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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공유 사이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에스터 페렐 -여섯 번째 -

by 글짓는 목수 Mar 30. 2025

“소유라는 가부장적 개념에서 비롯된 질투는 분명 재검토해야 한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무소유를 실천하며 산다는 건 너무 어렵다. 당신이 법정스님처럼 살 길 원한다면 절로 가야 한다. 절로 간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물질문명 세상이다. 물질문명은 계속 이 물질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소비하고 또 생산하는 방식으로 성장한다. 이것이 경제발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 물질의 자극에 노출되고 계속 소유하려는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끝없이 소유하려는 욕망과 소유하지 않으려는 체념 사이에 또 다른 대체재가 있다. 그건 바로 공유이다. 공유경제는 우리 안에 깊숙이 들어왔다. 당근 마켓 이용자 수가 4000만을 넘어섰다. 이제 이 앱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정도이다. 내가 쓰던 물건을 다른 이들과 공유한다. 그런데 물질을 공유한다는 생각은 이제 보편화되었지만 이것이 물질이 아닌 사랑과 같은 것도 가능할까? 나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므로 나는 공유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독점적 소유관계에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버려지고 방치되는 것이 되기보다는 그것이 필요한 자에게 공유됨으로써 그것이 다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아주 필요하고 소중한 것일 수 있다. 당신은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소유되고 싶은가? 아니면 공유하고 공유되고 싶은가? 사랑의 공유경제도 가능한 것인가? 




  에스터 페렐의 책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민감하지만 문제들을 거침없이 끄집어낸다. 책이 흥미로운데 책장이 빨리 넘어가지 않는 이유는 행간에서 피어오르는 상념들과 질문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소 충격적이고 또한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보와 사례들을 읽으면서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지만 많은 남녀가 은밀히 하고 있는 고민들을 엿보는 것이 흥미롭다. 우연히 독서 모임에서 선정한 책이라 생각 없이 집어 들었는데 생각이 너무 많아진다. 그리고 과연 이 책의 주제들로 남녀가 섞여서 토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할 수도 그렇다고 가식적일 수도 없는 주제이다. 언제나 이런 성과 관련된 주제는 공론화하기가 껄끄럽다. 그리고 이건 그 어떤 명쾌한 답을 얻기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린다. 조용한 곳에서 두 사람이 나눌 수 있을 주제일 수는 있지만 다수가 함께 토론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서론이 길었다.


“컴퍼션(Compersion), 자신의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성적으로 접촉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행복감이다. “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남녀의 사랑(정신적, 육체적)을 공유한다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저자는 사람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이 질투가 서로의 관계를 파국으로 이끌어 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질투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다면 관계의 회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한다.


  불륜과 외도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만들지만 만약 서로의 합의하에 독점적 관계를 해제한다면 피해자와 가해자는 사라져 버린다. 물론 이건 서로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가 가장 큰 문제이고 또한 이 합의는 대외적으로 공개적일 수는 없다. 보편적 인식 밖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둘 만의 합의이다. 하지만 부부와 연인의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임으로 이것까지 사회과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 물론 서로의 합의가 없이 이뤄진 불륜과 외도는 피해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외력(법과 도덕)을 개입시켜 이 자신이 입은 피해를 보상받으려 할 것이다. 복수심이다. 복수는 “공평해지려는” 피해자의 노력이다. 누구나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연인 혹은 부부라면 이런 상황을 원치 않을 것이다.


“바람을 피우기로 선택한 사람은 둘 중 하나지만, 대부분의 경우 외도의 책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 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이런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은 어느 한쪽의 전적인 책임으로 볼 수는 없다. 서로가 악화되어 가는 관계 개선과 회복을 위한 시도와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부재’로 인한 삶의 권태가 누군가는 그냥 익숙한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고 누군가에게 다른 사랑을 통해서라도 탈출해야 할 고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가 상대에게 각자의 다른 사랑을 찾아가는 것에 합의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건 아주 민감한 사안이지만 피해자와 가해자를 만들지 않고 서로의 권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이런 합의를 거절한다면 당장 문제는 해결되지도 악화되지도 않는다. 이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 서로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런 제안 입 밖으로 내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자 모험이다. 하지만 권태로운 서로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서로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는 너무 많은 요소(재산, 자녀, 가족과의 관계, 사회적 시선 등등)들로 인해 갈라설 수 없다. 서로를 증오하거나 혐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과거 사랑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서로의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데 있어서 이렇게 익숙한 상대도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맞춰서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의 생활 패턴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는 두 사람이 너무 잘 알고 있다. 다시 또 그런 일을 치른다는 것은 어쩌면 미친 짓일 수 있다. 


  이런 익숙함과 편안한 일상을 유지하면서 또 다른 삶의 활력을 느끼고 싶다. 연애할 때의 그런 감정 상태가 삶에 얼마나 큰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는지는 과거 서로가 타올랐던 연애초기를 떠올려 보면 너무도 필요함을 느낀다.  서로에게서 그런 것을 다시 느끼기엔 현실의 삶이 만들어낸 많은 복잡하고 계산적이고 너저분한 것들이 만들어낸 감정들에 오염되어 더 이상 정화되기 쉽지 않다. 오염된 나의 순수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회복되려면 다른 새로운 물이 유입되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면 정화된다. 


“사회적으로 독점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도 자신이 상대의 섹슈얼리티를 소유할 수는 없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이제 법적인 소유관계와 신체와 정신의 소유관계는 분리되었다. 간통죄의 폐지(2015년)가 아마 이것의 신호탄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건 형사상의 문제이고 그렇다고 민사상의 불이익은 피할 수 없다. 피해자가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금전적, 물질적 피해 보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불륜의 사랑이 공공연해진 것은 법제도의 변화가 큰 몫을 하기도 했다. 법으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은 전통적 결혼관의 유지보다 개인의 인권이 더 우선되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다. 사람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이 물질이 아닌 이상 소유한다는 개념은 맞지 않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내도 드라마를 보며 남편과는 완전히 다른 남자를 꿈꾸고 남편도 포르노에 나오는 아내와는 다른 여성을 보고 흥분하는 것은 부끄럽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려는 행위로 이어지냐 아니냐의 문제가 남는다. 이제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도 처벌할 수 없다. 처벌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할 수 없는 건 이런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부도덕한 행위라는 것을 대부분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만남을 이어 가는 커플들이 질투 같은 불안한 감정보다는 단조로움과 습관화 때문에 더욱 고통받는 이 세계에서, 에로스의 분노인 질투는 우리가 그에 따르는 취약성을 견뎌 낼 의지만 있다면 관계에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 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남녀는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민주적인 합의 시스템을 합의가 적용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까지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처주기 싫은 미안함과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갈망이 절충안을 생각해 냈다. 사회적 관계(부부)를 유지하고 감성적 관계(연인) 오고 가는 새로운 남녀관계가 생겨났다. 다자연애자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기존의 권태에 빠져 있던 부부관계에 지나치지 않은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서로의 긴장상태를 불러일으켜 가정생활에도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겠지만 이제 사람들은 어차피 서로가 권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런 방법까지 시도해 보려 한다는 것이다. 둘만의 은밀한 문제이며 법적으로도 문제 되지 않으며 서로가 그것을 솔직히 털어놓고 얘기한다는 것이 관계 회복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삶이 어찌 될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부와 연인 둘만의 문제를 둘이서 원만하게 대화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건 결혼제도와 가정이라는 공동체 유지 그리고 개인의 사랑과 행복추구권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남녀관계로 정착할 수 있을까? 사랑은 이제 소유가 아닌 공유의 시대로 가는 것인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랑은 소유인가 공유인가?


[The state of Affairs] Esther Perel[The state of Affairs] Esther Pe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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