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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밍과 프레이밍 사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by 글짓는 목수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 W.B 예이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


마트료시카 인형을 아는가? 세계 안에 다른 세계가 끝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 다른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뜨려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단단한 껍질을 깨뜨려서 열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에 갇혀서 끝없이 이어지고 연결된 다른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건 우리가 세상을 나누고 구분 짓고 이름 짓고 프레임에 가둬 버리기 때문이다.

마트료시카


힘들게 완독한 책이었다. 여태껏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힘겹게 읽어간 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몰입이 쉽게 되지 않는 책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건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즉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책의 구조와 동일시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연결되어있다는...


이 책은 장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 딱히 어떤 장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과학서적 같기도 하고 에세이면서 누군가의 평전같기도 하다. 또한 자기 계발서의 성격도 가지면서 한 인간의 사랑과 미스터리를 다룬 추리소설 같기도 하다. 하여튼 딱히 뭐라고 구분할 수 없다.


내가 이 책에 몰입하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보통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책이 어떤 장르인지 구분하고 그 책을 읽기 시작한다. 나 또한 이 책을 과학서적이라는 선입견 혹은 편견을 가지고 접근했던 것 같다. 근데 읽다 보니 그게 아니다. 또한 개연성 없이 이어지는 듯한 넌센스 같은 구조가 책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끝까지 읽어보라는 주변 지인들의 추천으로 참고 읽었다.


결국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뒤에 있었다. 앞의 장황하고 개연성 없이 의미도 모호했던 이야기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랜 시간 기자이자 칼럼니스트로 살아온 저자가 생각 없이 이렇게 쓰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자 이건 의도적으로 이런 구조와 형태로 만들어진 이야기라 생각되었다. 그러니 뒤늦은 소름과 놀라움이 밀려들었다.

A human being trapped in a fence and unable to see the wider world

이름이라는 울타리


저자 룰루밀러는 [자연에 이름 붙이기, 원제 : Naming nature_캐럴 계숙 윤]라는 책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이름'이라는 정의와 규범화가 만들어내는 오류에 위험성을 이 장편의 글로 이야기하려 했던 모양이다.


저자는 몇 가지의 공통점을 가진 생명체들을 한데 묶어서 정의하는 분류학의 위험성을 말하고 있다. 종류과 소속을 규정해야만 한다. 세상에 모든 만물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어쩌면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마치 인간을 16가지로 모든 인간 성격 유형(MBTI)을 분류하려 하듯이 말이다. 인류의 새로운 발견은 새로운 이름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하다. 인간에게 발견된 것은 언어로 인식된다. 언어로 정의되는 순간 그 언어가 품고 있는 의미가 박제되어 버린다. 그럼 그 언어 밖의 가능성과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를 하지 않는다. 물론 그 가능성과 그 밖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된다. 그 언어가 만약 아주 많은 종류의 생명체들을 포괄하고 있는 단어라면 문제는 심각성이 커진다. 큰 오류의 정의(단어) 안에서 세분화 면서 다시 나눠진다. 큰 범주가 오류로 시작했으니 그 하위 단위의 정의나 분류 또한 오류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류의 역사가 계속된다.


그것을 다시 바로잡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랜 시간 그것이 인류의 삶을 규범화 정형화 시켰다면 더욱 그렇다. 그 범주와 규범에 익숙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삶이 규정되어 버린 자들에게 그것을 다시 뒤집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누군가에겐 살아온 삶을 모두 부인해야 한다. 여태껏 이어온 생계와 종사하던 직업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 자들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저지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겐 진실은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옳은 것이 진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류는 설사 오류를 발견하고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발견해도 그것을 밝히려 하지 않고 공론화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

- 유발하라리 [호모데우스] 중에서 -


우리는 그런 오류를 가진 신념과 이념 같은 단어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을 수 있다. 다만 아직 그것이 오류인지 알아내지 못했고 알아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알아내었다고 해도 그것을 공론화하는 것은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왜냐 그것으로 인해 기득권자들이 힘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뒤집어엎거나(혁명) 그것이 불가하면 그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의미 있는 발견과 진실이 드러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중에서

시기상조(時機尙早)라는 말이 있다. 시대를 앞서간 생각은 종종 실패로 끝나고 그 자는 그 시대의 외로운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그런 자들이 후대에서 선구자였다는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위인들이다. 그래서 너무 빨리 많은 것을 알아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만약 그 자가 사회적 지위나 부가 없다면 더욱 그렇다. 과거 예수도 진리(진실)를 설파했지만 기득권자(로마인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진 자들의 만들어 놓은 세상을 뒤흔들어 놓으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혁명과 혁신과 개혁은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해야만 하는 것이다.


“'기만’이라는 용어는 ‘긍정적 착각’이라는 중립적 표현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자 약간의 자기기만은 강한 정신력에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


그래서 우리는 때론 알아도 모르는 척하며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모순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옳은 소리 잘하는 사람치고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은 없다. 옳은 소리를 하려면 교수나 정치인이 되고 난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그것으로 밥 벌어먹고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서민은 대부분 어딘가에 소속되어 생계와 생존을 보장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설사 무언가 깨닫고 이해했더라도 그것들을 모르고 있는 자들과 알고 싶지도 않으며 알면 손해를 보게 되는 자들에게는 말해선 안 된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해를 입을 것이다.”


- [잠언] 9:7 -

깨달은 자는 말을 조심한다. 뭘 안다고 아무에게나 떠들 수 없다.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 되어 돌아올 뿐이다. 지혜로운 자는 이해할 수 있는 자와 이해할 수 없는 자를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자이다. 앞서 간 깨달음을 이해하는 자들은 드물기 때문에 깨친 자들은 방랑한다.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모든 자(Ruler : 측정용)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


인간이 사는 세상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룰(Rule :규칙과 질서)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 룰을 만드는 자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 의도가 없을 수 없다. 물론 성인군자가 만들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 규칙과 질서를 만들었겠지만 그런 자가 권력을 가지는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성인군자는 1세기에 한 번만 나와도 다행이다.


권력자는 세상을 통제하기 위한 그리고 기득권의 권세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룰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 구분과 분류의 질서와 규칙이 우리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워 다른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규범을 없앨 수도 없다. 법과 질서 그리고 분류된 개념과 구분된 생활양식에 익숙해진 자들이 그것에서 해방되면 무법천지의 세상으로 변해버린다. 처음부터 없었다면 자연법에 의해 그 어떤 질서가 만들어졌겠지만 인위적인 질서에 익숙해진 우리는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


네이밍(분류)과 프레이밍 사이


얼마 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으로 독서 토론을 했다. 여태껏 했던 토론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생각들이 튀어나온 토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독서 토론에서

“이름 짓고 구분 짓는 것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해요, 하지만 그 분류가 열등과 우등을 나누는 프레임이 되어선 안 되겠죠”


한 토론 참석자의 발언이 많은 사람들의 경종을 울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계속 네이밍과 프레이밍을 만들어 갈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이 인류 문명의 발전 방식이기 때문이다. 규정지어진 것 위에 또 다른 토대를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인류의 모든 학문이 발전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악용해 높고 낮음, 우성과 열성, 고등과 저등으로 계급화 계층화 프레임을 씌우는 자들이 문제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화 차별화를 위해 다른 인간과 생물들을 저열하고 낮은 존재로 비교 하향 시킴으로써 자신을 올리는 자들이다. 비열한 자들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그건 이 방법이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권력을 잡아야만 뭘 할 수 있는 정치적 속성은 그들을 비열한 집단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 발언자의 마지막 그 한 마디로 토론의 모든 내용들이 정리되는 듯했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신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믿는 점만 다를 뿐이다”


조급한 한국인은 뭐든 빨리 바꿔야 한다. 그래서 치열하게 논쟁하고 싸운다. 성급한 기질의 민족성이 만든 현상이다. 진실은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질서도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모든 진실과 새로운 질서를 내 눈으로 보고 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조급하다.


“형님, 제가 첫 벽돌을 쌓는 자일수도 있지 않겠어요?”


옛날 그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집을 지으려면 벽돌을 쌓아야 하는데 모두가 마지막 벽돌을 쌓으려 하면 집을 올릴 수가 없다. 내가 마지막 벽돌을 쌓아서 집이 완성된 모습을 보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누군가가 첫 벽돌과 중간 벽돌을 쌓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마지막 벽돌을 쌓길 원한다면 집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 Lulu Miler in lib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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