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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과 희극 사이

[그 개와 혁명] 예소연

by 글짓는 목수

“공여사 자중하시오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


-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중에서 -


너무 오랜 세월 관습화된 제도를 바꾸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것이 누군가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는 것이기 때문은 아니다. 살아생전 고인이 좋아했던 개를 장례식장에 데려와서 벌어지는 장난판 아니 개판이 된 식장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온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슬픈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이 인상적이다. 딸이 아버지에 빙의해 던진 저 대사는 젊은 시절 남녀가 함께 민주화를 위해 앞장섰던 그 난장판의 시위 현장을 엄마에게 떠올리게 함이었다. 혁명은 언제나 어지럽고 익숙하지 않은 혼란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낯설고 혼란한 상황을 겪지 않는다면 혁명은 오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항상 혁명과 혁신을 통해 한 단계 앞으로 나가가는 법이다.


그것을 막으려는 자와 그것을 이루려는 자들은 항상 대립하고 갈등하지만 이건 시간의 문제일 뿐 결코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강이 굽이쳐도 절대 역류하지 않는 법이다. 인간의 의식의 변화가 이끌어낸 행동은 현실의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 한 계속된다. 국가와 사회는 법과 제도와 공권력으로 그 변화를 늦출 수는 있지만 결코 막을 수는 없다. 변화하지 않는 인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켜려는 것이 모든 것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


[설국]은 뒷전

도서관에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다. 읽던 책[설국]을 덮고 눈길을 사로잡은 책을 읽게 된다. 도서관에서 책읽기는 항상 한 눈 팔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책이 둘러 쌓인 곳은 유혹이 많다. 작년 말 나도 열심히 소설을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러 편의 단편 소설을 쓰고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쓴 잔을 마셔야 했다. 몇 명의 권위자에게 나의 소설을 평가받고 인정받아야만 소설가라는 명함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다. 어쩌면 나는 내 소설을 몇 명의 권위자가 아닌 대중한테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소수자에 의해 나의 글의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 씁쓸하지만 한국의 문학계는 이 관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작가로 인정받기가 여느 다른 나라들 보다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작가의 꿈을 꾸는 자들은 다들 등단에 목매어한다. 사실 등단이라는 것은 작가의 삶에서 보면 그저 시작일 뿐이다. 이제 문학 세계에서 명함을 내민 것뿐이다. 물론 등단 이전부터 오랜 세월 글을 써온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말이다. 등단은 필력을 증명하는 과정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등단 작가는 모두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남겨야 맞다. 필력 있는 기성 작가는 많다. 등단작가는 그 가능성을 발견한 작가이지 그 가능성이 대중에게 입증된 작가는 아니다.

예소연과 김애란 - 최연소 [이상문학상] 수상자

[이상문학상] 문학계에서도 아주 권위 있는 상이다. 예소연(92년생)은 최연소 이상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최근 문학계는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중인 듯하다. 80년대와 90년대 생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이제 인생의 중반부를 지나가는 그들의 글은 현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담겨 있다. 예소연, 그녀의 입상작 [그 개와 혁명]도 MZ 세대가 바라본 세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듯하다. 그녀와 같은 나이에 이 상을 받은 자가 김애란 작가다. [이상문학상]의 최연소 작가가 둘이 되었다. (띠) 동갑의 세대교체인가?


“현재의 시대상을 개인사를 통해서 잘 읽어낸 작품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난 후 든 나의 소감이다. 그녀는 자신의 슬픈 개인사에 허구를 살짝 덧씌워서 쓴 자전적 소설이었다. 모든 소설의 시작이 이와 비슷하다. 소설가의 세계로의 입문은 자전적 소설이 대부분이다. 글쓰기의 시작이 일기인 것과 같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쓴 소설은 비록 허구일지라도 진솔하고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 뒤에 밀어닥친 슬픔을 글로서 토해내는 과정에서 이 소설이 탄생했다고 밝혔다. 개인적인 비극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낸 케이스이다.

봉준호 감독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 봉준호 감독 -


억지로 꾸며낸 글은 티가 나기 마련이다. 글은 무의식에서 토해내 듯이 쓸 때 그 안에 진정성이라는 것이 담긴다. 허구가 진정성을 담는다는 말이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식적으로 세상에 자신을 모습을 드러내듯이 소설가는 허구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둘 다 가짜지만 후자는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가짜이다. 가식과 허구는 현실과 비현실에서 거짓이지만 가식은 진실을 가리려는 것이고 허구는 진실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것의 진실 여부 판단은 독자 개개인의 몫이다. 각자 자신의 삶의 방향과 잣대가 되어 주는 인생 소설, 인생 영화, 인생 노래가 있지 않은가? 이건 모두가 다르다.

한 개인의 아픔이 진솔하게 혹은 풍자적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대중들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줄 수 있다. 나의 아픔을 남들에게 왜 드러낼까? 이건 아픔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물론 누군가는 그 아픔을 후벼 파는 자도 있겠지만 작가는 글을 통해 그것들을 상상과 함께 밖으로 내보내는 과정이 바로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이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그것을 잘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비극적 요소를 가지지 않은 고전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고전은 비극이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왜 개인의 비극과 불행을 드려다 봐야 하는가? 그건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삭막하고 냉혹해질 수밖에 없다. 그건 바로 타인의 비극을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대인 감수성이 떨어지는 국민들은 결국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와 공감의 대상이 아닌 경쟁과 제거의 대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한가하게 문학 소설이나 읽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직도 여전히 나는 문학보다는 비문학을 더 선호한다. 그건 너무 오랜 시간 그렇게 훈련되어 온 탓이다. 과거 성공학 실용서와 자기 계발서만 탐독하던 나였다. 읽고 나면 마치 생각이 깨친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했지만 여전히 내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 기본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성공한 자들의 책들만 탐독했기 때문이리라.


관계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세상이다. 갖가지 처세술의 습득과 실용적인 능력의 개발이 중요하다지만 결국 그것들도 감정을 가진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던가? 단기적으로 전략과 전술로 타인을 설득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이해와 공감이 없는 관계는 당신이 가진 명함이 사라지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비극과 희극 사이


너와 내가 서로의 아픔을 한 편의 아름다운 혹은 웃긴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함께 읽으며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칸트는 진리를 깨우치고 선을 행하며 종국에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가장 숭고한 일이라고 봤다. 삶이 고통이라고 많은 철학자들이 말했다. 하지만 이 비극과 같은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비극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니체도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을 탐구하는 철학은 예술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삶에 예술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이다.


서로가 감추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들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것들이 자신의 밖으로 드러남으로써 더 많은 이들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네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 형태와 모습은 각양각색이지만 각자가 가진 아픔의 본질은 같고 모두가 그것들을 품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좀 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짧은 단편 소설이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개인적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비극을 숨기고만 사는 자들은 비극에 빠져 살지만 비극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자는 삶을 희극으로 바꿔갈 수 있다.


비극과 희극은 결국 나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이상문학상 대상 - [그 개와 혁명] 예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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