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75 (개정판)
"도슨~ I'm not drunken~"(나 취하지 않았어요)
"아닌 거 같은데요. 많이 취한 거 같은데요"
“자! 봐요! 똑바로 걷잖아요”
“쿵!”
“괜찮아요?”
“아얏…아아…”
그녀는 일렬로 놓인 색깔과 모양이 다른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도 블럭 위를 두 팔을 벌리고 비틀비틀 걸어가다 그만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넘어진다. 나는 뛰어가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킨다. 그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나에게 의지해 찻길 옆 보도블럭 위를 걷고 있다.
2차로 간 노래방에서 친구들이 노래에 빠져 있는 사이 몰래 자리를 빠져나왔다. 간다는 말을 하면 놓아주지 않을게 뻔하다는 걸 아는 나는 그녀가 화장실에 가는 틈을 타 그녀를 따라 나와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친구들에게 카톡 단톡방에 먼저 들어간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친구들은 내가 간 줄도 모르고 끝나가는 한 해의 아쉬운 시간들을 부여잡으려는 듯 술과 노래로 밤을 지새울 모양이다.
"도슨~ 한잔만 더 하고 가요"
"안돼요~ 너무 많이 마셨어요!"
"딱 한잔만! 우쭈쭈쭈~ 누나 말 들어야지~"
술이 취하면 마치 나를 어린 아이 다루듯 하는 그녀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뿌리치더니 길가에 늘어선 포장마차 중 한 곳으로 들어가며 나에게 손짓한다. 남자에게 있어 술과 여자는 평생을 붙어 다니는 존재인 것 같다. 그리고 술과 여자는 보통 같이 찾아온다는 특징이 있다. 술은 이성(異性)에 대한 경계심 낮춰주고 동시에 성적 욕구를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다. 인간은 이성(理性)에 사로잡혀 일상을 살아가지만 술은 이성을 놓게 해준다.
“언니! 여기 곰장어 한 접시랑 소주 좀 부탁해요, 뜨끈한 오뎅국물도 좀 주시구요”
그녀는 소주병과 잔을 받자마자 소주잔을 채워 나에게 건넨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도 채우고 술잔을 부딪치며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캬!~”
“도슨 왜 안 마셔요?”
나는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한 숨을 내쉬며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아이구 착하네”
술이 없었다면 세상에 연인관계로 맺어진 남녀의 숫자도 많이 줄었을 것이다. 연말 시내 거리는 그런 취기 오른 남녀들이 뒤섞여 이성(理性)을 내려놓고 이성(異性)을 찾는다. 가로등 불빛에 몰려든 불나방들처럼 내일이면 죽어 없어질 것 마냥 오늘 밤을 불태운다.
"도슨~!"
"예?~"
"도슨~도슨~"
"왜 자꾸 불러요?"
"Why did you do that?"(왜 그랬어요?)
"뭘요?"
그녀는 술기운에 목을 가누기 힘든지 한 손위에 턱을 괴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녀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은 가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여자의 초동 수사에 걸려들어서 좋을 게 없다.
"아까 친구들이 물어볼 때 왜 화장실로 도망가요?"
"도망간 거 아닌데요, 진짜 볼일이 급해서 간 거뿐이에요"
"Liar!”(거짓말쟁이)
“아… 아녜요 진짜예요”
“Ok~ 뭐 So now Can you tell me?"(오케이 그래 이제 얘기해줄래요?)
"뭘 말해달라는 거예요?"
"오~ You're so mean!"(정말 너무하네!)
그녀는 괴었던 팔을 탁자에 내리고는 소주잔을 낚아채더니 한 번에 들이켜 버린다. 그녀는 우리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싶은 모양이다. 명확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 명확하게 물어보지 않는다.
여자의 마음을 잘 캐취하는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얻는 것은 당연지사, 문제는 그걸 잘 캐취 못하는데 관심이 쏠리는 남자를 만났을 때 여자는 답답해한다. 가르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안 가르치자니 자신이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여자가 먼저 사귀자 혹은 결혼하자는 얘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나중에 "네가 사귀자고 했잖아", "네가 결혼하자고 했잖아"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여자는 그 말을 듣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것이다. 자신이 써먹어야 할 최후의 필살기를 남자에게 뺏긴 기분이랄까? 그것마저 가지지 못한다면 여자로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상황과 분위기를 조성하고 무언의 지령을 지속적으로 남자에게 주입해 원하는 답을 얻어내려 한다.
남자가 전투에서 살아서 돌아가기 위한 보급로와 퇴로를 확보하고 전진하는 것과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인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할 싸움에 도망갈 구멍이 있다는 것은 안 이상 죽음을 무릅쓰지 않는 법이다. 사랑도 그와 같지 않을까? 남녀 모두 빠져나갈 궁리부터 한다.
‘사랑에서 유일한 승리는 도망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남긴 말이 다시 떠오른다. 그는 일찍이 전쟁에 통달한 것 뿐만 아니라 남녀간의 애정관계에서도 통달한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 그녀와 나 사이 펼쳐지는 과정이 썸 혹은 연애의 마지막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 남자가 무언의 지령에 응답하면 연인 혹은 부부로서의 관계로 발전한다. 물론 부부는 연인보다 좀 더 복잡하고 디테일한 심화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결혼은 더욱 어렵다. 이런 상황은 여자가 남자보다 조급하거나 더 좋아하는 감정이 클 때 발생하며 남자가 주도권을 가져간다.
하지만 그 주도권도 여자의 인내가 바닥나면 사라진다. 그땐 다신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남녀의 밀고 당기는 호흡이 중요하다. 끊길 듯 하다 당겨지는 그 묘미는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도슨은 여자한테 관심 없어요? 아님 관심 없는 척하는 거예요?"
"하하하 글쎄요~ 느닷없이 예리한 질문이네요"
"Now I'm serious" (지금 나 진지해요)
"솔직히 관심 있다가도 없다가도 해요"
"그게 뭐예요! Are you kidding me now?" (지금 장난쳐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 Jesus!"(오 맙소사)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또 다시 잔을 비운다. 나도 얼떨결에 같이 소주잔을 들이켠다.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른 채 죄인이 된 기분이다.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아무런 잘못한 게 없는데 느끼는 죄책감은 남녀 사이에서만 느끼는 특이한 현상이다. 남녀 사이에 성립되는 문서화되지 않은 질서나 계약은 법 혹은 도덕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로 접근할 수 없다.
남녀가 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아마 논리로만 돌아가는 딱딱한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아신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고 나중에 그의 갈비뼈를 떼어내어 하와를 만들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남녀는 논리(이성)와 비논리(감성)로 대립하며 삶의 동반자이자 애증관계로서 수 없는 세월을 함께 해왔다.
"미안해요~ 정말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성적 호기심인 건지 아님 좋아하는 감정인 건지"
"It’s not the same?"(그건 같은 감정 아니에요?)
"??"
"Why do you think both are separated?"(왜 두 가지가 분리되었다고 생각하죠?)
"지금은 성적 호기심이 큰 거 같아서요"
"성적 호기심이 좋아하는 감정을 불러올 수도 있고 좋아하는 감정이 성적 호기심을 불러올 수도 있는 거죠, 뭐가 먼저인지가 뭐가 중요해요 둘 다 중요해요"
"처음이네요 이런 말을 들어보는 건…"
그녀는 여태껏 만나왔던 여자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졌다. 성적 호기심으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오랜 유교 전통 사상에 빗대어 볼 때 나를 아주 저급한 인간으로 낙인 찍히게 한다는 죄책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들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긴 했지만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취하진 않았다. 이야기가 심각해질수록 더욱 또렷하고 차분한 어조로 얘기한다. 해외에서의 오랜 생활이 그녀의 유교적 가치관을 바꾼 것일까? 30년을 한국에서만 살아온 나로선 납득하기 쉽지 않은 말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공감이 간다.
사실 간단히 생각하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물음이다. 뭐가 먼저냐는 중요치 않다. 닭과 알이 둘 다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다. 몸만 탐한다거나 마음만 있다거나 한 것이 나쁜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마음만 있는 것은 애절하게 묘사하면서 육체만 탐하는 것은 아주 더럽게 묘사한다. 사실 매한가지다.
"술 깨게 좀 걸을래요?"
포장마차를 나와 거리를 걷는다. 한 겨울의 찬바람에 얼굴이 얼얼하다. 술 깨려다 얼굴이 깨어질 것 같다. 몸이 무겁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 몸무게의 1/3을 맡기고 있다. 그렇게 말없이 붙어서 계속 걷고 있다. 번화한 시내 중심가을 벗어날 때쯤이었다.
"제시카~ 춥지 않아요?"
"Yes I’m so cold!(예 너무 추워요)~ 이리 와봐요 잠깐"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나의 손을 잡아 끈다. 불이 꺼진 조용한 건물의 비상구 계단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나를 벽에 밀어붙이고는 입술을 비비기 시작한다. 술 냄새와 뭔지 알 수 없는 음식물 냄새가 섞여 콧속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반응 없는 나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과 혀로 열어보려 하지만 반응이 없자 한마디 한다.
"아까 말하던 성적 호기심은 어디 갔어요?"
내가 내뱉은 말을 책임져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그녀는 명분을 찾았고 난 그 명분에 따라야 한다. 서로는 누가 누구 것인지 모르게 서로의 아밀라아제가 듬뿍 묻은 연체 근육을 뒤섞는다. 서로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나의 손이 그녀의 재킷 속의 티셔츠 안으로 파고 들어가려 할 때였다.
"거기 누구요!"
계단 위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손전등을 우리를 향해 비추며 소리친다. 순간 당황한 그녀와 나는 애로영화 촬영을 중단하고 급히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그녀가 그만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뎠다. 그녀는 그대로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우당탕탕”
"헉! 괜찮아요?"
"아야~ 도슨! 팔을 못 움직이겠어요"
그날 밤 그녀와 나는 술냄새를 풍기며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그녀는 팔에 금이 가는 큰 부상을 입었고 깁스를 해야 했다. 그렇게 연말의 어느 날 새벽 술이 덜깬 표정으로 병원에 앉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숨어서 하는 애정행각은 스릴 있지만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