못 가겠습니다!"

"하하하"


예상을 뒤엎는 답변으로 술자리는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사장도 어이가 없었는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그 이후로는 그에게 공식석상에서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에 쫓기다 보면 시기를 놓치고 주변의 재촉과 성화에 못 이겨 의례행사 통과하듯 서둘러 조건 맞는 사람을 골라 결혼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살다 보면 다 똑같다는 어른들의 말을 믿고 결혼을 했지만 결혼과 행복은 섞이지 않는 따로국밥인 부부들만 늘어가는 듯 보였다.


내 앞에 그녀들도 노과장과 같은 부류인 듯 보인다. 기다린 시간을 아쉬워하다 기다림에 익숙해져 버린건 아닐까? 이젠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불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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