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짓는 목수 이야기] 유광복
“목수의 손마디는 거칠지만 그 손끝에서 빚어지는 결과물은 결코 허구 없는 실재의 아름답고 실용적인 작품으로 탄생한다. 반면 작가의 손은 거칠지 않지만 그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현실에선 보이지 않는 허구의 거칠고 슬픈 현실을 담아낸다.”
- 글짓는 목수 -
목수와 작가는 모두 손으로 일을 하지만 그 일이 성격은 다르다. 목수는 현실을 사는 직업이고 작가는 허구를 사는 직업이다. 목수는 현실의 사물들의 이치를 몸으로 알아가는 사람이다. 작가는 현실의 존재들의 관계를 머리로 알아가는 사람이다. 둘은 아주 이질적인 성격의 직업이지만 이 둘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면 그 이질적인 것을 품을 수 있게 된다. 몸으로만 세상을 알 수 없고 또한 머리로만 세상을 이해할 순 없듯이 인간은 몸(물리적)과 뇌(비물리적)로 세상을 알아간다. 이건 삶과 앎이 연결되는 과정이다. 그 모순을 견디는 자는 진리에 다가간다.
목수는 집을 짓는 사람이다. 작가도 집을 짓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목수(木手: Carpenter)는 그 한자를 뜯어보면 나무와 손이 합쳐진 글자이다. 글자 뜻 그대로 손으로 나무를 다루는 직업이다. 사실 글자에서 집을 떠올릴 수 없다. 뭐 목수가 모두 다 집을 만들진 않지만 목수 없이 집을 지을 수도 없다. 작가(作家: Writer)는 만들 ‘작(作)’과 집 ‘가(家)’라는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집을 만들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집을 만드는 자는 목수인데 작가에게 집을 만드는 의미를 부여한 건 왜일까? 우리의 조상들은 바보였나? 한자의 유구한 역사는 인간의 사고가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한글도 한자에서 기원된 글자이다.
“평생 대패만 잡고 살아온 목수가 글을 쓰려니 보통 어려운 일인가?”
- 유광복 [삶을 짓는 목수 이야기] 중에서 -
목수라는 직업과 작가라는 직업을 함께 가진다는 것을 상상해 봤는가? 저자도 오랜 세월 목수로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책을 썼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고 쉽지 않았다는 것을 토로한다. 손으로 펜을 잡는 것과 공구를 잡는 것은 아주 이질적인 느낌이다. 나도 목수일을 하며 느꼈지만 목수의 손은 아주 거칠다. 수많은 사물(자재)들의 질감과 촉감을 손으로 만지고 느끼면서 아주 거칠게 변해간다. 거칠지만 아주 감각적이다. 오래된 목수는 손으로 만지고 두드려 보면 다 보인다.
반면 작가의 손은 전혀 감각적이지 않다. 작가는 손가락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뇌로 느끼고 손가락은 그것을 옮기는 역할만 할 뿐이다. 물론 손가락이 움직여야 뇌도 함께 작동한다. 뇌와 손가락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주판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이 수학과 음악 능력을 향상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뇌가 혼자 독단적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을 반증한다. 이건 마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치며 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것과 같다.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리고 움직이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작곡가도 작가도 모든 것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다.
“목수는 매일 깎고, 자르고, 파다 보니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치고 잘 사는 사람 못 봤다. 그러니까 붙이고, 쌓고, 바르는 직업을 선택해야지 잘 살 수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 유광복 [삶을 짓는 목수 이야기] 중에서 –
목수와 작가는 지난한 가난과 친숙한 직업이다. 가난하지 않았다면 목수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작가가 되었다면 가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유한 자는 현실에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은 자이기에 고된 노동과 허구 속 세상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다. 선후의 시점이 다를지는 몰라도 둘 다 이 가난이라는 것과 친숙하다. 그리고 가난은 삶의 여러 가지 면모를 경험하게 해 준다.
"거지는 왕을 꿈꿀 수 있지만 왕은 왕을 꿈꾸지 않는다."
가진 자들은 지식은 늘어날지 몰라도 상상력이 줄어드는 건 가난하지 않은 것 때문이기도 하다. 가난한 자는 현실의 가난을 상상으로 극복하며 상황을 바꿔나간다. 목수도 작가도 모두 그렇다. 목수는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집과 물건을 현실에 구현해 내면서 미래에 자신의 집을 지을 꿈을 키워간다. 작가는 자신이 머물 수 없는 세상을 비현실에서 만들어 냄으로서 꿈을 키워간다. 그리고 그 꿈을 잃지 않고 계속 끝까지 가져가는 자는 언젠가 자신이 꿈꾸던 자신의 집을 짓고 자신이 꿈꾸던 그런 세상을 만든다. 아니 그렇게 믿는 것이다.
목수와 작가의 공통점
목수는 건축 일을 하는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은 공구와 자재를 쓰는 사람이다. 목수는 손으로 일을 하지만 공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작가가 펜(키보드) 없이 손가락만 있다고 글을 쓸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목수는 너무도 다양한 공구와 자재의 쓸모를 익혀야 한다. 어떤 공구와 자재를 어떻게 적재적소에 쓰는지를 잘 아는 목수가 완벽한 집을 지을 수 있다. 이건 작가로 치면 어떤 단어와 문장을 구사할 것인가와 맞닿아 있다. 필력 있는 작가일수록 이것을 잘 안다. 문장과 문단의 흐름을 해치지 않고 적절하고 절묘한 단어와 서술어를 구사하는 것이 바로 가장 적절한 자재와 공구를 쓰는 것과 흡사하다. 튼튼하고 멋있는 구조물과 문장 구조는 실력 있는 목수와 필력 있는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끊임없는 배움 vs 먹고사니즘
목수도 작가도 배움에는 끝이 없다. 목수만큼 다이내믹한 직업도 없다. 목수는 정말 다양한 상황과 문제에 직면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목수의 실력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목수는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목공은 아이디어 싸움이다. 같은 구조물을 만들어도 그 방법(공법)은 다양하며 그 디테일(과정)은 더욱 다양하다.
요즘 유튜브에는 수많은 상황에 대처하는 목공의 기술들이 소개된다. 하지만 그것들을 한 번 본다고 절대 익혀지지 않는다. 몸과 머리는 언제나 함께 간다. 여러 번 연습하고 익혀야 내 것이 된다. 또한 건축 자재와 공구는 날이 갈수록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며 발전을 거듭해 나간다. 새로운 자재와 공구의 사용법을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분야에서 퇴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목수에게 오만과 교만은 적이다. 항상 배움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
이건 작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작가도 쓰는 것이 일이지만 읽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읽기 없는 쓰기는 발전할 수 없다. 모든 재료(글감)와 공구(어휘력, 문장력)는 독서에서 나온다. 물론 일상의 경험 속에서도 나오지만 그건 극히 적은 부분이다. 작가의 집필량은 독서량에 비례한다. 독서를 하지 않는데 집필양이 많다면 그 글은 그저 구간반복하는 도돌이표 같은 글일 가능성이 크다. 간혹 유명 작가들 중에도 항상 같은 비슷한 스토리와 형태의 글만 반복하는 작가들이 있다. 물론 한 분야의 전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배우도 연기 변신으로 성장하듯 작가도 성장하려면 변화(소재, 구조, 색깔)가 있어야 한다.
목수도 배움이 없으면 하는 일만 계속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며 살아간다. 나도 목수 일을 하면서 여러 목수들을 보아왔지만 대부분 그렇게 변해가더라. 그건 모두 현실 때문이다. 먹고사니즘, 즉 생계를 위해서는 일의 효율과 속도를 올려야 하기에 목공도 한 두 가지 분야만 반복하는 자들이 많다. 그래야 돈이 된다. 매일 다른 상황과 자재와 태도로 일을 한다는 것은 마치 그 옛날 수렵 사피엔스와도 같다. 내일 마주칠 사냥감이 무엇일지, 맞닥뜨릴 상황이 어떨지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작가도 직장인처럼 반복 숙달된 기계적인 작품 활동이야 말로 밥을 굶지 않는 최선이다. 배움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돈이 되지 않는 시간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돈에 배움을 내어준다. 목수와 작가는 자신만의 작품과 세계를 계속 창조하기 위해서 배움의 끈을 절대 놓아선 안 된다.
목수와 작가 사이
내가 목수보다 작가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작가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건 현실과 비현실(상상)의 영역이라는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목수는 주어진 계획(도면)대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존재이다. 모든 건축은 도면(Plan)이 기본이다. 목수는 도면 속 압축된 가상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에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만들어내야 하는 임무를 지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목수는 한계를 지닌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생각을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목수는 상상을 하는 직업이 아니다. 목수의 상상이라면 그저 현장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상황들, 즉 도면의 구조물을 만드는데 방해 요소를 제거하고 어려움을 풀어내는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변함없다. 그건 어떤 목수가 일을 하든 같다. 물론 도면대로 만들지 못하는 목수는 자격미달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 결과를 스스로 상상하며 글을 쓴다. 작가는 도면을 만드는 자인 동시에 그 도면을 구현하는 자이다. 도면과 작품이 모두 상상 속에 있다. 적어도 작가는 남의 상상을 구현하는 사람은 아니다. 대신 일당(일한 만큼의)은 없다.
그래서 목수는 현실에 얽매이게 된다. 목수가 글이라는 상상의 영역과 친해지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고된 육체의 노동은 뇌의 상상력을 보다는 몸의 감각을 뛰어나게 만든다. 나는 그것을 십분 이해하고 공감한다. 힘든 노동 뒤 책상 앞에 앉으면 상상이 아닌 졸음만 밀려올 뿐이다. 피로는 상상의 나라가 아닌 꿈나라로 가길 원한다. 잠을 자면 꿈을 꿀 순 있지만 꿈을 쓸 순 없다.
그래서 목수는 상상을 하는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그럼 목수는 디자이너가 된다. 자신이 설계하고 시공하는 능력을 모두 갖춘 자이다. 건축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이다. 목수들의 로망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반면에 작가는 처음부터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나가는 자이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머문다. 그래서 작가는 세상에 홀로 선 자가 되기도 한다. 누구의 간섭과 도움도 없어 모든 것을 혼자서 계획하고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외롭지만 자유롭다.
그래서 나는 목수보다 작가가 더 좋다.
현실의 집은 유한하지만 상상의 집은 무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