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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즘과 마조히즘 사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박찬국 -네 번째 -

by 글짓는 목수

“흔히 사랑을 상대방에게 예속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나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망과 혼동한다.”

-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박찬국 –


사랑은 대상이 필요하다. 대상이 없다면 사랑은 생겨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이 생겨나는 순간 그 대상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사랑의 감정은 그 대상을 이성으로 혹은 물질로 오인하면서 생겨난다. 욕망의 대상을 우리는 사랑의 대상으로 착각한다. 그건 우리가 낭만주의와 물질문명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성적 욕구와 소유욕이 만들어낸 착각이다. 산업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랑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시각화되지 않는 만질 수 없는 상품은 그 가치가 떨어진다. 그래서 사랑을 성적인 대상과 물질적인 소유물로 전락시켜 버렸다.




섹스어필(강렬한 성적 끌림)에서 시작해 드라마 같은 낭만적인 연애라는 서비스 상품을 거쳐서 결혼이라는 법적인 소유관계로 나아간다. 성 상품화와 낭만의 상품화 그리고 결혼시장과 자본시장이 결탁한 결과 아닌가?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공동의 삶으로 나아간 자들 중에 다시 혼자의 삶으로 되돌아온 사람들이 많다.


“살아보니 사랑이 아니었더라”


세상이 권장하고 시스템이 추구하는 사랑을 지향하다 보니 그것이 지속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제 많은 이들이 그것들 깨달아가고 있다. 기껏해야 100년도 채 안 되는 세상이 만들어낸 자유연애 사랑 방식은 인류가 30만 년을 살아오면서 유전자 속에 축적된 사랑 방식과 잘 맞지 않더라는 것이다. 세상 추구하는 사랑이 삶과 연결되고 또한 영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타인을 존중하는 진정한 사랑은 내가 독립적인 인간일 경우에만, 다시 말해서 남에게 의존하거나 남을 지배하고 착취하지 않아도 나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 박찬국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읽기] 중에서 –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나약함이 드러난다. 노인과 아기는 둘 다 나약하고 젊어서는 정신적으로 늙어서는 육체적으로 나약하다. 우리는 이 나약함을 보완하려 운동하고 공부한다. 인간이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써야만 이 나약함을 속도를 늦출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인생의 대부분을 일하고 소비하며 또한 남는 시간을 먹고 즐기기에 바쁘다. 그래서 우리의 나약함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 나약함은 타인을 통해 드러나고 타인을 통해 채우려 한다. 그것은 서로의 나약함을 채우는 공생의 이상적인 사랑처럼 비치지만 이건 왜곡된 사랑이다.

마리오네트

“사디스트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도구로 삼는다. 마조히스트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도구로 만든다”

- 박찬국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읽기] 중에서 –


이런 왜곡된 사랑을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 부른다. 이 둘의 원인은 같다. 하지만 드러나는 형태는 대조적이다. 이건 마치 변비와 설사의 원인이 같고 지진과 화산 폭발의 원인이 같지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완전히 다른 형태인 것과도 같다.


원인은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된 불안감과 무력감이다. 사디즘은 불안감이 만들어낸 타인에 대한 지배와 통제의 형태를 보이고 마조히즘은 무력감이 만들어낸 타인에 대한 의존과 구속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둘이 만나면 아주 강렬한 끌림을 느끼게 된다. 마치 서로에게 부족했던 반쪽의 퍼즐이 맞춰진 것 같은 황홀감과 일체감을 가져다준다. 처음엔 이것이 공생의 사랑처럼 비친다. 하지만 이건 두 사람이 둘만의 그릇된 세계에 갇혀버리게 된다. 이성적 판단과 타인과의 공감능력을 상실해 가는 과정이다.


사디즘+마조히즘 = 절대 권위주의


프롬은 이 둘의 관계가 권위주의를 부추긴다고 봤다. 지배하고자 하는 자와 종속되고자 하는 자의 관계이다. 지배하는 자는 자신이 원하는 명분을 가지고 종속된 자를 통제하고 종속된 자는 그 지배자가 제시하는 비전(환상)에 빠져 그를 맹신하게 된다. 과거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라는 인물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와 같은 관계로 설명하려 했다. 당시 암울한 독일의 대외경제적 상황이 통치자(사디즘)와 민중(마조히즘)을 비이성적인 결속을 불러일으켰고 히틀러라는 희대의 인물을 탄생시켰다.

히틀러(1889~1945)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항상 이런 형태를 띠게 된다.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강한 추진력과 응집력을 발휘하지만 그 목적과 방향이 그릇된 것인지에 대한 검증이나 회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맹목적이다. 마치 종교적인 색채를 띤다. 이념과 종교가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 이유이다. 다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철학이 무엇인지가 다르다. 이 철학이 선한 양심에 근거하는지 아닌지를 판별하지 못한다. 양심은 뉘앙스가 없는 단어이다. 그 말은 각자가 생각하는 양심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양심에 따라서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선과 악 그리고 좋고 나쁨의 구분이 없다.


그저 나에게 이로운지 내가 속한 집단에 이로운지 이롭지 않은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 공통의 이념과 가치관이 아닌 집단과 개인의 이념과 가치관이 대중을 휘어잡는 것이다. 이건 물질적 대외적인 궁핍과 불안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인간의 본성이다.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면 존엄의 문제는 뒤로 밀려난다. 그래서 국가가 국민 경제를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국민은 인간이 아닌 동물로 변한다.


2차 세계대전은 짐승으로 변한 독일 국민이 저지를 인류의 흑역사였다. 국가가 국민의 주거와 물가 안정에 고심하는 이유는 국민이 동물로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다. 부동산 정책과 물가 정책은 언제나 국가 정책의 1순위다. 그리고 다음이 대외 정책이다. 내부 안정에도 불구하고 외세로 인한 불안이 만들어지는 요인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인들은 이 불안을 조성해서 국민을 동물로 만들려는 것 같다. 그들의 권력과 지위가 위태로워지면 국민이 이성적 판단력을 잃고 동물로 만들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 사회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려는 최악의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만큼 교활한 존재이다.

칼 마르크스 (1818~1883)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인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갚게 될 것이다. _ 칼 마르크스 ”


- 박찬국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읽기] 중에서 -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건은 서로를 인간으로 대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극과 물질에 익숙해져 자꾸 인간을 도구와 수단으로 인식하게 된다. 과거 로마 제국의 콜로세움은 그런 대중들의 사디즘적인 충동을 자극하고 이성을 잃게 만들어 대중의 정신을 통제하려 했다. 대중은 그 안에서 이성을 상실한 야만적인 인간의 모습을 관람하며 자신도 짐승처럼 변해 간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희열을 느낀다. 이건 현대의 매스컴의 형태로 바뀌었을 뿐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대중을 현혹시켜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함이다. 그 방식은 언제나 인간을 인간이 아닌 대상(물질, 도구)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현대 사회는 이제 사랑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는 상품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사랑’의 본질을 변질시키고 있다. 그리고 본질이 사라진 사랑은 그저 세상이 만들어내고 꾸며낸 사랑의 껍데기만 느끼고 소유하려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새로운 사랑과 더 낭만적이고 자극적인 사랑을 찾아 헤맨다. 자신은 아직도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했다는 푸념과 상실감에 빠져서...


바로 서지 못한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는 그렇게 계속 기댈 수 있는 대상만을 찾아 헤맨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이 바로 섰을 때, 즉 자기애가 충만한 서로가 만났을 때 비로소 드러나고 영속할 수 있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박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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