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_확장판] 황농문 - 세 번째 -
“몰입은 상당기간 집중을 유지하는 상태로, 이때 의식의 엔트로피는 낮다. 이와 반대로 산만한 상태에서는 의식의 엔트로피가 높다.”
- 황농문 [몰입] 중에서 –
엔트로피의 증가는 우주의 섭리이다. 세상 만물은 혼돈과 다양함과 복잡함으로 변해간다. 이건 열역학 제2법칙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에 이것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존재들이 있다. 이 존재들의 노력이 우주의 엔트로피 증가 속도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엔트로피를 줄이려는 사고(몰입:Flow)를 통해 결국 엔트로피 증가를 더욱 가속화할 수 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몰입] 새해가 시작하고 만난 가장 큰 통찰을 준 책이 아닐까? 사실 과거 저자의 다른 책 [슬로싱킹]을 읽고 몰입과 그 개념을 대략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그의 [몰입_확장판]에서 그 개념이 명확해지면서 또 다른 깨달음이 왔다. 난 그것을 얘기해 보려 한다. 그리고 앞으로 할 얘기는 저자의 통찰에서 얻는 영감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 나의 상상이 가미됨을 미리 언급드린다.
“생명은 네겐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이다”
- 에르빈 슈뢰딩거 –
엔트로피의 반대 개념을 네겐트로피라고 한다. 슈뢰딩거는 자신이 쓴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그것을 처음으로 설명했다. 물리학에서 설명이 안 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건 생명을 가진 것(유기물)과 가지지 않은 것(무기물) 그리고 그것이 의식이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의 구분이다. 왜냐 이것은 원자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물리학이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같은 분자구조(여러 원자의 조합)인데 생명을 가진 인간이 있을 수 있고 생명이 없는 인간(죽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이 숨을 거두는 그 찰나의 순간 생명과 의식은 사라졌지만 물리학적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물론 그 이후에 시간이 흐르면서 원자구조가 변형(부패)된다. 하지만 그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 그 생사(生死)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 그리고 생명은 있지만 의식이 없는 식물과 생명과 의식이 모두 있는 동물의 구분이 어렵다. 만약 식물과 동물이 똑같은 원자구조를 가진 상태가 있다고 가정하면 둘은 인간의 인문학적 혹은 생물학적 관점에선 식물과 동물로 구분되지만 물리학적 개념으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생명현상을 유지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엔트로피를 낮추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 황농문 [몰입] 중에서 –
엔트로피의 증가는 생명체의 생애 관점에서 출생이라는 엔트로피가 가장 낮은 상태에서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인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다. 아기에서 아니다 모체의 자궁 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만들어진 수정체는 단세포의 엔트로피가 가장 낮은 상태이다. 그리고 그 세포는 분화를 시작한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다양하고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우주라는 세상 속에서 수많은 유기체와 무기체의 영향을 받으며 엔트로피의 증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는 육체와 정신의 두 가지 관점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모체 속에서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세상과 조우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식은 언제나 외부(환경과 타자)의 영향으로 성장변화한다. 그리고 노화와 함께 육체의 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상태가 되면 생명이 끊어지고 육체는 더 이상 그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구속되어 있던 원자들이 뿔뿔이 자연 속으로 흩어진다. 이것이 원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상태이다. 내 몸을 구성하던 모든 원자가 흩어져서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가 노화 방지를 위해 엔트로피가 낮은 또 다른 생명을 섭취하고 운동으로 활성산소를 배출하는 것 또한 내 몸의 엔트로피의 증가 속도를 낮추려는 행위이다. 이것이 생명체의 입장에서 노화(老化 : Anti-aging) 방지이지만 물리학 개념으로 보면 산화(酸化 : Oxidation) 방지이다. 기름칠로 산화방지 막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우주의 자연 발생 현상을 늦추고 방해하는 것이다.
생명의 유지 – 나선형 구조(DNA)
생명체가 가지는 또 다른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건 바로 유전자의 구조이다. 생명체(인간, 동물, 식물)는 모두 유전자라는 무기물이 가지지 않은 고유의 코드(Code)를 지니고 있다. 생명과학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과학은 유전자 정보가 생명체의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 뇌 과학과 양자공학(컴퓨팅) 그리고 유전자 공학이 미래의 가장 유망 산업임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 DNA 정보를 모두 해석하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으로 나와 너의 미래를 점치는 것이 철학관을 찾아가서 무당에게 점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할 수밖에 없다.
주목할 점은 이 유전자의 구조가 이중나선구조(실매듭, 스크루의 나사선등)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구조는 물리학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구조이다. 생명체가 엔트로피에 증가에 따라 노화하며 산화하는 과정 속에서도 이 유전자가 안정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이중나선 구조가 네겐트로피, 즉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신비롭지 않은가. 이쯤 되면 생명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과학자 혹은 수학자들이 위대한 발견을 하면 그 경이로움 때문에 신을 믿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만물과 생명체의 이토록 신비한 질서와 구조는 신이 아니고서는 생각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몰입은 의식의 엔트로피 감소과정 – 무의식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동물과 인간이라는 생명과 의식을 가지 두 존재의 구분을 설명할 수 있다. 동물과 인간의 의식은 그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것을 몰입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동물은 몰입이나 사색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의식이다. 동물의 의식은 상상과 무의식과 연결되지 않는다. 물론 이건 아직 모든 동물에 해당된다고 증명된 바는 없다. 간혹 고래와 바닷속 심해 생명체에게는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는 의식의 영역이 있을 수도 있다는 학설도 있다. 고래에겐 인간이 가지지 않은 또 다른 변연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육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바닷속 생물들의 신비함을 풀려면 아직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모르는 분야는 제쳐두고 일반적으로 동물은 상상과 무의식을 의식화할 수 없다. 이건 인간만이 가진 유일한 뇌활동이다. 상상은 누구나 한다. 다만 그 상상의 깊이와 넓이가 다를 뿐이다. 이것으로 인간의 능력이 판가름 난다. 물론 이 능력이라는 것이 사회적인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 뛰어난 자가 상상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의 성공은 상상력 말고도 다른 인간의 능력으로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영역을 통한 성공은 동물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힘(강함)과 속도(더 빨리) 그리고 양(더 많은)으로 승부하는 곳이 현실세계이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예를 들면 올림픽이다. 인간이 동물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인간끼리 겨루는 시합이 아니던가? 달리기로 치면 치타보다 빨리 달릴 인간은 없고 높이뛰기는 캥거루를 이길 수 없으며 헤엄치기는 물고기의 비길바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상상과 무의식이 인간이 가장 인간답고 고귀한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상상의 영역도 이제 그리 녹록지 않다. 왜냐 AI가 더 잘하는 것 같다. 인간보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쓰고 더 멋있는 그림과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인간만이 가능하다는 예술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 그럼 이제 하나만 남는다. 무의식이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몰입의 과정을 통해서만 연결될 수 있다.
엔트로피의 차단 – 몰입의 시작
저자는 몰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가 차단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건 나의 모든 육체적 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기능이 일시 정지되고 해마 속에 장기 기억이 전두엽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강한 몰입을 하면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지도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한다. 이 몰입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식의 시간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며 그 생각들은 놀랍고 신기할 정도이다. 그래서 환희를 느끼게 되고 뇌가 긍정적으로 변해간다.
잠을 잘 때 보게 되는 무의식(꿈)은 의식이 돌아옴과 함께 사라지지만 몰입은 의도적인 무의식의 접근으로 나의 신체기관을 사용할 수 있다. 감각기관의 입력은 차단된 상태지만 출력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으로 그것들을 문자, 숫자, 기호, 그림, 음표, 몸짓등으로 표기할 수 있다. 그것이 철학과 문학, 수학, 과학, 미술, 음악, 무용이라는 현실에서 탄생시켰다. 이건 몰입을 통해 끄집어낸 무의식의 기억을 전두엽에서 상상이라는 또 다른 능력과 조합되어 몸(신체기관)으로 출력된 결과물이다.
이건 AI가 아직은 접근할 수 없는 분야이다. 그래서 몰입은 중요하다. 어쩌면 미래에는 몰입할 수 있는 인간과 몰입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나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을 나누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AI가 이 두 인간을 분류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몰입을 하는 인간은 AI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냐 AI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생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몰입하는 인간도 그 몰입의 질(깊이=시간)에 따라 등급이 나눠질 수 있다. 왜냐 몰입은 그 몰입의 시간에 따라 출력되는 정보의 질과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10분의 몰입과 10시간의 몰입을 통해 출력되는 결과물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몰입이 오래되고 깊을수록 전혀 새로운 것들에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인간은 몰입의 수준에 따라 빈부가 나눠지지 않을까.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네겐트로피 사고가 엔트로피 증가의 행위로
여기서부터는 내가 저자의 생각을 통해 상상한 내용이다. 저자는 네겐트로피와 엔트로피의 두 가지를 구분해서 몰입이 네겐트로피로 가는 길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이건 단지 인간이 몰입의 과정, 즉 생각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만 네겐트로피가 작동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때는 인간이 해마와 전두엽 사이에서 시냅스 간 정보만 주고받으면서 외부 신체는 현실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프라인 세상의 엔트로피 증가를 낮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몰입의 시간 동안 출력해 낸 결과물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이후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몰입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 만약 물질세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무엇이라면 이 엔트로피의 증가 속도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빨라질 수 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 오펜하이머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발견은 인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그 반대에선 인류를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 (엔트로피의 폭발적인 증가) 있는 힘을 쥐어줬다. 그의 몰입이 가져다준 발견이 물질세계에 작용하는 순간 엔트로피의 증가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결국 엔트로피는 줄이는 비물리적 사고(몰입)가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속화시키는 물리적 현상을 발견해 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걸 의도하진 않았지만 과학은 언제나 순수한 호기심이 의도를 가진 자들에 의해 이용되는 학문이다.
하지만 만약 이 몰입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철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결과물은 엔트로피를 증가보다는 감소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더 크다. 문학을 읽고 예술을 감상하는 시간은 물질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물질세계가 나아가는 엔트로피 증가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입으로 완전히 다른 결과가 생겨났다. 몰입은 무한한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과정이지만 이 가능성은 파괴적일 수도 있고 또한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건 인류가 어떤 몰입을 하는가에 달려있으며 그 몰입의 결과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렸다.
당신은 몰입하는가? 한다면 어떤 몰입이 더 마음에 드는가?
몰입은 이제 생존이다. 그리고 창조이자 파괴이다.
당신은 동의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