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82 (개정판)
머리가 아파온다.
어젯밤에 섞어 마신 맥주와 와인이 문제다. 여행지에서는 마음이 풀어지기가 쉽다. 풀어진 마음이 몸도 풀어지게 만든다.
두 누님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왠지 알 수 없지만 여행지에서 들뜬 만남은 빠른 친밀감을 조성한다. 거기에 알코올까지 가미되면 자신의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고해성사의 시간이 시작된다. 상대방의 거짓 없는 고해성사는 또 다른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 다른 고해성사로 이어지다. 그러면 없던 동지애가 싹트기 시작한다. 천주교로 개종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생략하고 술을 빌어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 아니면 신부님도 자신의 비밀을 지켜주지 못 할거라 생각하기 때문일까? 어차피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것이다. 차라리 다시 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이 더 안전한 것일 수 있다.
“으아아앙~ 그 잘난 의사 색끼!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 났어! 썅! 으아아앙~”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계속 마시던 통통 누나(키가 작고 아담한 누나)는 결국 꽐라가 되어버렸다. 통통 누나는 얼마 전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만난 남성에게 퇴짜를 맞은 모양이다. 상대는 모 대학병원 신경외과 전문의였다. 그녀는 의사 사모님을 꿈꾸며 그 동안 지켜왔던 자존심까지 내려놓으며 그에게 관심과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첫 만남 이후 몇 번의 만남이 더 이어졌지만 그 시간이 그녀에겐 그에 대한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감정을 키우는 시간이었고 남자에게는 그녀에게 있던 약간의 호감마저 사라지게 하는 시간이었다. 백마 탄 왕자가 앞에 나타나긴 했는데 그녀를 태워주지 않고 짓밟고 가버렸다.
그때의 설움이 술만 마시면 취기와 함께 밀려 올라온다고 한다. 그녀는 카오산로드의 길 한가운데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화장이 지워진 조커의 얼굴을 한 채 작렬하게 전사했다. 나와 호리 누나(키가 크고 호리 한 누나)는 길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양쪽으로 포박하고 숙소까지 옮기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희택아! 오늘 정말 미안! 얘가 원래 안 이런데… 우리 먼저 들어 갈께, 고마워 데려다 줘서 한국가면 꼭 연락해!”
호리 누나는 오늘 친구 때문에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서울 오면 한 번 연락하라며 나의 연락처와 이메일을 물어온다. 한국 가면 싸이 일촌 맺자는 말과 함께 사진은 서로 메일로 보내주겠다는 확답을 하고 헤어졌다.
태국여행의 마지막 날 밝았다.
비행기가 늦은 밤 출발이라 오늘 하루도 알차게 보내고 갈 수 있다. 일단 게스트하우스 체크아웃을 하고 여행 짐은 카운터에 맡겼다. 마지막 날은 릴렉스 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유명하다는 마사지 샵을 찾았다. 중국에서 발마사지나 아로마 전신 마사지 등을 많이 받아본 터라 말로만 듣던 타이마사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인터넷 블로그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샵을 찾았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잔잔히 울려 퍼지는 클래식 음악이 마사지를 받으면서 잠들기 딱 좋은 분위기다. 카운터 직원의 메뉴 안내가 이어지고 난 보지도 않고 그냥 1시간반짜리 타이마사지를 선택했고 직원은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커다란 다다미 방에는 몇 개의 매트리스가 놓여있고 아무도 없다. 직원은 갈아입을 옷을 주면서 마사지사가 올 때까지 아무 매트리스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옷을 갈아입고 눈을 감고 잔잔한 음악에 마음의 평온을 찾아갈 즈음 미닫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헉!'
"사와디 캅"(안녕하세요)
왠 스모 선수가 경기장으로 입장하는 줄 알았다. 거대하고 육중한 몸매의 태국 아주머니가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하고는 나에게 다가온다. 예쁜 여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적잖은 실망이 밀려온다. 그리고 느닷없는 그레꼬로망형 레슬링이 시작되었다.
"윽! 악! 아~야! 으아악! 욱! 헉!"
그녀는 나의 사지를 잡고 비틀고 당기고 꼬고를 반복한다. 난 고통으로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신음을 내뱉으며 잠은 커녕 모든 신경들이 초긴장 상태로 돌입하는 경험을 해야 했다. 1시간 반 가량의 타이마사지가 끝나고 그녀는 다시 또 두 손 모아 '컵쿤 캅'을 내뱉으며 조용히 경기장을 퇴장한다.
“휴~ 내가 도대체 여길 왜 온 거지?”
난 온몸의 뼈가 부서진 연체동물처럼 매트리스 위에 널브러진 채 한 동안 움직일 수가 없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내가 왜 돈을 주고 레슬링 연습 상대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사전에 좀 제대로 알아보고 올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널브러진 팔다리를 조금씩 움직여 본다. 끊어졌던 신경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오는 듯 하다. 몸을 추스려 방을 나온다. 계산대에서 돈을 지불하는데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여태껏 먹어보지 못한 게맛이다. 카레인지 뭔지 모를 소스가 깊이 베어든 게살 맛은 입에서 살살 녹는 기분이다. 혼자 셀카를 찍으며 순간을 간직하려는 모습을 앞에선 웨이터가 웃으며 바라본다. 난 그에게 눈짓을 보내며 카메라를 그에게 들어 보인다. 그는 흔쾌히 다가와 혼밥하는 나의 사진을 멋있게 찍어주었다.
해가 지고 다시 또 어둠이 찾아든다. 태국의 밤 문화를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 궁금증을 해결하는 방법은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다. 어둠을 집어삼킨 유흥가는 몇 개 되지 않는 천조각으로 중요 부위만 가린 엣된 여성들이 수많은 다국적의 남성들과 뒤섞여 어지럽다.
길가에 나와 호객행위를 하는 여성들은 나를 보고는 윙크와 함께 일본말로 인사를 건네고는 반응이 없자 중국말 그리고 한국말을 연이어 날려본다. 내가 일본 사람을 닮아서일까 아니면 일본 사람이 가장 많이 찾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주변에 일본어로 얘기를 나누는 남자들이 꽤 많이 눈에 띈다.
유흥가 골목을 다 지나왔다.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스트립 바 안에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을 가라앉힐 수 없다. 여행책자에서 구경만 하고 다른 유혹에 넘어가서 사기나 곤경에 처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주의 문구를 봤던 기억이 난다. 발길을 돌려 다시 유흥가로 골목으로 들어간다. 화려한 조명의 바 입구의 구슬로 엮어진 커튼 사이로 반짝이는 은색 봉에 의지한 채 춤을 추는 스트립 걸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Can I come in?"(들어가도 돼요?)
"Yes, sure!"(예 물론)
"Have a seat here"(여기 앉으세요)
"Ok"
"What would you like to drink?"(뭐 마실래요?)
"One Tiger beer, please"(타이거 맥주 하나요)
"Anything else?"(뭐 다른건?)
"No thank you"(아뇨 괜찮아요)
난 여행책자에서 하라는 데로 맥주만 한잔 마시고 나갈 요량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옆에는 환갑은 훌쩍 넘어 보이는 백인 남성이 손녀 뻘의 여성을 자신의 두툼한 허벅지 위에 얹혀 놓고는 한 손으론 알 수 없는 술을 한 손으론 여성의 가냘픈 허리를 감아쥐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성이 그 백인 옆에서 자신의 몸을 밀착하며 백인 남성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듯 보인다.
맥주는 금방 나왔고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키려는 찰나 스테이지 위의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 여성은 나의 눈길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더 강렬하게 주시하며 스테이지를 천천히 내려온다. 그녀는 자세를 낮추더니 고양이처럼 바닥을 기어서 나의 테이블 밑으로 기어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함에 맥주를 든 채 멈칫한다.
"Did you come alone?" (혼자 왔어요?)
"Yes!"
"Can I drink some?" (나도 한잔 마셔도 될까요?)
"Of course, But hope you drink by yourself"(물론, 그런데 그쪽 혼자 마셨으면 하는데요)
그녀는 자신이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스테이지로 복귀한다. 그리고 또 다른 여성이 그 기회를 놓칠세라 좀 전 그녀보다 좀 더 빠른 속도로 기어 온다. 왜 다들 기어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고양이 자세가 남성들의 성욕을 자극한다고 믿는 듯 보인다.
그녀는 좀 전 여성의 공략법이 안 먹힌 걸 알고는 다른 전략을 펼친다. 그녀는 말없이 내 옆에 찰싹 들어붙어 앉는다. 그녀의 나의 성욕을 돋우려는 듯 가슴과 허벅지를 나의 몸에 밀착한다. 옆으로 힐끔 쳐다본 그녀의 입술은 나의 코 앞으로 와 있다. 순간 당황한 나는 얼굴을 뒤로 옆으로 젖히고 몸을 빼내려 했지만 그녀는 팔이 이미 나의 허리를 감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귀에 입김 섞인 말을 건넨다.
"Do you wanna go upstair with me?"(같이 윗층으로 갈래요?)
"You can go upstair by yourself!"(당신은 윗층으로 갈 수 있어요 혼자서)
그 여성도 나의 철벽 방어 태세에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팬티를 먹어버린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다시 스테이지로 올라간다.
성을 사고파는 비즈니스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하나님이 주신 남성의 강력한 성욕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은 남자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준다. 만약 성욕이 없다면 남성은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지 않아도 될 것이다. 때론 성욕이 인간을 옥죄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성욕에서 벗어나면 한결 편안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결혼하지 않은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홀로)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고린도전서 7:8 -
예수의 제자 중 그를 따라서 독신의 삶을 살아온 사도(使徒) 바울은 성욕을 통제할 수 있다면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만약 스스로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을 하는 것이 낫다) 그건 그가 아마 성욕으로 인해 생겨나는 많은 문제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삶을 원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성욕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풀리지 않는 의문을 안고 태국 여행의 마지막 밤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