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고 난 후
“악보에 리듬을 따라서 여정을 떠나라. 첫눈에 너의 운명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항해를 끝내고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다.”
“Follow the notes upon the journey. At first sight marks one's destiny. Once the voyage comes to an end, Return lies within hasty keys.”
머나먼 여행은 또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내가 머물던 시공간이 아닌 낯선 곳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는 자는 나의 운명을 바꿀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만약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오려면 서둘러서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새로운 삶이 다시 너를 붙들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본 영화다. 벌써 10번은 넘게 본 듯하다. 18년 만에 한국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었다. 한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영화관을 찾았다. 18년 전 그때의 감흥을 다시 받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나에게 이젠 고전이 되어 버린 영화였다. 고전은 역시 계속 회자되기 마련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18년 전 그때가 떠오른다.
낯선 곳에 떨어진 이방인
2007년 교환학생으로 중국의 무한이라는 도시에 머물고 있던 때였다. 중국에서 머문 시간 때문인지 중국어가 이제 좀 귀에 익숙해져서 원어로도 그 감정과 느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나에게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중국어 자격증 공부를 핑계 삼아 그 영화를 여러 번 봤다. 그래서 극 중의 대사들이 나에겐 너무도 귀에 익다. 그 뜻뿐만이 아니라 뉘앙스와 어감 모두 익숙하다. 또다시 그 영화를 보면서 인물들의 대사가 내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오는 나를 발견한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다시 본 영화는 이제 조금은 다른 관점과 해석이 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그동안 겪어온 삶과 읽은 책들 속에서 생겨난 관념들이 영화에 개입했기 때문이리라.
이방인, 영화를 보고 난 후 떠오른 단어였다. 얼마 전 내가 어릴 적에 살던 동네와 다녔던 초등학교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아주 작은 꼬마 아이가 뛰놀던 동네와 학교는 왜 그리도 익숙하면서 또한 낯설게 느껴지는지... 꼬마 아이에겐 그곳은 크고 넓은 세계였다. 지금은 훌쩍 커버린 몸 때문인지 그 동네와 학교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너무 많이 늙어버린 존재는 그때의 기억과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오버랩되면서 아련하고 묘한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세계가 아닌 기억 속에 있는 세계와 현실 세계의 괴리가 만들어낸 느낌이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
이건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가져온 느낌이다. 다른 시간에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다른 공간이 만들어 내는 느낌이다. 전자는 '비물리적 시간 여행'이고 후자는 '물리적 공간 여행'이다. 우리는 여행을 대부분 후자로 생각한다. 전자는 그저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해마 속 깊이 빠져서 현실의 모든 감각을 잊고 몰입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비현실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건 오로지 개인만이 아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인간은 모두 이 뇌로 세상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뇌가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 당신의 눈이 외부의 대상을 보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눈은 뜨고 있는데, 초점이 흐려지고 눈에 보이던 피사체들이 주변부로 사라지고 당신의 뇌 안에서 무언가를 리얼하게 상상하고 있을 때, 인간의 다른 감각들은 무뎌진다. 이 무뎌짐이 강할수록 비현실의 뇌 속에서 펼쳐지는 이미지와 영상은 더 뚜렷해진다. 외부로 향하는 뇌의 인지능력이 뇌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과 공간의 초월
여자 주인공은 시간을 이동한다. 시간을 이동하면 공간은 그대로지만 관계는 바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여행을 떠나는 것은 공간을 바꿈으로써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일 수 있다. 영화와는 반대지만 그 본질은 같다. 물론 여행을 떠나서 관계를 전혀 맺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만약 새로운 관계 속으로 나아가는 장기간의 여행 혹은 이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만 한다. 홀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럼 삶에 변화가 생긴다. 영화는 그 삶의 변화를 새로운 인연과의 사랑으로 설명한다. 낯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물은 나를 알지 못한다. 전혀. 물론 나 또한 상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지의 세계이다. 인간은 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진다. 인간의 본성이다.
내가 처음 호주로 떠났을 때, 처음 관계를 맺은 자와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지금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 하고 있는 인물이다. 설사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관계는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다. 낯선 환경(시공간)에서 처음 만난 존재는 내가 그 세상을 이해하는 눈과 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기가 엄마라는 첫 번째 관계(프레임)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엄마와 아기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다. 이것과 같이 새로운 세계에서 처음 맺는 관계가 바로 이러하다.
음악은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마중물
영화는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시간을 이동한다. 나 또한 글을 쓰면서 상상에 빠져드는 과정은 언제나 음악과 함께이다. 음악이 없이는 어디로도 이동할 수 없다. 지금도 음소거된 무성영화가 펼쳐지는 공간 속에서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영화도 그렇다.
연주를 통해 시간 여행을 떠나고 여자의 첫눈에 들어온 남자, 악보에 적힌 마법처럼 남자에게 운명처럼 빠져든다. 그리고 그 마법은 남자에게도 통한다. 그 남자만 여자를 볼 수 있다. 둘은 음악을 통해 둘 만의 세계에 갇혀버린다. 마치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엄마라는 세계에 갇혀버린 것과 같다. 하지만 세상은 그 관계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현실 세계(물리적)와 둘 만의 비현실(비물리적) 세계가 부딪치고 충돌하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럼 이제 두 세계를 오고 가는 것이 어려워진다. 어느 한쪽의 세계가 좀 더 강하게 자신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머물고 싶은 세계와 머물러야만 하는 세계가 나를 양쪽으로 잡아당긴다.
여자의 현실(물리적) 세계가 여자를 무너뜨린다. 비물리적 세계를 물리적 세계에서 증명하고 인정받으려는 무모한 시도가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아간다. 개인의 이상세계는 언제나 이렇게 무너지게 된다. 현실의 족쇄는 우리가 이상 세계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 머물고 있으며 그것들 밖에 볼 수 없음이다. 볼 수 없는 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자신도 결국 그것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갈 수밖에 없다. 판타지는 언제나 판타지 속에서만 판타지이다. 판타지와 현실 세계를 섞어버리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분리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이것을 적절히 분리해서 살아가는 법을 아는 자는 불행하지는 않다. 현실(물리적) 세계에서만 살아가는 자는 삶이 쾌락(육체적, 정신적)만을 쫓으며 고통과 권태를 오고 가는 삶을 사는 자들이 대부분이지만 이 두 세계를 오고 갈 수 있는 자는 그런 외부의 대상과 물질을 통한 쾌락이 없이도 자신 스스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스스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세계가 섞이지 않으면서 또한 두 세계의 밸런스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 또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인간이 현실 세계(Off-line)와 비현실 세계(On-line)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인간 세계도 이 두 세계로 나뉘어 있다. 온오프라인이 공존하는 시대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온라인 세계는 내가 말하고 이 영화가 말하는 그 세계와는 다르다.
내가 만든 그리고 타인이 만든...
이것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온라인(비현실, 가상, 이상) 세계를 내가 만들었는가 아니면 타인이 나에게 만들어 주었는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이 만들어 놓은 가상 세계에서 살아간다. 소설과 영화, 인스타와 유튜브, 온라인 게임등 이 모든 가상의 콘텐츠들은 그들만의 방대한 영역을 구축하고 그 안에 우리의 뇌가 머물기 원한다. 많은 육체가 머물고 이동하는 유동인구의 개념은 이제 온라인의 접속 트래픽으로 바뀌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오프라인 공간에 돈과 관심이 쏠리듯이 온라인 공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공간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계속 요구하는 공간이다. 소비와 시간과 노동을 빨아들이고 그것을 부가가치로 창출해 내는 곳이다. 인기라는 인간의 기운이 그 공간을 만든 자들 그리고 그 공간을 지배하는 자들에게 부와 힘을 가져다준다.
사랑이라는 판타지
내가 만든 시공간 혹은 내가 직접 떠난 여행지에서 우연히 처음 만난 관계는 그 어떤 의도적인 요구가 전제되지 않는다. 둘 만의 세계이며 둘이서 만들어 가는 세계이다. 만약 두 사람이 모두 같은 상황, 즉 둘 다 낯선 시공간에서 처음으로 만난 관계라면 이 감정은 좀 더 특별해진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처음으로 만난 아담과 이브라고 할까. 둘만 보이고 둘에게 의지하게 된다. 강렬한 끌림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판타지에 빠진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남녀의 현실을 초월한 정확히는 현실을 무시한 강렬한 사랑은 다른 것, 즉 현실의 제약과 시선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나의 말과 행동을 제어하는 유일한 대상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이나 플랫폼에서 보고 있는 수많은 구독자와 이해관계자들이 아니다.
“꿈꾸기 혹은 행동하기.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이란 끔찍하다. 내 이성은 꿈꾸기를 혐오하고, 내 감수성은 행동하기를 역겨워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 같은 시인은 아마도 이 감정을 아주 잘 이해하는 자일 것이다. 이상과 현실 모두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자는 이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그러고 보면 어느 한쪽을 살아가는 인간도 고통받고 둘 다를 살려고 해도 고통받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다만 이상 세계가 없이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만 보고 평생을 사는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를 게 뭘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인간의 삶이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인간 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이상세계를 경험하고 볼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물리적인 것들 물질과 쾌락에 취해서 뇌가 반응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든 세계가 나의 뇌를 자극하고 물리적인 현실의 조건 없이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더 낫지 않은가?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제나 이 현실의 굴레 속에서 고통받고 살다가 죽어가는 건 어쩌면 인간으로서 가장 불행한 삶일지도 모른다.
이상과 현실 두 가지 중 하나만 있다면...
남자 주인공은 돌아오지 못할 시간의 강을 건너버린다. 시간 여행의 매개체인 피아노가 파괴됨과 동시에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가 버린다. 두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사라짐을 알면서도 현실이 아닌 이상의 세계를 선택해 버린다. 그럼 물론 그 이상 세계가 현실이 되어버린 것과 같다. 오고 갈 수 없는 하나의 세계만 존재하는 것은 결국 현실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사랑이었다. 둘 중 어느 한 세계를 포기하게 만든 건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이 이상과 현실의 구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영화는 쇼팽과 조르주 상의 10년간의 사랑을 얘기한다. 음악가와 소설가의 사랑은 서로의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둘의 사랑이 서로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쇼팽은 사랑의 힘으로 수많은 걸작을 완성했고 그녀도 여러 소설을 집필했다. 음악과 문학이 사랑을 만나면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영화의 마지막 남자 주인공(예쌍룬)은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상 세계를 선택했다. 영화는 이상이 현실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이어가진 않는다. 다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한 것은 만약 이상과 현실을 더 이상 오고 갈 수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 것인지도 모른다.
감독은 아마도 이상을 선택한 모양이다.
당신의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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