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확장판] 황농문
“몰입은 엔트로피의 감소이며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살아있으면서 죽음과 가장 가까운 상태는 잠을 자고 있는 상태이다. 몰입은 의식적으로 잠을 자는 것이다.”
- 글짓는 목수 –
세상은 정돈에서 혼돈으로 나아가며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해간다. 이건 열역학 제2법칙이다.
이건비단 과학적 법칙일 뿐 아니라 불변하는 만물의 진리이다. 그리고 몰입은 이 진리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그래서 어렵다. 아무나 경험할 수 없고 또한 경험한다고 해도 지속하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훈련만이 당신을 깨달음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신은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이 진리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유일하다. 다만 거스르는 자들이 적을 뿐이다. 이건 혼돈 속의 수많은 유혹과 욕망이 끊임없이 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자극을 차단하고 감각의 세계를 떠나 잠을 자듯이 생각하는 자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우주의 법칙을 만든 신은 그것을 거스르는 자에게만 숨겨진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고 위의 한 문장으로 표현해 봤다. 이 한 문장이 이 책의 내용을 관통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책을 읽으면 항상 책 속에 감동적인 문장을 필사하며 글을 시작한다. 한참을 고민했다. 너무 많은 문장들이 후보 군에 올랐다. 이걸 고르면 저게 아쉽고 저걸 고르자니 이게 아쉽다. 이번엔 한 문장으로 이 책의 요약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고 싶었다. 책의 부분이 아닌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문장이다. 쓰고 보니 흐뭇하다.
2019년 전염병이 돌던 시기 나는 태어나서 가장 긴 몰입의 시간을 경험했다. 격리의 시간이 몰입의 시간이 될 거라 생각지 못했다. 호주에서 락다운이 시작되었고 집안에 하루종일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격리의 시간 많은 중독거리를 찾지 않았을까. 온라인에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볼거리와 오락거리들이 넘쳐난다. 그것들에 빠져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중독이다. 세상은 우리들을 자극과 중독으로 몰아넣고 머리에서 생각을 지워버린다. 대부분의 삶이 이런 욕구충족(소비, 향락, 중독)과 노동의 반복의 살도록 조장한다.
나도 이 긴 격리를 견디기 위해 컴퓨터에 온라인 게임을 인스톨했다. 하루 이틀 온라인 게임에 빠져서 시간을 보냈다. 뇌가 멍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느낌을 잘 안다. 과거 어린 시절 게임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때 깨달은 것은 게임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허무와 공허가 엄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게임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더 오랜 시간 머물려한다. 중독이다. 우리는 그것을 스트레스 해소의 수단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힘들게 일하고 잠시 나에게 할애하는 소중한 일탈의 오락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을 잘 컨트롤한다면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 그것도 소비와 중독을 유발하는 세계가 아닌 내가 만들고 창조하고 이끌어 가는 세계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바로 몰입의 시작이다. 몰입과 중독은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효과와 작용은 완전히 다르다.
“몰입은 즐거움과 특별한 감정을 동반하는 놀라운 경험이다”
- 황농문 [몰입] 중에서 –
나는 전염병이 돌기 전부터 몰입을 간헐적으로 경험했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과 일 속에서 그 몰입을 지속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몰입을 경험하기 힘든 이유이다. 코로나19가 나에게 몰입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줬던 시기가 아녔을까
컴퓨터의 게임을 삭제해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소설을 구상했다. 그렇게 새로운 소설이 시작되었다. 락다운 기간 새벽에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글만 썼던 날도 있었다. 그때를 확실히 기억한다. 목까지 받쳐주는 이케아의 편안한 흔들의자 위에 작은 침대용 탁자를 올리고 거기에 12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글만 썼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몰입에서 빠져나왔을 때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일어나기도 어려웠고 너무 허기가 져서 온몸에 힘이 없어 어지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때 전에 없는 환희의 감정과 놀라고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 비록 커튼이 쳐진 어둡고 작은 방안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환한 천국을 맛보았다. 그리고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가 쓰여 있었다. 나는 그 12시간 동안 몇 년의 시간 속 여행을 한 기분이랄까 내가 이야기를 쓰면서 그 안에서 놀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을 어떻게 지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읽은 황농문 교수의 [슬로싱킹](인생이라는 무대 위의 나 그리고 무의식 - 서평참조)을 읽고 난 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몰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 이후부턴 매일 이 몰입의 시간을 짧게라고 느끼기 위해 매일 새벽 독서와 글쓰기를 아직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것이 비록 나에게 금전적, 물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몰입이 가져다주는 환희와 긍정적인 마인드 때문이다. 이것이 삶을 우울과 불안 그리고 권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몰입의 순간 발견하는 예상치 못한 생각들과 이야기들이 매일 기대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건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몰입을 해야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매일이 기대되고 즐거울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다시 찾은 이유는 황농문교수가 이것을 책 속에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서 [몰입] 분야의 석학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해외에서는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는 한국인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그걸 잘 설명해주고 있다.
몰입(Flow)은 세상의 흐름(Flow)을 역행하는 것
우주는 팽창하고 끝없이 뻗어나간다. 집안이 계속 어질러지는 것도 이와 같다. 인간 세상이 갈수록 복잡하고 다양해져 변해가는 것도 이와 같다. 이 흐름은 세상의 흐름이다. 하지만 몰입은 그 반대로 역류해야만 가능하다. 이것은 그래서 부자연스러운 행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을 훈련하고 연습해서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현재 당신이 보여주고 있는 능력의 수십 배 아니 수백 배에 달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이 능력은 당신의 무의식(해마 속 장기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활성화시키는 과정이다. 물론 이것이 몰입을 통해 발현될 때 그 파장과 파급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평소의 지식 습득과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축적된 것에 비례해서 폭발하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농축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폭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농도가 짙을수록 그 폭발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이토록 미세한 원자가 이토록 무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점에서 미약한 인간과 미세한 원자는 비슷한 점을 지닌다.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접점이다. 이 힘은 다만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고 그 힘을 밖으로 끌어내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이 이 만물을 같은 이치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분명 인간에게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원자의 에너지는 물리적으로 끄집어내어야 하지만 인간의 에너지는 비물리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숙면일여(熟眠一如)의 몰입 상태에서 서너 시간 자고 일어나면 아이디어가 가장 많이 떠오르고…(중략) 따라서 잠든 상태에서 떠올린 아이디어를 붙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잠이 들고서 서너 시간 후에 일어나는 것이다”
- 황농문 [몰입] 중에서 -
잠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우리가 무의식의 세계를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의식의 세계에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상태에서는 감각기관과 신체기관(손발)을 의도적으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몰입은 이 무의식의 잠재능력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무의식의 세계는 무궁하다. 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이 의식 세계에서 발휘하고 있는 능력의 수십 배 혹은 수백 배에 달하는 지적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우리는 이 무의식의 창고와 연결되는 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과거 성인들과 위인들이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깨달음과 지적 도약(집필)을 이루었는지는 이와 관련이 깊다. 세상과 단절된 계기는 우연 혹은 원치 않는 상황이었을 수 있지만 그 상황이 몰입의 환경을 조성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전쟁포로가 되었을 때 당시 풀려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을 풀어주지 말아 달라고 할 정도였다. 아마 그는 그때 그 몰입의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몸의 다른 모든 감각들의 작동을 차단하고 해마 속의 장기 기억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각종 소음과 유혹을 차단해야 한다. 격리와 차단은 그것을 할 수 있는 괜찮은 환경을 조성한다.
숙면일여(몰입)를 통한 격물치지
몰입은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 큰 발견과 깨달음으로 다가간다. 이건 비선형의 성장 방식이다. 몰입의 시간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남들도 모르는 새로운 이치 혹은 아이디어를 발견할 가능성이 올라감을 의미한다. 과거 성인들은 이런 잠을 자는 듯한 사색과 명상을 통해 세상과 만물의 이치를 깨달았고 뛰어난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예술가들은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발견과 창작을 이뤄냈다. 그래서 천재들은 항상 세상과 동떨어진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다. 어쩔 수 없다. 세상의 흐름(Flow)을 따르는 삶은 결코 그것들과 멀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엔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이상하거나 안타깝게 보일 뿐이다. 중요한 건 세상을 완전히 뒤바꾸는 자들, 정확히는 그 계기를 만드는 자들은 세상의 흐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몰입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우리를 붙잡고 있는 많은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자들이 있기 때문에 현실세계가 지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듯이 생각만 하고 있는 세상을 떠올려 보라. 세상은 멈춘다.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지 않은가? 다만 좀 더 배고프고 춥고 궁핍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모두의 얼굴에 환희와 미소가 가득할 것이다. 왜냐 그것이 몰입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건 깨달음에서 얻는 환희와 미소이다. 세상에 잠자는 사람과 환희를 느끼는 자들만 가득한 세상이다. 피골이 상접한 채로…
몰입은 숙면일여(熟眠一如)를 통해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고통이 아닌 환희의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