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제우스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옵니다. 그는 이 제우스의 꼴이 말이 아닌 걸 보고는 가로되, <여자를 조심할지니!>”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
많은 여자를 품은 제우스와 여자가 한 명도 없는 예수, 이 두 명의 신이 세상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욕망의 신과 금욕의 신이다. 둘은 가여운 여인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둘 다 연민을 가진 신이다. 다만 그 연민의 표현이 다를 뿐이다. 육체의 합일을 통해서 그 연민을 표현하는 신과 정신의 정화와 깨달음을 통해 그 연민을 표현하는 신이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완전한 제우스처럼 혹은 완전한 예수처럼 살 수 없다. 둘은 양극단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무엇을 지향점으로 삼을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조르바와 그의 두목은 그 두 신을 대변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당신은 무엇에 더 끌리는가?
[그리스인 조르바], 또다시 읽게 된 고전이었다. 독서 모임이 없었더라면 읽지 못했을 것이다.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었다. 읽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을까? 니코스 카잔차키스, 작가의 파란만장한 인생만큼이나 소설 또한 조르바라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한 인물을 통해서 그 시대에 보편적이지 않은 한 인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 서 있는 작가가 투영된 두목이라는 인물과의 대비를 통해 앞에서 말한 제우스를 중심으로 탄생한 그리스로마신화와 예수를 중심으로 꽃 피운 성경 이야기를 말한다. 이 두 신은 헬레니즘 문화과 기독교 문화의 시작이자 핵심이다.
“하느님이 당신 같았다면, 마리아를 찾아가지도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그리스도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요”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
제우스는 신화 속 신이지만 예수는 역사 속 신이다. 제우스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신이지만 예수는 인간의 몸을 빌려서 태어난 역사 속 존재이다. 인간이면서 또한 신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마치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와도 같다. 예수는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조르바는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느님이 제우스와 같이 여자를 품었기 때문에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이런 위험한 발상은 당시 기독교 사상이 유럽 대륙을 지배하던 시기 스스로의 고난을 자초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피난과도 같은 방랑의 삶을 살게 된다. 또한 그의 그런 방랑자의 삶이 그의 위대한 작품의 거름과 글감이 된 것이기도 했다.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
허리띠 풀기를 멈추지 않았던 제우스는 21명의 아내와 43명의 자녀를 만들었다. 신들의 세계를 아주 풍성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인간과의 결합으로 반신반인 그리고 님프족(정령)과 같은 다른 종족 세계까지 만들어내며 신과 인간과 정령들이 공존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를 만들었다. 이 모든 세계의 창조에는 제우스의 허리띠가 자주 풀렸기 때문이었다. 조르바는 본성을 따르는 삶이 말썽거리를 만들지만 그것들을 해결하고 헤쳐나가는 과정이 삶이라 얘기한다. 그리스신화 속의 이야기처럼 끊임없이 생겨나는 암투, 연애, 영웅, 모험, 괴물 같은 것들이 신화 속 이야기를 다채롭고 흥미롭게 만들어 간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아무런 이야기도 없다. 인간의 역사도 그렇지 않은가?
예수 = 브라흐만 + 시바 + 비슈누
예수라는 존재는 그런 문제를 만들려 하지 않는 존재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힌두교 수호의 신 비슈누와 같아 보인다. 그가 나타남으로써 구약(기득권)의 세계와 충돌하는 모습은 또한 파괴의 신인 시바와도 같아 보인다. 시바이면서 비슈누이다. 또한 천지를 창조한 브라흐만처럼 하나님과 한 몸이라고 하니 브라흐만도 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는 힌두교로 치면 브라흐만+시바+비슈누=예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인도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할 수 없을 법도 하다. 어찌 모든 것을 다 가진 단 말인가? 힌두교와 그리스로마신화 속의 신들은 개성을 가진 신이지 모든 것을 다 지닌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신도 인간처럼 특정한 개성을 지니고 그것에 특화되어 비범함을 지닌 존재이다. 물론 예수는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전지전능한 신의 아들이 인간들 앞에서 힘없이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라는 논리이다. 어찌 인간이 신의 마음을 이해하리오.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처럼 힘으로 현상 변경을 꾀하지 않는다. 제자들에게 배신과 버림을 받고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다.
"제 구시 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마태복음] 27:46 -
예수도 육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과 하나인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듯 말한다. 왜 그랬을까? 제우스처럼 힘과 능력을 주셨음에도 쓰지 못하게 하고 죽음을 모른 체 하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예수의 저 외침은 너무도 미스터리하다. 해석의 여지가 너무 분분하다. 물론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힘(영생)을 얻은 것이다. 전 세계의 1/3의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믿는다. 그가 만약 역사 속 수많은 왕들처럼 군중을 이끌고 다시 후일을 도모하는 역사를 이루었다면 그저 역사 속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칭기즈칸과 같은 왕 중에 한 명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서 후대의 수많은 인간들의 정신 속에 살아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영생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죽어야 산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육체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남아 길이길이 살아있는 것이 영생이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
소설 속 두목이라는 인물은 마치 예수와 같아 보인다. 조르바는 그런 젊은 두목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한다. 사랑을 글로 배우려는 모습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는 절제와 금욕 속에서 끊임없이 글을 쓰며 이성적인 생각으로 무장한 모습이다. 그리고 두목은 또한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예수처럼 금욕과 절제하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 [요한복음] 13:34 -
예수도 사랑하라고 그렇게 외쳐댔지만 예수는 마음으로만 사랑하고 육체적으로 사랑하지는 않았다. 육체적 사랑이 성관계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반쪽으로만 사랑했다. 자신이 반쪽 사랑을 하면서 대중에게 온전한 사랑을 하라고 말하는 모습이 모순적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모순이라 생각지 않는다. 왜냐 그는 신이기 때문이다. 제우스처럼 난잡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고 여자와 육체적을 엮이게 되면 재앙이 올 것처럼 생각한다. 순결한 신으로 남으려면 여자와 관계를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제우스와 차별되는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만약 20명의 아내를 품고 42명까지의 자녀만 낳고 죽었다면 제우스의 그림자에 가려 몇 명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 중 한 명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독신의 길을 선택한 것인가? 제우스와의 차별화 전략인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그리스 신화는 각자 개성이 독특한 수많은 신들이 어우러져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신화 속의 신은 다들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각각의 스토리를 지닌다. 신마다 고유의 이야기들이 있다. 물론 신들끼리 영향을 미치고 간섭도 하지만 각각이 자신 이야기의 주연 배우들이다. 반면 성경 구약에서는 특정 인물(선지자, 예언자)들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고 집단행동을 한다. 그것이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예수라는 하나의 인물로 통합된다. 예수 이후부터는 그 많던 선지자들은 모두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주의 이야기이다. 유일신과 소통하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물론 그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소망으로 사람들과 연결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분명 예수가 핵심 주연이고 다른 모든 인물들은 조연이다.
그리스 신화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에 있고 이것은 지금의 개인주의 문화의 시작이다. 성경(구약)의 이야기는 기독교를 비롯해 유대교와 이슬람같이 집단주의 종교의 모태가 된다. 이건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국민과 국가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 다 필요하다. 개인 없는 공동체란 없고 국민 없는 국가란 없다. 이 두 문화는 끊임없이 충돌해 왔지만 대부분의 인류의 역사는 집단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기독교 문화가 꽃피운 이유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 세계 인구의 55%가 넘는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종교를 가진 국가들이 대부분 강력한 국력을 지닌 국가로 성장했다. 국가와 공동체가 우선되는 가치관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은 비록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것은 국력강화와 왕권강화(중앙집권)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결코 예수를 향한 믿음이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아폴론(태양신) 신전에 기도하는 인간이었다. 종교가 정치에 이용된 것뿐이었다. 물론 나중에 그리스 신화를 로마 신화로 리메이크해서 퍼뜨린 것은 개인의 역량(개성)을 끌어내기 위해서 개인주의의 문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영리했다. 덕분에 로마 제국은 역사에서 유럽을 가장 오랜 시간 지배할 수 있었다. 지금의 미국처럼…
“가시내는 머스마에게, 머스마는 가시내에게”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이다. 조르바는 금욕과 수행을 통해 이성을 유혹을 뿌리치는 예수와 부처 같은 수도승들을 경멸한다. 조르바는 천국의 길은 금욕과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 여자라고 말한다. 물론 여자에게는 남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자(이윤기)는 이 부분을 경상도 사투리로 코믹스럽게 표현했다. 난봉꾼 조르바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조르바는 끊임없이 여자를 만나고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사랑 나누기를 멈추지 않는다. 특히 가여운 처지에 있는 과부와 같은 여성들에게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민다. 그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그는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여자를 탐하는 탐욕의 권력형 성욕자들과는 다르다. 현재의 여자에게만 충실한다.
우리는 한 여자와 한 남자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개념이 책임과 정착을 의미하지만 조르바는 책임질 수 없는 방랑의 삶을 사는 자이다. 그냥 매 순간에 집중하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헌신적으로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냥 현재를 사랑만 할 뿐이다. 우리가 쉽게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무언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정착해야 하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점차 개인주의로 변하며 사랑도 함께 멀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군가는 책임지면서 사랑을 하지만 책임지는 자와 사랑하는 자가 나눠지기도 한다. 정착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이 가진 사랑의 딜레마이다. 집단적 기독교적 굴레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신들처럼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지만 또한 금욕해야 하는 모순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와 두목의 모습을 통해 그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동의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