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만남과 이별 사이

발리에서 생긴 일 ep14

by 글짓는 목수

회사를 나오고 오랜 시간 집안에서 홀로 은둔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에 지쳤고 또한 두렵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살 수도 없었다. 인간(人間 : 사람과 사람 사이)은 본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인간이다. 혼자서는 사람이지만 인간은 아니다. 말장난 같지만 이건 우리가 타인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자서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


나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아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온라인 세상은 나처럼 나를 드러내지 않고도 자신을 드러내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물론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이 가식인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뭐 그게 중요하지도 않다. 어차피 현실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 아니던가? 만약 내가 그 온라인의 상대방과 오프라인의 시공간을 서로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상대를 온라인의 그 모습으로만 기억하고 거기서 호감을 얻고 관심과 즐거움을 느끼면 그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서로 영향은 미치되 간섭하진 않는 관계이다.


또한 이런 관계는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고 또한 차단할 수 있다. 상대의 SNS를 방문하다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기며 소통한다. 이렇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감정만 가진 소통이 이어지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간절한 느낌이 생겨난다. 아마도 미래인은 이런 감정 상태를 즐기고 익숙해지도록 진화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온전히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유지되는 관계이다. 마치 신과의 관계라고 할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항상 함께 있는 것 같은 존재이다. 신은 나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타인의 SNS를 드려다 보면서 알 수 없는 믿음과 신뢰 같은 것이 생겨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타인이 보여주는 노력의 지속성과 인내에 대한 경외감의 결과인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인내 그리고 지속성의 기간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 소망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다. 다만 그 이뤄지는 것이 살아생전 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인류의 시간을 둘로 나눈 위대한 어떤 이도 자신이 죽고 나서야 자신이 원하던 것이 이뤄진 것처럼. 웃긴 건 죽으면 영향력은 더 커진다. 더 웃긴 건 그 영향력이 죽은 자의 의도대로 혹은 그 자의 염원대로 행사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언제나 살아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 자의 이름과 살아생전의 업적들을 발판 삼아서 그 후광으로 먹고사는 자들이다.


“这画很有意思。我不知不觉继续看呢”(그림이 정말 흥미로운데… 계속 보게 되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자였다. 그런데 그림이 영상이 되었다. 그는 수십 장의 그림을 연결해서 움직이는 그림을 만드는 자였다. 그림은 연필로 그린 스케치였으며 그 스케치는 꽤나 리얼했다. 그리고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그가 그린 수십 장의 그림을 책장처럼 빠르게 넘기며 살아 움직이는 듯이 춤을 추는 그림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춤에 맞는 음악을 삽입해 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자였다. 한 편의 영상을 만들기 위해 수십 장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 그의 수고는 누가 봐도 박수를 보낼만했다.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작업까지 빨리 감기 버전으로 함께 업로드했다. 2~3일에 한 번 꼴로 올라오는 그의 영상은 계속 나를 기다리게 만들 정도로 흥미롭고 매력적이었다. 그림과 춤과 음악의 삼위일체가 만들어내는 예술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가만히 훔쳐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의 그림을 계속 보면서 그의 정체성과 그가 가진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의 존재를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댓글] - 我觉得你的画画跟跳舞音乐在一起就重生为完全不一样的了。

(그림이 춤과 음악과 함께하니 새롭게 다시 살아는 것 같아요)

[답글] - 哈哈 我也想了重生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 싶었어요 하하)


나는 처음으로 그의 SNS에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바로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답글이 달렸다. 깜짝 놀랐다. 그게 내가 회사를 나오고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너무도 쉽게 나의 말을 무시해 버리던 현실의 세상과는 달리 가상의 세상은 나에게 너무도 빠른 응답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 작은 관심이 나를 더욱더 오랜 시간 그의 세계에 머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종종 그의 작품을 보며 영감을 얻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즈음 나도 SNS에 나의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그에게도 알려 주었다. 나 혼자서만 훔쳐보던 관계는 어느새 서로를 드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영상을 그는 나의 글을 보며 서로의 세계를 공유했다. 나는 그의 영상에 빠져들었고 그는 나의 글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무언가에 빠져버렸다.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했다.


[我们要见面吗?](우리 만날래요?)

[你真的想见面吗? ] (정말 그러고 싶으세요?)

[是](네)


그가 DM(Direct Message)으로 말을 걸어왔다. 댓글이 편지라면 DM은 실시간 대화이다. 댓글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만 DM은 생각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어색하다. 그래서 이제 전화 통화는 어색함을 넘어 거북하기까지 하다.


이 모두가 비대면 소통임에도 반응 속도에 대한 압박감이 가져오는 생각과 느낌이 다르다. 대면하면 생각할 시간도 부족하고 생각을 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왜냐 상대의 눈과 표정을 바라보면서 대화하는 건 언제나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그럼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진화해 간다. 그래서 세상이 점점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으로 변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생각할 시간이 많다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그냥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오히려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건 때론 해야 할 생각을 미루고 잡생각만 늘어가는 이유가 된다.


두려웠다. 또다시 현실에서의 만남이. 현실의 관계는 항상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것을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증명했기에 이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가 내게 준 호감과 호기심과 혼미함은 그 두려움을 넘어서게 만들었다.


[那好吧。我么见吧](그래요 우리 만나요)


만남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그가 준 호감과 호기심과 혼미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시 두려움이 더 커져가고 있었다. 만남을 약속하고 만남까지 우린 서로 그 어떤 댓글이나 DM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던 것일까?


[在$$公园见面吧]( $$공원에서 만나요)


우리의 첫 만남은 도시에서 가장 큰 공원 한가운데서였다. 그가 제안했다. 공원에서 만나자고.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첫 만남을 공원에서 가지는 것은 그것도 이성과의 첫 만남을.


[真不好意思。我会晚一点到,堵车厉害。](정말 죄송해요. 차가 너무 막혀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약속시간에 늦었다. 거짓말을 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뻔한 핑계가 필요했다. 사실 나는 이미 약속 3시간 전에 약속한 공원 바로 근처의 카페에 와 있었다.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상념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시간을 잊어버렸다.


“쨍그랑!”


잊었던 시간을 다시 인지한 건 나의 테이블 앞을 지나던 한 손님이 내 앞에서 커피 머그잔을 떨어뜨리면서였다. 그때 시계를 확인했고 약속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걸 확인했다. 나는 부리나케 노트북과 책을 챙겨서 공원으로 달리듯이 걸었다. 그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도 전혀 짜증스럽거나 당황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환희와 기쁨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3시간 동안 3년의 시간을 지나오는 3만 자에 가까운 단편 소설을 한 편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맛보는 깊은 몰입이었다. 생각의 속도와 손가락의 속도가 거의 일치하는 신공을 맛보았다.


내가 시간을 인지하고 주변을 돌아봤을 때 카페 안에 몇몇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멍하게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며 쉬지 않고 키보드를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란하게 움직이는 나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감상했던 모양이다. 속기사로 보였을 법도 하다. 그 키보드를 타닥거리는 소리가 가히 듣기 좋다고는 할 순 없겠지만 만약 이것이 피아노 건반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아쉽지만 난 악보를 볼 줄 모른다.


그가 그 넓은 공원에서 지정한 약속 장소는 광활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 잔디밭 한가운데 눈에 띄게 큰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그 나무 그늘 아래 나무 벤치가 있었다. 그곳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는 내가 다가오는지도 모른 체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제야 그가 작은 메모지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나를 기다리며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喂! 你好吗?” (저기요, 안녕하세요)


그는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음악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와 같다. 음악이 없으면 글을 쓰지 못하는 나처럼 그는 음악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살며시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데었다.


“咦!你来了?” (앗! 오셨어요?)

“是你好吗? 动片?!”(네, 안녕하세요? 똥피엔님?!)


그의 SNS상의 아이디는 똥피엔(Dongpian: 動片)이었다. 그 의미는 움직이는 그림 혹은 조각이라는 뜻을 품고 있었다. 그의 첫인상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그가 만든 작품들 속에서 내가 상상해 낼 수 있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이미지를 가진 남자였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언제나 상상이 만들어낸 기대 때문이다. 서로 마주 보며 서로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미세한 눈동자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어색함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我们走一走吧”(우리 좀 걸을까요?)


그가 공원을 걷자고 제안했다. 드넓고 푸른 공원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고 상대의 말소리에만 귀 기울이는 산책이 이어지면서 그 괴리감은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우리는 공원을 1시간 동안 걸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선이 자유로워지자 대화도 자유로워졌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른 체 시간이 흘렀다. 산책과 대화의 시간 속에서 나는 그가 온라인상에 비쳤던 혹은 그가 만들었던 이미지가 완전히 거짓이나 가상의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외모나 겉모습이 풍기는 것과 그의 내면이 가진 것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만남은 다음 만남 또 다음 만남을 약속하는 관계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만남이 늘어날수록 서로에 대한 기대 또한 커져가고 있었다. 기대가 커지면서 다가올 실망도 커져가고 있음을 몰랐다. 그것이 이별로 향하고 과정임을 그와 헤어지고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만남과 이별 사이에는 언제나 기대가 커져가고 있었다.

keyword
월, 금 연재
이전 13화사라졌지만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