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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기만과 자기 방어 사이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에스터 페렐 - 네 번째 -

by 글짓는 목수

“우리는 타인을 기만하는데 익숙해져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기만하게 된다”

“We are so accustomed to disguise ourselves to others, that in the end, we become disguised to ourselves.”


- 라 로시푸코, Franç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 –


잠시의 위기와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우리는 종종 기만 전략을 사용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자기기만은 필수적이다. 기만에는 경중이 있겠지만 그 경중은 자신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자신을 포장하고 과장하고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를 얻어야만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세상 아니던가. 그렇다면 화장도 포장도 과장도 없는 모습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일종의 자기기만적인 태도로 타인을 기만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기만으로 만들어진 자신을 자기인 줄 알며 살아간다. 거짓으로 만들어진 자신이 내가 되어버린다.



the sight of a wife who discovered her husband's affair

“명백한 증거가 눈앞에 있을 때조차 현실이 산산조각 날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 자기 현실 인식에 매달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중략…) 이러한 종류의 회피는 바보 같은 행동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 에스더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p124 –

누군가를 속이는 것은 나쁜 것이다. 누군가에게 속임을 당했다.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말이다. 그럼 당신은 어떤 기분이 드는가? 처음 마주하는 감정은 분노일 것이다. 믿었던 상대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분노의 감정으로 나타난다. 만약 당신이 아주 감성적인 아니 감정적인 인간이라면 그 즉시 분노의 감정을 상대에게 표출하려 할 것이다. 순수한 사람이다. 태초에 때 묻지 않은 사피엔스가 아닐까? 이런 사람은 드물다. 이성을 장착하고 사회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섣불리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분노의 감정이 누그러 뜨리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뒤따른다.

Love affair in dark

이성적인 사람은 사랑을 감정 상태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사전적 정의, 철학적 정의가 있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사랑의 정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사랑은 감정이 절대적이다. 어쨌든 이 사랑이든 사랑이 만든 믿음이든 모두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매 한 가지이다. 우정이라는 믿음이 깨져도 분노가 치미는 것은 같다. 다만 남녀 간의 그것보다는 좀 덜한 것 같다. 치정이 더 무서운 이유이다. 모든 비극에는 남녀 간의 사랑이 빠지지 않는 이유이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종합선물 세트를 불러내는데 남녀 간의 사랑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당신이 상대의 외도를 발견하고 나서 이 사태가 순식간에 해결 혹은 파국으로 가지 않은 것은 사랑으로 인한 정확히는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적 결합으로 인해 벌어질 경제적 물질적 관계적인 현상 변경에 대한 생각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짱구를 굴리기 때문이다. 외도의 발견은 사랑의 식었다는 판단보다 과거 둘의 사랑이 만든 믿음의 고리가 깨졌다는 해석이 더 어울린다.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다. 결혼은 사랑보다 신뢰를 우선한다. 사랑이 식었다고 바로 계약이 파기되지는 않는다. 연애와는 다르다. 물론 불륜은 계약파기의 가장 큰 사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냉정한 사람은 이 감정을 분리시켜서 생각한다.


믿음의 상실과 계약의 파기는 분리된다.


믿음과 계약이 분리된다. 믿음의 사라졌지만 계약은 유지된다. 우리가 신앙이 없어도 종교를 가지는 것과 같다. 신을 믿지 않아도 교회에 나갈 수 있다. 그건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 아니던가? 교회라는 사교공간 안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활동을 하는 이유이다.

불륜의 관계

불륜이 일으키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들이 바로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진다. 오랜 시간 평온한 부부(남들 보기에)의 관계로 살아온 남녀는 존경받을 만하다. 그 원만한 부부관계가 만들어진 것은 서로가 이해하고 타협하는 과정들을 수 없이 겪었다는 의미이다. 갈등과 고민 없는 부부는 없다. 그건 결혼 계약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 속에서 사랑이 점점 식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결혼은 더 이상 서로를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사랑은 상상에서 시작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왜 결혼 후 사랑이 식는지가 이해될 것이다. 우리는 소유한 것은 상상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했기에 그 과정을 감수하는 것이다. 사랑이 믿음을 만든 것이다. 사랑이 희생해서 믿음을 만들었다. 예수가 우리를 사랑했기에 우리에게 믿음이 생긴 것과 같다. 사랑이 우정과 같은 믿음으로 그 형태를 바꿔서 부부의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이런 부부의 노력이 이뤄내는 성과가 적지 않다.

자녀와 재산 그리고 수많은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결혼은 많은 것들과 연결되고 융합되는 과정이다. 나의 몸에 더 많은 호스가 연결된다. 내가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 많아짐을 의미한다. 혼자 일 때 보다 두 세배는 많은 연결 고리가 생겨난다. 그건 결혼이 둘 만의 문제가 아닌 가족 간의 결합이라는 전통적 결혼의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의 동기였던 사랑이 식고 믿음까지 불륜으로 깨져버렸다.


인간이 사랑과 믿음이 사라지면 아무리 현실의 삶이 풍요롭더라도 그 삶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믿음이 삶을 지탱하는데 아주 큰 작용을 한다. 또한 이런 기존의 현실적인 조건들과 관계를 포기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이뤄놓은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상대에 대한 배신감과 미움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기가 억울하고 두렵다. 그래서 차선책을 생각한다.

Cheating each other

“인간의 정신은 일관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견고한 삶의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정보는 무시해 버린다. 이런 특성은 친하거나 의존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할 때 자주 나타난다”

- 에스더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말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때문에 불륜이 또 다른 불륜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잃어버린 사랑과 믿음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믿음이 컸던 만큼 그 빈자리의 공허함은 클 수밖에 없다. 쉽지 않지만 다른 사랑과 믿음으로 채워야 한다. 상대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너무 커서 불륜을 알고 난 후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면 분리를 시도하겠지만 그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을 찾고 무관심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 사랑과 믿음을 다른 장소에서 다른 상대를 통해 회복할 수 있다. 그럼 또 다른 불륜이 시작된다. 불륜이 증식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말이 여기에 어울릴까?


기만, 부와 권력의 유지 수단


이건 비단 남녀 간의 불륜에서만 보이는 현상은 아니다. 부부가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그 동안 쌓아 올린 성(물질)을 무너뜨리지 않듯이 기만으로 시작해서 쌓아온 부와 권력 또한 무너뜨릴 수 없다. 기만전술을 이용해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다면 기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고위층 기득권이 보여주는 모습이 그와 같지 않은가? 사실 기만전술은 사회와 기업을 유지하는데 불가피한 전략이다. 손자병법에서 그걸 잘 설명해주고 있다. 상대를 기만해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 그것이 전쟁에서 가장 현명한 전략이다. 솔직한 내 패를 다 드러내는 상대는 전쟁터에서 처절한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a politician who deceives the people

우리는 경중에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모두가 조금씩 자기기만을 가지고 있다. 이건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작동한다.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가면(페르소나)과도 같다. 민낯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다만 그 민낯을 아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자가 바로 당신의 배우자이다. 삶의 동반자이다. 민낯을 보고 난 후 계속 사랑하기 힘든 것은 우리가 기만과 꾸밈에 익숙해진 세상에 너무 오랜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닐까? 결혼을 통해 삶의 공간을 함께 하면서 드러나는 상대의 민낯에 대부분 상처받고 실망하게 된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자 또한 배우자 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의 민낯과 은밀한 치부를 공유하는 것은 그 때문 아니겠는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관계가 서로의 비밀을 숨기는 관계로의 전환이 불륜의 시작이다.


사회적 관계는 이런 남녀 혹은 가족과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민낯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서로가 경중에 차이는 있지만 기만적인 태도를 가지고 서로를 대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좋게 표현하면 예의와 격식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당신이 혼자 있을 때는 예의와 격식을 차리지 않으며 가족 사이에서는 이 예의와 격식은 종종 생략되고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상처받는 것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에도 지켜야 할 예의(부부유별: 夫婦有別)가 있다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서 이것을 무시하면 당신도 사회적으로 무시당할 수 있다.

자기 방어를 위한 자기 기만

자기 기만과 자기 방어


문제는 기만이 도가 지나치거나 악한 자가 기만 없이 민낯을 드러내는 경우이다. 보통은 기만을 많이 이용하는 자와 민낯을 쉽게 드러내는 자는 같은 경우가 많다. 기만은 기만을 낳는다고 했다. 상대의 기만에 익숙해진 자는 자신도 그들과 닮아간다. 부부가 서로 기만하게 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기만으로 가득찬 공동체 안에 들어가면 그들 사이에는 민낯이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당신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일터일 가능성이 크다. 기만하는 자들의 관계는 대부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이다. 심리학적으로 사디즘과 마조히즘관계와도 같다.


그런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쌓아 올린 부와 권력의 성전이 크면 클수록 이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지켜야 할 게 많아서이다. 자기 방어이다. 그럼 믿음이 아닌 맹목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전락해 버린다. 기만은 계속 커져갈 수밖에 없다. 종국에는 거짓과 진실의 구분이 사라진다. 기만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그런 인물들을 알고 있다. 그런 집단이 저지는 만행은 많은 이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자기 기만이 자기 방어 기제처럼 작동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가 현실을 살아감에 자기기만 없이 사는 것도 어렵지만 기만이 삶을 지배하게 놔두어서도 안 된다.


기만(자기 & 타인)은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부정적이고 냉소적이고 잔인하게 드러난다. 그것들이 나를 지배하고 내 안에 긍정과 따뜻함과 선함은 서서히 자취를 감춰버린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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