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문득 떠오른 또 다른 사랑의 정의에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했다. 독서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과 ‘사랑’에 관한 열띤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독서 토론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읽기]
“결혼이란 파랑이 나와 빨강이 네가 만나서 보라색이 되는 것이다”
- 션 -
내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토론 발제문에 올린 이 문구에서 시작된 논제는 사랑과 결혼이라는 서로 끊어낼 수 없는 두 가지의 문제를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사랑은 과연 서로가 있는 그대로 자신의 색깔을 지닌 채 함께 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가 다른 색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것인가. 그리고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도 온전히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빨강과 파랑 (태극)
토론 참석자들은 모두가 진지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얘기했다. 남 얘기를 하지 않고 자신을 얘기하는 시간이었다. 놀라웠다. 마치 모두가 모여 간증을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마음속에 품고 있던 꺼내기 힘든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수십 번도 더 고민해 본 그 문제를 테이블로 끄집어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것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 내가 적잖은 시간 써온 소설과 에세이 속에는 이런 나의 고민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랑이 식어감은 어쩌면 온전한 나를 잃어버리기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다. 그래서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이 관계로부터 발생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관계가 필요하지만 또 두려운 이유이다. 혼자 있을 때처럼 함께 있을 때도 그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이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중략)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 [고린도전서]] 13:4~8 -
나는 성경의 이 구절을 접한 이후 사랑은 결혼과 동일 선상에 두고 이해했다. 경전 속 사랑은 결혼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앞에서 말한 ‘션’의 말처럼 결혼은 현재의 나를 변화시켜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라 받아들였다. 그래서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결혼은 너무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한국 사회는 아직도 사랑과 결혼을 연결시키고 이것이 분리되는 것을 표면적으로 부적절하게 생각하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오랜 시간 사람들을 지배해 온 전통적 인식과 문화가 사랑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사람들은 ‘사랑’은 반드시 결혼이라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결혼식, 혼인신고서, 결혼반지등)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랑과 결혼 사이
사랑은 과정이다.
적잖은 시간 혼자 책을 읽고 사색하며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랑=결혼 이어야 하는가? 그럼 이혼하는 자들은 왜 그런 것 인가? 사랑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말한다. ‘사랑이 아니었다’ 아니면 ‘잘못 알았다’, ‘속았다’ 하지만 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당신은 분명 사랑을 느꼈다. 지금의 결과로 과거를 부인하고 있는 것뿐이다. 사랑은 언제나 현재이다. 그때의 현재가 사랑의 느낌과 믿음을 주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당시 나의 뇌가 느끼고 판단한 사랑이라는 느낌과 확신 때문에 결혼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나? 물론 걔 중에는 사랑 없이 현실적인 조건들에 부합해서 결혼을 선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분은 이런 논제에서 해당사항이 없다. 그건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상대를 현실적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까지 사랑의 개념으로 넣는다면 사랑의 본질은 물질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사랑이 삶 속으로 들어가려면...
삶은 현실이다. 결혼도 현실이다. 프롬은 물질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란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결혼과 삶은 언제나 이 물질과 자본과 대외적인 것들에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삶(결혼)이 사랑을 죽여가는 과정이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사랑을 훈련의 과정처럼 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가 (전통)국가 체제 유지, 즉 국가의 기본 단위인 가정을 유지하는데 더 유리한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기독교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사회는 이제 1인 가구가 절반을 넘어 개인주의 사회로 변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가치관을 계속 사수하려는데서 오는 괴리 때문일 것이다.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 다소 불편하고 어색함을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점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중년의 미혼자가 머물기에 그 분위기가 그리 호의적이거나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주의 시대를 사는 남녀들에게 환영받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가 변해도 사회를 이끌어가는 자들과 제도의 변화는 항상 더디다. 국가는 이제 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은 사회의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 현재의 체제가 현재의 사회와 부합하지 않기에 한국은 사회와 인간이 함께 어우러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매하신 정치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대다수의 국민의 인식과 관념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아이 낳을 거 아니면 결혼하지 말래요”
한국에 와서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은 이야기다. 이 말의 본질은 무엇인가? 결혼은 아이의 미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결혼 없는 아이의 존재를 국가와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의 탄생을 왜 국가와 사회가 정의하고 인정하는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는다. 인간의 생명은 국가와 사회가 생겨나기 이전 50만 년 전에 우선되었다. 국가와 사회는 항상 민주주의를 외치며 국민이 국가라 말하면서 왜 국민이 인간임을 부인하는가? 인권의 가장 기본은 생명의 인정과 존엄이다. 모든 사랑의 시작이 모성애에서 비롯되듯이 생명의 탄생이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결혼이란 제도에 편입되어야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제도는 통제와 관리를 위한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국가는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통제하고 관리해야만 존속할 수 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국가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개편해 나간다. 그럼에도 인식에 변화에 따른 제도의 변화가 너무 더디다. 그래서 정치는 언제나 서민과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 정치인을 싫어할 수밖에 없지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순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누가 주인인가?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것은 사랑(가치)과 결혼(제도)의 원활한 상생일 것이다. 그럼 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잘 이해하고 공부한 자들이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문가(한 분야)들이 정치인이 될 것이 아니라 인문학과 철학을 두루 넓게 이해하는 자가 정치를 해야 한다.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은 참모진과 실무진들이 해야 할 일이다. 방향과 기준을 세우는 중요한 판단을 공부만 한 전문가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사랑이 우선이다.
사회 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따뜻하게 변해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이 사라지면 언제나 미움과 혐오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되어있다. 인간은 진공(무관심)의 상태를 견딜 수 없다. 지금 사회의 구조는 사랑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
사랑하다 보면 살고 싶어지고 살다 보면 생명이 생기는 것이다. 생명을 만들었기 때문에 살아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제도는 후자에 맞춰져 있다. 제도는 마치 순서를 뒤바꿔 놓은 것 같지 않은가?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국민을 노동자와 세납자가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인간적인 제도를 강구해서 국민을 유인하고 독려해야 마땅한 것이다. 당장 눈과 귀를 현혹하는 정책으로 꼬시려 들면 안 된다. 이제 국민은 많이 똑똑해졌다. 그런 눈속임과 책략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해가 바뀌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들쑥날쑥하는 그들의 달콤한 혀놀림에 너무 오랜 시간 놀아났다.
개와 고양이
개와 고양이
정치인들은 국민을 개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여전히 먹잇감으로 잘 꼬드겨서 훈련시켜서 끌고 가야 할 존재처럼 생각한다. 이제 고양이로 변한 국민들이 많다. 고양이는 개처럼 다룰 수 없다. 어린 시절 나는 개를 아주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이젠 개보다 고양이가 좀 더 좋다. 그리고 오랜 시간 정말 개처럼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항상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성취와 목표)을 얻기 위해 주인(기업과 국가)이 원하는 데로 나를 훈련시키고 나를 그에 부합하는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왔다. 한국의 경제가 아직도 대기업 위주의 제조업이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경제는 그만큼 더 위험할 수밖에 없다. 이건 개인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오랜 시간 짓밟아온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대기업도 결국 한 개인의 특출 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대기업 하면 떠오르는 개인(인물)이 있지 않은가? 다양한 개인의 생각들이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는 사회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난 혼자 있는 것도 좋고 함께 하는 것도 좋다. 이제 혼자 있을 때 좋을 수 있는 법을 깨달았다. 그리고 함께 있을 때도 혼자일 때처럼 좋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사랑은 내가 변해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사랑은 서로가 상대의 그 모습 그대로의 색깔을 인정하고 받아주면서 함께 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의 삶, 즉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이 나의 색깔을 버리고 다른 색으로 변하기를 원하는 과정이라면 고통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현대 남녀의 사랑(연애)과 결혼이 분리된 것이 아니던가?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조금씩 희생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논리와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온전히 받아줘야 한다는 논리는 상충한다. 무엇이 옳고 틀리다 단정 지을 수 없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다만 현재 사람들의 인식은 후자로 더 많이 옮겨가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럼 이 사회를 지속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것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사회는 존속하기 힘든 상태로 갈 뿐이다. 그럼 국가와 국민이 분열된다. 뭐가 주인이고 우선인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국가가 먼저인가 국민이 먼저인가?
엄마와 아빠는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 아이도 따라서 행복해진다. 올바름은 객관적이고 행복은 주관적이다. 사랑과 가족은 객관적인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