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신의 말은 언제나 추상적이고 은유적이며 간결하다. 과거 성인들이 남긴 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아닐까? 이건 비단 언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수식(수학과 과학)도 마찬가지다. E=mc^2처럼 아주 간결한 수식에 광활한 영역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심오하고 위대한 수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완성되기까지는 수많은 역경과 고민의 시간을 거치고 탄생한다. 우리가 과거 성인들과 위인들의 발견을 쉽게 읽고 보지만 금방 잊고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지 않는 건 우리는 그런 과정 없이 결과만 봤기 때문이다. 삶과 동행하지 않은 배움은 그래서 쉽게 잊힌다.
성경이나 불경이나 불후의 고전 속에 등장하는 문구들은 언제나 이런 형태를 지닌다. 이건 철학적이면서 문학적이다. 낭만적이고 자극적인 감정만 담고 있다면 그건 금방 잊혀버린다.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말이다. 그래서 신은 시로서 말할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변함없는 추상적 개념과 자연 현상으로 표현한다. 전자는 철학이 후자는 문학이 주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런 표현은 우리들의 뇌리에 남아 길이길이 전해질 수 있고 또한 영구한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철학과 문학은 융합되어야 한다.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루면 신의 말이 되고 고전이 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
“자연의 의도 없는 힘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서 모든 움직임은 그 기원이 그리스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이명의 탄생] 중에서 -
페소아는 성경의(유일신)과 그리스 신화(다신론)의 두 가지의 가치관을 모두 가지고 있다. 페소아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 속의 수많은 신들은 그저 성경 속에 수많은 인물(제자)들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인간과 신이라는 개념으로 분리해서 생각할 뿐이다. 배우만 바뀌었고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같다. 전자는 현실에 근거하는 역사적 기록이고 후자는 상상에 근거하는 신화적 기록이라는 배경만 다를 뿐이다. 성경은 과거(현실에 존재했던)의 이야기이고 신화는 상상(현실에 존재하지 않은)의 이야기다. 그것을 유일신과 다신이라는 범주에 가둬버렸다. 그건 종교라는 인간이 만든 공동체가 각자의 영역과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무리(공동체)의 확장은 인간의 본능이다. 힘을 가진다. 권력에의 의지다. 서로 다른 종교가 분쟁하는 모습은 서로 다른 국가가 전쟁을 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플라톤 (BC 428~348)
“신은 매우 정확하다” – 플라톤 -
– 페르난두 페소아 [이명의 탄생] 중에서 –
신과 인간은 개성을 지닌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을 본 따서 창조(만들다)했다고 얘기한다. 그 말은 신과 인간의 습성이 유사하다는 의미이다. 그건 인간이 다양한 개성을 지녔듯이 신도 그렇다는 역설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럼 신과 인간이 다양하다는 말이 좀 이해되지 않는가. 만약 유일신이라면 신이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지닌 것이고 다신(多神)이라면 각각의 페르소나(정신적)가 개별의 육체(형상)를 지닌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본캐, 부캐를 만들며 살아가는 요즘 현실에 빗대어 봤을 때 우리는 신의 놀이를 모방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 신화에는 각자 개성이 뚜렷한 수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성경에도 각자의 재능이 다른 수많은 인물(선지자, 예수의 제자등)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 만의 뚜렷한 소명(목적성, 역할)을 가지고 있다. 신화의 배경 속에서는 각각의 신들의 능력이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선지자)의 소명(능력)이 신과 연결되면서 발현된다. 신약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를 만나고 그들의 소명을 깨닫게 된다. 신의 세계에서는 개별의 소명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신 혹은 멘토(신과 같은 존재)를 통해서 자신의 소명이 발현된다. 그 이외의 인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대부분의 삶을 욕망과 물질과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어 자신만의 유일한 소명을 알지 못하고 살다가 떠난다. 돈과 권력과 명예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을 쫓아가는 삶이다. 신은 탄생과 동시에 정확히 자신의 소명을 알지만 인간은 그 소명을 찾는 것부터 시작한다. 찾는 것도 어렵고 이루는 것은 더 어렵다. 이것이 신들의 세계와 인간 세계가 다른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BC 384~321)
“시는 동물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 페르난두 페소아 [이명의 탄생] 중에서 -
만약 당신이 소명을 깨닫게 되었다면 당신이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한 말과 행동들이다. 처음에는 장황하게 설명하려 들 것이다. 자신을 이해시키고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말이 많아지고 분주할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 바로 적용가능하고 확률적으로 실현가능한 구체적인 말과 행동들로 삶을 채워갈 것이다.
“부자가 되려면 강남에 땅을 사라”
“권력을 얻으려면 SKY 박사 학위를 얻어라”
“명예를 가지고 싶다면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이 되어라”
성인들이나 시인은 이런 식의 표현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철학자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표현을 주로 쓰고 시인(문학인)들은 자연이나 사물에 빗대어 은유적인 표현을 즐겨 쓴다. 물론 성인은 둘 다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왜 이런 표현을 쓰는가?
시대와 문화와 환경을 초월하는 표현만이 영속성을 지니고 영원해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실용문구와 설명서는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의해 소멸되고 잊힌다. 마치 유행가 가사와 10년전 에 쓰던 MP3 사용 설명서와 같다. 구체적인 설명서와 일시적인 유행어은 오래갈 수 없다. 그래서 고전을 많이 접해야 한다는 말을 고리타분하지만 끊임없이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는 생명을 지닌 유기체적인 성격을 띤다. 육체와 형상을 지닌 생명만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남긴 시(글)가 내 삶 속으로 들어올 때 그건 영속적인 생명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다음 세대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인간이 신이 되지 못한다는 유일신의 가치관에서 그들이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이것을 달성하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가서 ‘나는 신이다’ 이런 말은 하면 반감과 지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우리는 그런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이 시대의 한국의 종교가 지탄의 대상이 된 이유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1888~1935)
“시인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대부분의 예술가에게도 적용된다. 예술가가 되는 법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단지 스스로가 시인임을 알아가는 법을 배울 뿐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이명의 탄생] 중에서 -
예술에는 여러 많은 분야가 있다. 광범위하다. 인간이 다양한 만큼 예술의 분야 또한 그러하다. 인간과 예술의 다양성은 일치한다. 나는 그중에서도 단연 문학의 영역을 좋아한다. 그리고 거기에 철학을 섞고 과학도 섞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문학은 표현과 이해의 객관화 과정이고 철학과 과학이 담고 있는 주관적인 메시지이다.
정확히는 객과적인 메시지에서 주관적 메시지로 나아간다. 새로운 발견과 자신의 철학과 과학의 탄생이다. 문학과 학문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다. 문학인이 책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다른 누군가는 그림, 조각, 건축, 음악, 무용 등의 다른 분야의 예술을 통해 개성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예술은 단지 표현의 수단일 뿐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은 철학(인간의 관념)과 과학(우주의 법칙)이라는 것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그것은 영속성을 지닌 고전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낭만적인 대중 예술에 그치고 세월과 함께 잊힌다. 세월이 가면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있듯이 그 반대의 것이 있다. 그런 점에서 물질(제품: 공장에서 만들어진)은 후자에 속한다.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시인일수록, 타고난 재능보다 더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다. 모든 예술가들은 아폴론 신이 추구하는 바를 가졌으며, 아테나 여신이 추구하는 바를 가질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이명의 탄생] 중에서 –
인간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모두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잠재력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할 계기와 멘토를 만나지 못하기에 그냥 물속 깊이 가라앉아 버린다. 심해의 어둠 속에 갇혀 버린다. 혹여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했다고 해도 수면 위에서 방향을 잃고 망망대해 위에서 부유(浮遊)하며 떠도는 배와 같은 삶을 살다 가기도 한다. 이건 그것을 알아봐 주는 사람(귀인)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의 잠재력이 발휘되려면 관계가 필수적이다. 과거 그런 위대한 자들도 많다. 그들은 그들이 죽고 나서 빛을 보게 되는 자들이다. 잠재력이 죽고 나서 폭발하는 케이스이다. 페소아도 그들 중 하나이다.
아폴론(Apollōn)과 아테나(Athēnâ)
"우리는 각자의 예술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한다."
그 시작은 아폴론 신의 영역에서 시작한다. 빛과 이성 그리고 음악으로 대변되는 아폴론은 중심과 시작의 상징이다. 빛과 이성을 중심으로 음악(마음의 소리)을 통해 각자의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글을 쓸 때 음악이 없이는 글을 시작할 수 없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예술은 객관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아테나 여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테나는 창과 방패를 지닌 여전사의 모습이다. 모순(矛盾)이다. 전쟁의 여신이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삶이 전쟁터라고 말하지 않던가. 아테나는 현실 세계를 표현한다.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창과 방패가 필요하다. 창은 공격이고 방패는 방어이다. 공격력은 화력(힘)이고 방어력은 전략과 전술(지혜)이다. 아테나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하는 신이다. 인간과 같다. 하지만 아테네는 지혜를 선호하는 여신이다.
“영혼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하나는 물리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기능을 한다고 모두가 합의한다면…(중략) 과학과 예술의 연합으로 , 이 연합을 통해 예술(또는 과학)이 완벽함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형상화했다”
- 페르난두 페소아 [이명의 탄생] 중에서 –
아테나의 창은 과학의 물리적 힘이고 방패는 예술의 정신적 지혜이다. 우리가 이 물리적 충돌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와 미움과 폭력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사랑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예술을 통해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랑 아니던가. 그리스 신화 속 최초의 신들 중에 에로스(Eros, 사랑의 신)가 빠지지 않는 이유이다.
전쟁을 피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면 왜 그것이 예술인지 이해할 수 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이해와 공감 밑바탕에는 사랑(발전단계: 모성애 – 이성애 - 인류애)이 깔려 있다. 이것을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인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언어적, 문화적, 환경적 제약에서 벗어난 무언가가 필요하다. (물론 물질적, 자본적인 이해 관계도 풀어야 하겠지만) 그 시작은 소통과 대화이다. 그 소통과 대화에 예술적인 감각과 표현이 가미되어야 한다. 이성과 논리만을 앞세우는 대화는 논쟁으로 끝날뿐이다.
아폴론과 아테나 사이에서
나와 상대 모두 신이 속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상대에게서 아폴론과 아테나의 속성을 끄집어내면 된다. 우리가 왜 그리스 신화와 성경 속의 이야기를 시대(불교 국가라면 거기에 걸맞은 다른 신화 혹은 이야기)가 흘러도 계속 회자하고 되새김질 하지는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감흥을 얻기 때문이 아니던가. 수많은 유명 브랜드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의 이름에서 따왔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성경 속에서 나온 것처럼…
지금 우리는 과학의 힘(무력과 화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세계가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는 이유이다. 예술의 힘이 필요한 시기이다. 물리적인 힘은 모두를 파괴시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