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혼자 하는 여행의 재미

평범한 남자 EP 80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태국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첫날은 방콕 시내를 구경하기로 마음먹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났다. 1층 로비에 식빵과 각종 쨈 류와 커피, 우유가 구비되어 있다. 간단히 토스트를 만들어 먹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의외로 시원하다.


방콕 시내도 꽤 많은 볼거리가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먹는다는 말이 있다. 여행에서 조기 기상은 여행시간을 늘려주며 그 말은 벌레(견문)를 먹을 시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호텔방 침대에서 뒹구는 것은 가장 의미 없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것이 나의 여행지론이다. 되도록 발품을 많이 파는 나는 밤에 숙소로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지기 일쑤다.


처음 간 곳은 왕궁이다. 여행을 가면 증명사진이 필요하다. 방콕을 대표하는 왕궁에서 찍은 사진은 내가 태국을 다녀왔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화려한 왕궁에는 아침부터 찾아온 관광객이 적지 않다. 온통 금색으로 뒤덮인 왕궁의 화려한 건물들은 사람들의 사진 배경화면으로 부담스러울 만큼 아름답고 웅장하다. 관광객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어디서 찍어도 작품사진이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배경을 망친다.


피뢰침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은 지붕은 하늘의 신에게 닿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낸 것일까?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의 화려한 건축물들은 과거 수많은 노예와 인부들의 피와 땀의 산물일 것이다. 순간 머릿속에 그 고통의 노동 현장을 떠올렸다 지운다. 사람들은 화려함 속에 감춰진 아픈 현실과 과거를 기억하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현상과 결과에만 집중하고 그것만을 찬양(讚揚)할 뿐이다. 뭐 나 또한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들의 피땀의 역사까지 소화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thai.jpg 왓프라깨우 (Temple of the Emerald Buddha)

왕궁 속을 거닐다가 지나가는 곳곳에서 우연찮게 한 여성과 계속 마주친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한국 여성이다. 한국 여자는 전 세계 어딜 가도 티가 난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화장법과 패션 스타일이 있다. 크게 튀어 보이진 않지만 대중 속에 묻혀버리지도 않는 자연스러우면서 돋보이는 코디법을 가졌다. 그녀는 우르르 몰려다니는 단체 관광객들과 달리 여유 있게 홀로 거닐며 주변의 건축물들을 관찰하며 거닐고 있다.


관심이 있는 것에는 오랜 시간 머물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며 그곳에 적힌 안내문도 읽어보는 여유를 부린다. 나처럼 명절 도피 여행객의 일행이 아닐까 추측이다. 혼기 찬 남녀는 짝 없는 설움에 잔소리를 피해 해외에서 그 설움을 달래며 혹시 모른 운명의 상대를 찾고 있는 건 지도 모른다. 그녀는 셀카를 찍으려는 듯 손을 뻗어 자신을 비춰보지만 작지 않은 궁전을 담기에는 팔의 길이가 아쉽다. 이리저리 카메라를 앵글을 틀어 그것들을 담아보려 애쓴다.


"한국 분이시죠? 제가 찍어드릴까요?"

"아~ 네 그래 주시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 둘 셋 찰칵! 한번 더 갈게요"


그녀는 혼자 찍을 때와는 다르게 다소 어색한 포즈로 나의 구호에 맞춰 승리의 브이를 내보이며 이빨을 들어내 보인다. 그녀가 한 장의 사진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다른 구도로 여러 장을 찍어 보여준다.


"자~ 한 번 보실래요? 괜찮나요?"

"와~ 사진 잘 찍으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별 말씀을…"

"저도 찍어드릴까요?"

"음… 그래 주실래요?"

"물론이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비교적 자연스러운 방법 중에 한 가지가 사진 찍기이다. 기획팀의 상한대리는 사진 동호회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난 이야기를 꺼내며 사진동호회를 나가보라며 권유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풍경사진만 찍을 거라면 모르겠지만 찍사와 모델이 한 팀을 이뤄야 하는 인물사진은 혼자 찍기가 쉽지 않다.

Photography.jpg 사진

사진이라는 매개체가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대화로 이어지고 찍은 사진을 주고받아야 하는 합당한 핑계를 제공하여 다른 만남 혹은 연락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거기에 장비 빨(사진기)과 테크닉(사진술)이 좋다면 호감도는 배가되며 만약 사진사가 훈남이라면 99.9%의 성공을 보장한다.


아쉽지만 나의 장비빨은 그녀의 것보다 좋아 보이지 않으며, 훈남은 더욱 아니다. 그저 나름 나만의 사진 찍는 테크닉만 그녀의 사진기에 남겨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서로는 자신의 사진기에 자신을 남겨준 상대방을 기억 속에만 간직한 채 스쳐 지나간다. 이름도 사는 곳도 연락처도 모른 체… 먼 훗날 다시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누가 찍었지 하며 회상할 날이 올 것이다. 누군가의 희미한 기억 속에 남는다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방콕_왓포사원-6567.jpg 왓포 사원(Wat Pho)

근처의 또 다른 사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원과 왕궁이 참 많다. 태국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로 둘러싸인 지리적인 이점으로 옛날부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완충 혹은 중립의 지역으로서 서양 열강들의 전쟁터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문화유산들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덕분에 태국은 아세안(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국가 중에선 관광수입이 단연 1위이다.


햇살이 조금씩 강해지고 더운 기운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파란 하늘과 사원의 건축물이 잘 어우러져 작품이 된다. 그 안에 나를 추가시켜 보려 가방에서 미니 삼각대를 꺼내 타이머를 맞추고 카메라를 멀리 세워놓고 뛰어오고 다시 가기를 몇 번씩 반복하는 동안 나의 옷은 온통 땀으로 젖어가고 있다.


"Can I help you to take a photo?"(사진 찍어드릴까요?)

"아~ 네... ok thanks! Please~" (감사합니다 부탁드릴게요)


그런 나의 모습이 안쓰러웠을까? 이번엔 다른 이가 나에게 도움을 주려한다. 세상은 베푼 만큼 돌아오는 법이다. 태국인으로 보이는 세명의 남녀가 그런 나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도움을 주려한다. 원하는 사진이 잘 나오지 않던 터였다. 속는 셈 치고 그들에게 나를 맡겨보았다. 흡족한 수준은 아니지만 괜찮은 사진을 만들어주었다.


"Thank you so mcuh!"(정말 감사합니다)

"You're welcome, Where are you from?"(천만해요,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I'm from Korea" (한국이요)

"Oh~ Really? I Love Korean drama" (오~ 정말요? 전 한국 드라마 완전 좋아해요)


무리 중의 2명의 여자가 코리안이란 말에 격렬한 호감을 보인다. 둘은 각자 자신들이 봤다는 한국 드라마를 열거하며 나에게 한국인들은 다 잘생기고 예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다. 드라마가 국위선양(國威宣揚)을 톡톡히 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그들에게 준연예인급 대우를 받고 있다. 그들은 드라마 속 이야기가 한국의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듯 보였다. 실상을 얘기해주고 싶지만 그들의 한국을 향한 동경과 환상을 깨뜨리고 싶진 않다. 애국자는 못되더라도 매국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Are you traveling alone in Bangkok?" (당신은 혼자 방콕을 여행 중이세요?)

"Yes I am." (예)

"Could we be a tour guide for you today if you're Ok?"(괜찮으심 오늘 우리가 당신의 여행가이드가 되어드릴까요?)

"Why not"(그거 좋지)


그들은 나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하며 한국에 대한 심층 탐구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 사심 섞인 호의를 무시할 순 없다. 나 또한 현지인들과의 교류는 대환영이다. 계획했던 일정은 모두 변경되었고, 관광여행 책자 속이 아닌 그들이 평소에 자주 가는 그런 곳을 데려다줄 수 없냐는 나의 제안에 그들은 주저 없이 승낙했다.


방콕 곳곳을 누비는 지하철과 버스를 제외하고 또 하나의 서민교통 수단이 있다. 그것은 보트이다. 방콕 곳곳에 나있는 큰 도랑 같은 하천에는 크고 작은 보트들이 서민들의 발이 되어주고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돌아다니는 작은 보트 노선을 외지 관광객이 알기란 쉽지 않다.

방콕 수상보트.png 방콕 수상 보트

그들과 함께 주택가 골목의 도랑에 정박한 보트를 타고 달린다. 도랑물은 위생적이지 않다. 보트가 양 옆으로 물을 가르면서 물속에 덮여있던 역한 냄새들이 쏟아져 나온다. 온갖 하수들이 흘러가는 도랑인 게 분명해 보인다. 도랑과 땅이 맞닿은 부분에 한 마리의 생쥐가 헤엄치면서 벽을 긁고 있다. 뭍으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1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도랑 양쪽으로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식당가이다. 사람들로 붐비지만 외국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녀-하-세요!"


그들을 따라 들어간 식당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종업원에게 주문을 하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나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는 어설픈 한국말을 하며 웃음 짓는다. 나도 '안녕하세요'로 화답한다.


"와~ It's very delicious, I have never had this before." (정말 맛있네요, 이런 맛은 처음이네요)


잠시 뒤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이 나왔고 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며 음식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따라서 말할 수 없는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쉽지 않다. 이름 모를 음식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을 선사했다. 때론 이름 모를 들꽃이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처럼, 유명한 음식점의 이름 있는 음식보단 길거리의 보기엔 초라하지만 서민적이면서 계속 먹어도 질리지 않는 그런 맛이 좋다. 특히 여행지에서 그런 맛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다. 관광가이드 혹은 여행책자에 의존하는 여행은 편하고 화려할진 몰라도 나중에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Why do you travel alone?" (왜 혼자 여행해요?)

"Because No one can be with me for trip"(왜냐면 아무도 나랑 여행할 수 없으니깐요"


사실 누군가와 함께 여행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 또한 동행하는 여행을 싫어하진 않는다. 시간과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같이 하는 여행은 더욱 즐겁다. 다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들 뿐이다. 가장 친하다는 친구들과도 여행을 많이 다니지 못했다. 다들 하는 일이 다르고 각자의 개인적인 스케줄로 인해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다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 더욱 힘들어졌다. 학생 때는 없던 수많은 사회 속 인간관계 속에 놓이면서 친구보다 중요해 보이는 관계가 많이 생겨났다. 그 관계는 대부분 이해관계(돈) 아니면 이성관계(여자)였다.


그냥 혼자 계획하고 혼자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의 여행 패턴이 되었다. 혹시 물어봐서 내가 계획한 여행에 동참하면 같이 가는 그런 식이었다. 처음부터 성사될지 안될지도 모를 동반자를 고려한 여행을 계획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나 또한 여행을 오래전부터 계획하지 않고 마음먹으면 보통 한두 달 혹은 1~2주 만에 즉흥적으로 떠났기 때문에 누군가가 끼어가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사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이 나에겐 무엇보다 더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만약 동반자가 있다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동반자는 분명 나의 생활 반경 안에 있는 존재일 것이며, 동의를 구해야만 한다. 여행지에서도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


"What do you do for living?"(직업이 뭐예요?)

"I'm a staff in shipbuliding company. what about you guys?"(조선소 회사원이에요, 당신들은요?)

"We are University students." (저희는 대학생이에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외모에 예상은 했지만 혹시 모른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대학생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물론 한국적인 편견이 여기서도 적용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개나 소나 모두 대학을 나온 한국에서도 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뱉는 물음이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과거 처음 만난 사람에게 습관처럼 '어느 대학 나왔어요?' 혹은 '전공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생각 없이 던졌던 기억이 있다.


"Can you bring me to your school?" (혹시 당신들 학교에 나를 데려다줄 수 있어요?)


난 즉흥적으로 그들의 학교 방문을 제안했다. 조금 의아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흔쾌히 승낙을 하고는 나를 데리고 그들의 캠퍼스로 갔다. 한국과는 다르게 교복을 입은 대학생들이 캠퍼스를 누비고 있다. 통일감 있어 보이는 교복 때문인지 캠퍼스가 한결 깔끔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20160617_j19.jpg 태국의 대학생

"It means for equality." (그건 평등을 의미해요)


태국 대학생들이 왜 교복을 입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들의 대답은 나를 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까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생이 빈부에 의해 차별이나 위화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에는 있는 집 자식들과 없는 집 자식들은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빈부(貧富)와 계층의 차이를 경험한다.


"Hi, nice to meet you. Are you a Korean?" (안녕, 만나서 반가워요, 한국인이세요?)

"Nice to meet you too, Yes, I'm Korean" (예 한국인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다시 출출해진 배를 채우려 그들과 학생 식당을 찾았다. 거기서 그들의 대학 친구들을 만난 모양이다. 그들은 서로 나를 바라보며 얘기를 주고받더니 친구로 보이는 대학생이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주변의 다른 대학생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한다. 나에게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겠냐는 제안을 한다. 나는 삼각대를 꺼내 내 사진기로 같이 찍자고 하니 다들 좋아서 난리들이다. 내가 식탁 위에 삼각대를 설치하는 동안 더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똑같은 교복의 학생들 틈에 끼인 낯선 이방인으로 찍힌 사진은 흡사 선생과 학생 같은 느낌이 풍긴다.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밥을 먹는 건지 인터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학생들의 한국에 대한 질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학생식당에 한국인 관광객이 찾아든 건 그들에게는 처음 있는 신선하고 특별한 일임이 분명해 보인다.


혼자 하는 여행은 언제나 예측하기 힘든 상황의 연속이다. 그 상황에 몸을 맡기고 따라가다 보면 뜻밖의 추억을 남길 수도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