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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

[김상욱의 양자 공부] 부제: 입자와 파동 사이

by 글짓는 목수

“우리는 보이는 것만 가지고 이론을 만들지 않는다”

- 아인슈타인 –

입자는 너무 작아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위치와 질량을 가진 존재이다. 파동은 위치를 가지지 않고 질량도 측정할 수 없으며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이 파동으로 많은 정보를 얻고 또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리라는 파동은 정확한 위치와 그 질량을 알 수 없다. 분명 존재한다. 귀에 들렸기 때문이다. 소리(파동)는 과연 존재인가? 양자역학은 그것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모든 곳에 존재하려면 입자가 아닌 파동으로만 가능하다.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비과학적인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럼 과학자는 이제 더 이상 과학적일(기존의) 수 없어야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기존에 축적된 과학적 지식을 지우고 파괴하는 상상을 통해서만 그것에 다가갈 수 있다. 기존의 관념이 새로운 발상의 방해가 된다. 우리는 과학을 맹신하지만 이제 과학자는 비과학적이어야만 과학자가 될 수 있다. 아이러니다.



24년 광안리 불꽃 축제

작년 가을 부산의 광안리 해변에서 불꽃 축제를 봤다. 매년 열리는 해변의 축제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은 그 보이는 아름다운 형상과 그 웅장한 소리를 동시에 감상할 수 없다. 빛의 속도와 파동의 속도 차이에서 발생한 괴리다. 불꽃의 이미지가 먼저 보이고 1~2초 뒤에 소리가 나에게 도착한다. 물리적 공간에서 즉 거시적 공간에서는 입자와 파동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미시의 세계에는 그것이 가능하다.


남녀 같은 거시와 미시 세계


우리는 눈에 보이는 거시 세계에 너무 오랜 시간 익숙해져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가 너무도 낯설다. 거시세계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기존의 가치관을 지워야만 이해할 수 있다. 남자의 뇌와 몸을 가지고 여자의 뇌와 몸처럼 생각하고 느낄 수 없는 것에 비유하면 적절할까? 몇 십 년 동안 남자의 몸으로 살다가 어느 순간 여자의 몸으로 바뀌었다. 혼란스럽다. 뇌는 남자인데 몸은 여자다. 거시세계 (고전) 물리학의 거대한 틀에 양자역학의 집어넣으려니 맞을 리가 없다. 틀도 바꿔야 한다. 완전한 여자가 되려면 생각도 깡그리 다 바꿔야만 한다. 잔재를 지우고 완전히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모든 학문과 지식은 기존의 토대 위에서 쌓아 올라가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20세기에 알아낸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이라는 오랜 시간 쌓아온 물리학의 개념 위에서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 해졌다. 하지만 이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가 가진 초월적인 가능성을 통감한 과학자들은 양자의 세계를 이론과 수식으로 설명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면 세상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건 거시세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이다. 다만 이 이론이 어떻게 현실세계에서 활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만이 남아있다. 지금 전 세계는 풀리지 않는 난제를 풀어낼 열쇠를 가진 양자이론을 컴퓨터에 접목하려 한다. 기하급수적인 다중 현상을 계산하려 한다. 인간은 모든 경우를 모두 경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 인간이 호모데우스가 되는 마지막 열쇠가 아닐까?


존재의 개념의 전환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다. 내가 핸드폰으로 당신과 통화를 하고 있다. 서로 100m 정도 떨어진 공간에서 내가 핸드폰 수화기에 아주 큰 소리로 ‘야’라고 외쳤다. 그럼 당신은 그 즉시 ‘씨발!’ 하며 수화기에서 귀를 떼며 반응할 것이다. 하지만 1초 뒤쯤 멀리서 다시 공기를 통해 ‘야’라는 소리가 작지만 희미하게 들려온다. 미시의 전자들의 세계를 통과해서 온 파동(소리)은 내가 말하는 동시에 당신에게 도달했다. 하지만 물리적 공간을 통해 전달되는 소리는 시간이 걸린다.


이 두 가지 현상에는 또 다른 차이가 있다. 공기 중, 즉 물리적 공간에서 전달되는 소리는 주변에 다른 불특정 다수에게도 함께 전달되며 이것은 통제할 수 없다. 이것을 통제하려면 다른 사람과 그 소리 사이를 진공상태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불가능이다.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를 가두지 않고 진공 상태로 만들 수는 없다. 미세한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야!”라고 외치면 100m 멀리 있는 당신 보다 내 주변 10m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먼저 나를 쳐다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소리를 전기 신호, 즉 전자의 흐름으로 바꾸면 이 소리를 통제할 수 있다. 원하는 곳, 특정한 대상 혹은 장소로 시간의 격차가 거의 없이(왜냐 광속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전달할 수 있다. 지구 반대편 호주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로 말하는 것이 100m 앞에서 터지는 불꽃폭죽의 소리보다 더 빨리 전달된다. 소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우리는 소리를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양자역학을 이해하려면 이 파동(소리)을 존재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질량과 위치를 알 수 없는)을 존재한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바람의 소리 = 성령(파동)


소리는 파동이다. 그런데 빛(광자≒전자, 차이점: 질량유무)도 파동의 형태를 띤다.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실험이 있다. 이중 슬릿 실험이다. 이건 너무 유명해서 양자물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한 번쯤을 들어본 이론일 것이다. 인간이 눈으로 관찰하면 입자로 한 개의 슬릿을 통과해 스크린에 한 개의 줄무늬만 남기지만 관찰자가 없을 때는 파동으로 변신해서 여러 개의 줄무늬를 남기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이건 빛이 파동이어야만 설명이 가능한 현상이다. 동시에 여러 군데 존재한다.

예수의 순간 이동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누가복음] 24:31 -


성경에는 예수의 순간 이동 내용이 타난다. 십자가에 죽고 난 후 부활한 예수가 여기저기 홍길동처럼 순간 이동을 하며 나타나고 사라진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이론으로는 설명 가능한 일이다.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으면 가능하다. 앞에서 설명한 지구 반대편 있는 자를 전화기의 음성으로 듣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의 제자들이 모두 동시에 헛것을 본 것이 아니라면 예수는 빛의 속도로 이동한 것이다. (사실 양자역학에서는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게 두 현상이 동시에 다른 공간에 발생하고 이것은 거리에 상관없이 발생하므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다. 빛이 엄청 빨라도 이동하는데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 말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공기라는 매질을 통과하지 않는, 즉 시간의 지연 없는 양자파동으로 존재한다. 한 명이 아닌 여러 제자들에게 동시에 보였고 그 음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로 이동하고 입자로서 눈에 보이기도 하고 파동(소리)으로서 어디에도 존재하는 것이라 설명할 수 있다. 예수의 형상이 순간이동과 그 형상에서 들리는 음성을 이렇게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신을 빛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를 신과 동일시한다. 그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성부(신, 빛), 성자(예수, 입자), 성령(소리, 파동)의 삼위일체이다.


빛이 입자로서 보이는 거시 세계의 물리적 형상인 예수로 모습으로 나타났고 성령이라는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의 형태로 우리 모두에게 언제 어디서든 동시에 소리(파동) 들릴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 (1901~1976)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전자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가 전자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은 단지 측정장치가 시원치 않아서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그런 것인가? 물론 자신의 이론이 맞으려면 근본적으로 알 수 없어야 한다. 전자의 위치를 아는 것이 왜 근본적으로 불가능할까?”


- [김상욱의 양자공부] 중에서 (104p) -


물리학계에서는 오랜 시간 전자의 위치를 알기 위해 고전해 왔다. 전자와 광자는 질량의 유무라는 기본적 차이가 있다. 질량이 있으면 위치와 속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자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전자가 광자와 같은 양자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물리학계에서 이 전자의 위치(정확한)를 포기했다. 그러니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이것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Heisenberg Uncertainty Principle)이다. 모든 것이 확률적으로만 예측한다. 정확한 위치 값을 알 수 없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명시해야 하는 뉴턴의 고전역학으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양자 세계의 발견은 이제 불확실한 인간의 삶과 미래 그리고 신의 존재와 종교에 대해서도 여지를 남겨줄 수밖에 없다. 물론 양자물리학자들은 이 양자기술로서 이 불확실성을 모두 예측하려는 모순의 과학혁명을 이루려고 한다. 불확정성 원리를 이용해 모든 것(경우의 수)을 알려고 하는 시도이다. 그것을 다 알고자 함은 모든 경우의 수를 알게 된다면 그중 최선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세계의 불확실성은 사라지게 된다. 미지의 영역이 소멸되고 그건 곧 인간이 신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호모사피엔스가 호모데우스가 된 것이다. 그럼 유발하라리는 선지자가 된다.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의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그건 상상의 영역이다.”

- 글짓는 목수 -


서두에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물리학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론으로 만드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이제 보이지 않는 존재(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끝이 무엇일지는 가봐야 안다. 그래서 과학은 계속 발전한다. 끝이 있다면 멈추게 될 것이고 없다면 계속 발전할 것이다. 다만 발전한다고 반드시 행복하다는 보장은 없다. 알게 된 어마어마한 혹은 경이로운 힘을 인간이 어떻게 사용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양심은 뉘앙스가 없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김상욱의 양자 공부] in M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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