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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r 07. 2024

아이 같은 남자

발리에서 생긴 일 ep 2

“霈云, 人太多了吧” (페이윈, 사람들 진짜 많다. 그치?)

“对呀,巴厘岛很受欢迎的吧” (그러게 발리가 인기가 좋긴 좋나 보네)


공항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뒤섞여 한 곳을 향해 바삐 움직인다. 입국 절차가 복잡하다. 도착 비자를 사고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섰다.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런데 줄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발꿈치를 들어 심사대 쪽을 바라봤다. 심사관이 자신의 짐을 챙겨 심사대를 떠나고 있다. 퇴근 교대 시간인가 보다. 그렇게 교대자가 오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먼저 비운다. 어이가 없다. 늘어선 줄 위에 선 사람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물론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욕설이 섞인 불평불만이 대부분일 것이다. 잠시 뒤에 교대자가 나타났다. 다시 줄이 조금씩 줄어든다.


그런데 우리 앞에 서 있는 아니 앉아 있는 이 남자는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검은 백팩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시차 적응 중인가? 다행히 우리는 발리와 시차가 없다. 보통 해외 여행은 시공간이 모두 변하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공간만 바뀌었다.


“Excuse me~”


대답 없이 꾸벅꾸벅 고개만 끄덕인다. 입가엔 맑고 끈적한 액체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검지 손가락으로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쿵, 아얏!”

“Oh~ I’m sorry”


그는 온몸에 힘을 뺀 채 백팩 위에 앉아 평형을 유지하며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의 검지 손가락의 작은 힘에 그 균형이 깨져버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몸이 그대로 기울어지며 땅바닥으로 꼬꾸라졌다. 그는 몸이 땅바닥에 부딪치고 나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앗! 죄송… 아니 I’m sorry”


그는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를 쳐다본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듣고 그가 외국인임 알아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한국인임을 눈치챘다. 한국어는 일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한국어를 구분할 줄은 안다. 나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앞에 뚝 끊겨버린 대기 줄을 가리켰다. 그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 백팩을 들고 서둘러 앞으로 걸어간다.


남자는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다시 백팩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앉는다. 다시 꿈속으로 갈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백팩 속에 손을 집어 넣더니 무언가를 뒤적인다.


“Hey~ Baby! This is for you!” (헤이~ 아기야~ 자! 니 거야)


남자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초콜릿이었다. 그는 자신의 앞 줄에 엄마 손을 잡고 서 있는 꼬마 아이에게 초콜릿을 건넸다. 금발의 백인 아이가 파란 구슬같은 눈망울로 그와 초콜릿을 번갈아 쳐다본다.


“Sweety~ Say thank you” (스위리~ 감사하다고 말해야지)

“thank you”


엄마가 아이에게 예의를 가르친다. 아이는 엄마의 말을 따라 하며 그 남자가 건넨 초콜릿을 받아 든다. 남자는 가방에서 또 다른 초콜릿을 꺼내 입으로 포장을 뜯더니 한 입 깨물어 먹는다. 그 모습을 아이는 가만히 쳐다보다 자신도 입으로 포장지를 뜯으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아이의 초콜릿 받아 들고 포장을 뜯어 준다. 남자와 아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초콜릿을 맛있게 나눠먹는다. 나는 그 모습이 흥미로워 나도 몰래 사진에 담았다.


“Can I see the photo?”  (그 사진 좀 볼 수 있을까요?)

“什么?哦~ What did you say?”  (뭐라고요? 아! 뭐라고 하셨죠?)


눈이 뒤에 달린 것인가? 그가 갑자기 나를 보더니 말했다. 어떻게 내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일까? 나는 나의 핸드폰 화면을 그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몰래 누군가를 찍은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그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


“Oh~ nice shot, Could you send me the photo?” (오~ 멋있는데요, 저한테 좀 보내주실래요?

“…. Yes.”


그리고 그는 핸드폰의 전광판 어플에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크게 써서 나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Please send me right away” (지금 바로 보내주세요)

“now?”

“Yes Please”


보내준다고 했는데 사람을 잘 못 믿는 사람인가 보다. 계속 나만 쳐다보고 서있다. 아마도 내가 사진을 보내주기 전까지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모양이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사진을 전송해야 한다. 공항 와이 파이에 접속해서 그의 이메일로 사진을 전송했다. 그는 이미 공항 와이파이에 접속했던 모양이다. 사진이 도착한 걸 확인하고는 그제야 등을 돌린다.


“这男生真够奇怪呀 “ (이 남자 진짜 이상하다)

“小声点,他会听到” (조용히 얘기해, 다 듣겠다)

“不会的, 他不是个韩国人嘛” (괜찮아, 한국사람이잖아)


웬웬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다. 다행히 그녀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음에도 그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다.


다음번으로 온 이미그레이션 담당자는 업무 처리 속도가 빠르다. 줄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같은 일도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다. 물론 속도가 빠르다고 일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빠르면 여러 사람이 편해진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빠르게 줄어드는 우리 줄을 바라보는 정체된 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 남자의 순서다. 그 남자를 바라보는 이미그레이션 직원의 표정이 밝다. 직원은 여권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뭐라고 한마디 말한다. 그런데 얼핏 들려오는 소리가 한국말 같다. 한류 바람이 이곳에도 부는 모양이다. 그 남자는 빠르게 게이트를 통과했다. 우리 차례다.


“How many days you gonna stay in Bali?”(발리에 얼마나 머무를 예정입니까?)

“Well..  7 days” (음… 7일이요)

“Any plan to go any other island in Indonesia?” (인도네시아의 다른 섬으로 갈 계획이 있나요?)

“No” (아니요)


이미그레이션 직원이 나에겐 질문이 많다. 앞에 남자에겐 환한 미소로 대하더니 나에겐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물어온다. 나와 웬웬은 입국 심사와 짐을 찾는데만 1시간 반이나 걸렸다. 피로가 몰려든다. 빨리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길에 또 그 남자를 발견했다. 그와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这什么意思?笑什么呀’  (뭐지? 왜 웃는 거지?)


 나는 당황스러워 잽싸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남자는 입국장 앞에 늘어선 이동통신 회사 부스에서 발리에서 쓸 심카드를 구매하는 모양이었다.


“雯雯, 我们不买sim卡吗?”(웬웬, 우리는 심카드 안 사?)

“不用了,我都准备好了. 我们就赶快出去吧,外边导游都有准备了 “ (필요 없어, 내가 다 준비해 놨지, 우린 그냥 빨리 나가기만 하면 돼, 밖에 가이드가 모든 걸 준비해 놨으니까)


웬웬은 서둘러 공항 밖으로 나가자며 나를 잡아 끈다. 멀어져 가는 부스를 나도 모르게 다시 뒤돌아 봤다. 그때 또 다시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나를 보며 웃고 있다.


’ 这小伙子疯了?‘ (뭐지? 미친놈인가?)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도 내가 왜 뒤돌아 봤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무의식의 행동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그걸 물어봤자 답이 없는 질문이기에 묻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hi~ I’m Karek, nice to meet you, I’m in charge of Bali trip for you guys. Please follow me”

(나는 카렉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발리 여행을 책임지게 되었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를 따라오세요)


입국 장 밖에서 현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웬웬의 이름이 적힌 픽켓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안내해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발리의 후덥 지끈한 공기가 나의 몸을 감쌌다. 잠시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땀샘에서 새어 나온 나트륨 이온수가 옷감으로 스며들며 살에 찰싹 들러붙는다. 도착한 곳엔 반짝거리는 검은색 도요타 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呼呜, 多么凉快啊” (후아, 너무 시원하다)


차 안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너무 반갑다. 다시 쾌적함이 찾아든다. 차는 천천히 공항을 빠져나간다. 그때 공항 앞에서 현지인처럼 보이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그 남자를 또다시 목격했다.


"哎,你看你看。 是他呀。 他在干什么呢?"(야야~ 저기 봐, 그 남자야 뭐 하는 거지?)


웬웬도 그를 보고는 놀라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한다. 그는 현지인과 무언가를 흥정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렇게 그를 지나쳤다. 호텔로 가는 길은 또 기다림의 연속이다. 길게 늘어선 차량의 행렬 사이로 오토바이들까지 뒤섞여 아수라장 같다 보인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이라곤 늘어선 줄 속에서의 정체 밖에 없다.


차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왕셩디의 [lotus of heart]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웬웬이 나를 배려해서 틀어준 음악이다. 소음이 차단된 쾌적한 차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 밖은 혼돈의 세계와 같다. 그 혼돈의 세계를 잠시 느껴보려 창문을 내렸을 때였다.


“부르릉~”

“嗬!” (헉)


내 시선 앞에 또 그 남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임을 직감했다. 그는 내가 타고 있던 차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霈云! 你看! 又是他呀。是对吧?”(페이윈! 저거 봐! 또 그 남자야, 맞지?)


웬웬도 우리 차 앞을 지나가는 그를 본 모양이다. 그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있었다. 그가 타고 있는 오토바이는 정체된 차량 행렬들 사이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아가더니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연치고는 너무 많이 마주친다. 계획에 없는 우연이 계속되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환상이 생겨난다. 나는 이런 환상을 상상한다. 그럼 그 상상이 이야기가 되곤 한다. 시작은 미약한 현실의 우연이었지만 나중은 끝도 없이 광활하게 뻗어가는 우주의 운명이 된다.  


“这里摩托车比汽车还快啊” (여기는 오토바이가 차보다 빠르네)

“Yes, that's why most of people use the motorbike here" (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이용하죠)


웬웬이 나에게 건넨 말에 카렉이 대답이 돌아왔다. 카렉은 발리에서 관광가이드를 오래 하면서 간단한 중국어는 알아들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여기는 자동차가 제 성능을 발휘하며 달릴 수 있는 도로가 거의 없다. 왕복 2차선의 도로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차보다 오토바이가 더 빠르다. 10km가 되지 않는 거리를 30분이나 걸려서 호텔에 도착했다. 5성급 호텔 안은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쾌적함과 안락함을 선사한다. 돈은 현실세계의 시끄러운 것들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준다. 하지만 나는 작가다. 작가가 현실을 무시하면 글은 몽상일 뿐이다. 판타지도 현실에 근거한다. 현실감이 없는 글은 아무리 판타지라도 공감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그것들과 완전히 떨어져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현실 세계 머물 수 없고 또한 머물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나는 판타지를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판타지는 현실을 무시해도 용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판타지의 세계는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지만 이건 다른 말로 현실을 잘 몰라도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다. 여기서 현실은 일상의 디테일과 행동요령 같은 것이다.  디테일한 정보는 이제 어디서든 접속하고 찾아낼 수 있다.


그런 디테일한 현실정보와는 동떨어지되 현실의 사람과는 동떨어지면 절대 안 된다. 이건 비현실 속에서도 사람의 본성과 감성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배경과 설정은 비현실적이어도 인물이 너무 비현실적이면 공감하기 힘들다. 그럼 독자나 시청자가 그 인물에 감정을 이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가 사는 현실 세계를 떠나 또 다른 현실 세계로 옮겨와 있다. 이건 내가 판타지 세계에 머무는 것과 비슷하지만 이건 돈이 필요하다. 현실은 언제나 돈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돈이 궁하면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나는 사실 그런 현실 도피자들의 공감을 먹고 산다. 그럼 나의 현실은 궁핍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비현실의 판타지 속에 머물러야 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 판타지 드라마 작가의 숙명이다. 하지만 여기 발리에서는 나의 현실과 비현실 모두에서 벗어나고 싶다.


" 雯雯, 你准备得太周到了吧 “ (웬웬, 너 너무 철저하게 준비한 거 아냐?)

“呼呼,还早着呢,等着瞧吧。我为你拼命服务。(후후 아직 일러, 기다려봐. 내가 목숨을 다해 봉사할게 너를 위해~)

“哈哈哈, 你少来呀 “ (하하하, 적당히 좀 하시지)


웬웬의 준비는 항상 철저하다. 이 애는 극단적 J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웬웬에게 현실의 많은 것들을 의지하는 편이다. 그와 있으면 몸이 편해진다. 마음이 힘들고 불편하면 몸이라도 편해야 한다. 그에게서 나의 마음까지 편하게 해 주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일 것이다. 나는 호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霈云! 快洗一洗,let’s 开 party~” (페이윈! 빨리 씻어, 파티를 시작해야지~)


웬웬이 파자마 파티를 준비했다. 가방에서 촌스럽지만 귀여운 빨강과 파랑의 색대비가 뚜렷한 두 개의 파자마를 하얀 침대 위에 던져 놓는다. 이리 예약해 놓은 룸 서비스를 부른다. 그런데 나는 별 의욕이 없다.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드려다 본다. 오늘 이곳까지 오면서 찍었던 사진을 드려다 본다. 그리고 그 남자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초콜릿을 들고 아이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가 더 아이 같아 보인다. 평범하지 않은 그의 모습이 작가의 상상을 자극한다. 상상에서 좀 떠나 있고 싶은데… 또 상상을 한다.


그가 자꾸 눈에 밟힌다. 그리고 스르륵 눈이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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