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에스터 페렐 - 일곱 번째
“종교적 언어는 심리학 용어로 대체되었고, 죄는 질병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우리는 아픈 사람들이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죄인이 되기보다는 병자가 되고자 한다.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하지만 병자는 치료를 받는다. 재판정에 서서 피고인이 되어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 보다 병원에서 의사 앞에 앉아 병명을 듣는 것이 훨씬 덜 불편할 것이다. 종교적 언어는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심리학 용어는 해마다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며 그 영역을 계속 확장해 나간다.
이제 심리학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이다. 심리학은 전방위적으로 모든 분야의 학문에 걸쳐져 있다. 정신분석학, 뇌과학, 사회심리학, 경제심리학 등등 다양한 분야로 이름만 바꿔서 불리기도 한다. 이건 종교에서 말하는 죄인을 병자로 만들어가는 현대인의 습성이다. 죄인은 돈이 되지 않지만 병자는 돈이 되는 상품이다. 죄인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감옥에 가서 밥만 축내지만 병자는 치료를 받으면서 돈을 내고 여러 사람의 호주머니를 불려준다. 한 명의 정신병자는 의사와 심리치료사 그리고 관련 치료약물을 개발하는 제약사와 그것을 파는 약사들의 배를 불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도록 죄인보다는 더 많은 병자들을 만들어 내어야만 한다. 산업과 경제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병자들이 드글대는 곳이 되어 버렸다.
만약 고대 혹은 중세 시대에 태어났다면 외도와 불륜으로 인해 병원을 찾았을 리가 없다. 발견 즉시 즉결 재판(종교, 사회)으로 사형이나 교수형에 처했을 것이다. 물론 신분에 따라 그 차별대우가 있었을 것이지만 당시의 불륜과 외도는 큰 죄로 여겨졌다. 그래서 감히 그런 불륜과 외도를 함부로 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불륜과 외도는 죽음도 불사한 사랑이었기에 그때의 불륜은 현대의 불륜과는 비교하긴 쉽진 않다. 아마도 더 강력한 사랑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현대의 불륜은 그저 새로운 형태의 경험일 뿐이다. 삶의 활력을 찾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지루하고 권태로운 삶의 탈출구로서 수단일 뿐이다. 만약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모험이라면 아마도 지금 사회에 불륜 커플은 1/10로 아니 1/100로 줄어들 것이다. 간통법이 폐지되고 난 후 불륜이 더 많아진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법과 제도가 인간 본성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현실적인 자제력 혹은 대범함을 억제하는 효과는 분명 있는 듯하다.
변화의 또 다른 방식?! 불륜과 외도
외도가 삶의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는 말이 이해되는가? 누구나 변화를 꿈꾼다. 변화는 성장이고 발전의 가장 중요한 시작이다. 변화하지 않는 자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없다. 모든 국가와 기업 또한 성장을 위해 변화(정책과 전략)를 꾀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개인도 성장을 꿈꾼다. 그 성장에는 두 가지가 있다. 외적 성장과 내적 성장이다. 외적 성장은 물질적인 것이고 내적 성장은 정신적인 것이다. 우리는 둘 다 관심이 크지만 세월이 지나고 물질적 삶이 안정을 찾고 나면 항상 이 정신적 성장을 꿈꾸게 된다. 물질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 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외도는 자기 발견의 한 형태이자 새로운(또는 잃어버린) 정체성의 추구라는 것이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가장 빠른 변화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사는 공간을 바꾸는 것이다. 익숙한 공간과 삶의 터전을 바꾸면 변화는 불가피하기 때문에 변화가 생긴다. 왜냐 익숙하지 않은 낯선 환경은 나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계속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국에 살다가 호주로 가서 살게 되면 그곳의 환경과 관습과 법률에 따라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정신세계를 새롭게 구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두 번째는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환경을 옮기지 않고 변화하는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내가 만나고 관계하는 사람들을 바꾸는 것이다. 익숙한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럼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생각과 행동들을 계속 경험하면서 나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가 생긴다. 이건 멘토 효과이기도 하다. 당신의 주변에 가장 친하고 자주 만나는 지인 5명의 평균이 바로 당신이다. 평균에 변화를 주려면 이 5명을 몽땅 바꿔버리면 된다. 환경을 옮기지 못한다면 이 방법이 그나만 가장 효과적이다. 첫 번째 방법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방법도 따라오기 때문에 변화의 효과는 더욱 크다.
만약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 변화를 꾀하려 한다면 나는 독서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본다. 이건 변화의 속도가 느린 편이지만 가장 안전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환경과 관계를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독서만이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와 다른 환경과 관계를 경험한 다른 인물들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계속 접하는 방식이다. 독서가 습관이 되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관계의 변화 중 가장 빠른 방법 (끌림+장애 = 흥분)
두 번째의 변화 방식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이 바로 이성 간의 관계이다. 만약 이성관계가 큰 장애물이 부딪친다면 그 효과는 더 배가된다. 그것이 바로 불륜 관계이다.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관계이다. 저자는 이 관계를 통해 내 안에 감춰져 있던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발견은 정신적, 육체적 발견을 모두 포함한다. 동성 간의 교류와는 다르다. (물론 동성연애자는 예외이다) 동성 간에는 서로의 정신적 교류를 통해 멘토와 멘티 관계가 될 수는 있지만 육체적으로 감성적으로의 변화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이건 이성 간에 생기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욕 방정식’에 따르면 ‘끌림에 장애물을 더한 것이 흥분의 정도’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이 변화를 이끄는 것은 전두엽의 작용뿐만 아니라 변연계(해마와 편도체)를 반응을 통해 이뤄지는 과정이기에 이 변화는 아주 강렬하고 오래간다. 만약 서로 다른 세계를 살던 상대라면 둘은 사랑이라는 변연계를 자극하는 감성을 통해 서로의 지적, 이성적 영역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은 감정이 실려있는 교류이기 때문에 그 어떤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기억되고 각인된다. 그래서 이 과정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사회적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변화와 성장 방식이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환경적, 관계적(일과 일상의) 혹은 독서를 통한 변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삶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이것이 사회적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장애를 않고 있기 때문에 그 흥분감이 고조되어 편도체를 더욱 자극한다. 편도체의 자극은 해마의 기억 저장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하루 종일 듣고 배운 것보다 불륜의 상대에게서 보고 듣고 느낀 1시간이 더 오랫동안 기억된다. 가령 외국인 이성친구를 사귀면 그 언어가 더 빨리 그리고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것과 같은 논리로 볼 수 있다. 사랑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그 힘은 강력하다.
사람들이 불륜이 나쁜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성장의 갈망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익숙하고 지루한 일상의 부부와 연인 관계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아니 익숙함에 젖어 그 방법을 찾기를 포기한 것일 수도 있다. (둘 다 독서를 열심히 하면 가능할지도… 그럼 부부간 연인 간 대화가 계속 새로울 수 있으니까) 내 안에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 변화라고 본다면 타인과의 관계 그것도 이성관계를 통해서 흥분과 열정을 동반한 변화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그것이 이제 더 이상 범죄가 아닌 환자가 되는 것이라면 병을 얻더라도 치료를 하면 되니까
“병이나 기능 장애의 측면에서만 외도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죄는 그 엄중을 가려 벌을 내리는 과정을 거친다. 그 죄의 원인보다 그 죄의 결과에 집중하고 벌의 크기를 결정하는 정죄(定罪)와 단죄(斷罪)의 과정에 집중한다. 만약 이것을 병이라고 본다면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물을 어떤 것을 써야 할지에 집중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이건 약물을 통한 일시적인 통제에 그칠 뿐이다. 약물을 끊으면 다시 재발한다. 범죄자가 출소하면 다시 재범자가 되는 것과 같다. 세상에 범죄가 끊이지 않는 것은 법치주의로 범죄를 엄벌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이 강력해지면 표면적으로 범죄율을 줄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재범률을 줄이지는 않는다. 이건 새롭게 범죄에 발을 들이는 초범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전과자 즉 유경험자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들은 더 치밀해질 뿐이다.
“외도의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은 이후에 있을 결정의 토대가 된다. 잘못된 곳에서 열쇠를 찾으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다간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결과와 처벌에만 집중하면 현상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그렇다. 언제나 자극적인 결과와 처벌만 떠들어대고 복잡하고 미묘한 과정을 따라 그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이제 처벌을 할 수 없는 병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병자들만 넘쳐나고 그 병이 치유되지 않는 것은 대부분 그것을 제대로 드려다 보려 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모두가 밝은 양지를 바라보며 그 음지에서 벌여지는 현상의 원인은 드려다 보지 않으려 한다. 그저 그 음지가 주는 설명할 수 없는 끌림과 흥분만 계속 쫓을 뿐이다.
죄인은 없고 병자들만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