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고 순결한 존재에 관하여...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
- [마태복음] 10:16, [도마복음] 39:3 -
비둘기는 더 이상 순결한 존재가 아니다.
비둘기를 좋아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도시의 비둘기들은 기피와 불결함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인간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 먹으면서 번식한다. 도시 문명에 길들여진 비둘기를 보면서 순결을 떠올리긴 힘들다. 과거 예수가 살던 시기의 비둘기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서두의 구절에 비둘기 대신 아이로 바꾸면 어떨까? 갓난아이는 순결함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아이도 비둘기처럼 자라나면서 불순한 존재로 변해간다. 때 묻지 않은 어른이 있는가. 아기는 지혜로울 수 없다. 세상에 갓 나온 존재는 순수하고 순결하다. 우리는 아기를 보고 순결함을 느끼지만 그 순간부터 아기는 순결함을 잃어간다. 부모의 그림자가 아기에게 묻어나기 시작한다. 부모는 마땅히 그때를 묻혀야만 한다. 그래야 아기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때 묻지 않고 순수와 순결을 간직하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그 누가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살 수 있는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아이예요”
얼마 전 독서토론 모임이 끝나고 니체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超人: 우버멘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 남성분께서 어떻게 아이처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냐고 말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3, 누가복음 18:17, 마가복음 10:15, 도마복음 22:2]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는 모두 이 구절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과거 나도 이 구절이 왜 이렇게 강조되는 것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성경에는 아이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 얘기하고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는 곳은 없었다. 그리고 여태껏 예배당에서 들은 수많은 설교 중에서 이것을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는 목회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운이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이유를 다른 철학서와 인문서 그리고 문학 속에서 찾았다. 성경에만 갇혀서 말하는 자들은 성경 밖에 있는 자들을 이해시키지 못한다. 성경만 읽으면 신앙이 생긴다는 말을 하는 목회자들을 보면 나는 이해를 할 수 없다. 난 오히려 성경 밖에서 받은 감동과 궁금증이 성경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믿음 같은 것이 생겨났다. 예수의 수제자는 12명이었다. 모두 다른 성격과 성향을 가졌다. 한국의 교회는 베드로만 원하는 것 같다. 베드로는 첫 번째 제자이고 맹목적인 믿음의 상징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예수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 [요한복음 20:29] -
물론 보지 않고 만져보지 않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복이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가 가장 복 받은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베드로가 아닌 마태나 누가 그리고 바울과 같은 깨우친 지식인들이 쓴 글이다. 베드로가 반석(주춧돌)이었지만 그는 무지했다. 현대의 과학과 문명의 발전은 사람들에게 지식과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하게 만들었다. 그런 자들에게 아직도 베드로와 같은 방식의 신앙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런 믿음을 바라며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공부하기를 게을리하는 자일 것이다. 자신의 무지함을 들키지 않으려면 듣는 자들이 무지해야만 한다. 지식으로 신앙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적 호기심이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예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제자들마다 맞춤형 가르침이 가능한 스승이었다. 그랬기에 그 많은 다양한 제자들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경만 본다는 것은 깊은 우물에 빠져서 우물 밖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은 시대상이 반영되지 않은 고전 중에 고전이다. 현대적 관점과 우리의 현실의 삶과 연결해야 한다. 세상의 많은 지식(과학, 철학, 문학, 예술)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그런 것 보다 다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그들에겐 공부와 목회 두 가지만 해도 벅찬 인생이 되어야 하지만 다른 것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려는 듯하다. 신앙의 길을 가는 종교인이 왜 그렇게 세속의 것들(정치, 부귀, 명예)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
목회자는 예수가 아니다. 예수야 깨우친 자이고 성자이기에 더 이상의 공부가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무지한 인간은 끊임없이 배우고 세상 만물의 지식이 성경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 젊은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노년으로 가득한 이유는 그 때문 아니겠는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노년은 깨우침보다 천국에 가고 싶은 믿음과 소망만 심어주면 되기에 쉽다. 죽음이 다가오면 사람은 간절함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 내가 나가는 교회에도 대부분 노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다. 활기차고 열정적인 기운으로 가득 차야 할 예배당에 노년의 연약함만 가득하다. 그곳에 젊음과 생기가 섞여야 하지만 젊음의 열정은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아마도 돈과 지위와 쾌락 같은 것이 아닐까? 어른들이 그들을 잘못 가르치고 인도한 탓이다. 현재의 세상 시스템과 환경은 과거의 어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던가? 젊은이들을 탓할 수가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뭐가 중요한 것인지 누구를 통해 배웠는지 우리들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연약한 아기는 순수하게 태어나 부모와 학교와 사회와 국가에 의해서 때 묻는다고 말했다. 때가 묻지 않을 수는 없지만 때가 묻어도 그것을 스스로 씻어낼 수 있을 정화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때를 묻히면서 지혜는 가르치지 않았다.
주여!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 라인홀트 니부어의 평온 기도문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도문이다. 순수하게 태어난 존재가 그 순수함을 잃지 않고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부모, 사회, 국가)이 묻힌 때가 이로운 것인지 해로운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 갈라져 싸움만 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힘들다고 포기한다.
아이와 뱀이 한 몸에 있다는 모순적인 모습을 상상할 수 없지만 신이 만든 세상이 모순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 모순적인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모순적이어야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이중적이어야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모순이 선한 양심에 근거해야 한다. 아이와 같은 따뜻한 순수함과 뱀과 같은 냉철한 지혜를 가지려 노력을 해야 한다. 지혜는 배움에서 온다. 지식이 반드시 지혜가 되 지는 않지만 지식 없는 지혜는 있을 수 없다. 그럼 배움을 어디서 얻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가장 친한 지인 3명의 평균이 나다”
어리석은 자들끼리는 어리석은 1,2,3위가 정해질 뿐이다. 다행히 내 주변에 지혜로운 사람들로 넘쳐난다면 예를 들면 내가 다행히도 예수나 석가모니 혹은 소크라테스와 공자 같은 사람을 만나서 내 주변에 지혜로운 사람이 넘쳐난다면 행운이다. 그들과 어울려 있기만 해도 내가 지혜로워질 테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행운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 죽은 자들이 남긴 지혜를 읽어야 한다.(물론 성인들은 그것을 글로 남기지 않았다, 모두 제자들이 저자이다.)
다만 너무 오래전에 그들이 남긴 것들은 현대적인 재해석이 필요하다. 성경과 불경만 읽어서는 자신 스스로 마음 챙김은 될지 모르나 선한 영향력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될 수 없다. 당대의 언어와 예시를 들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때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의 한계가 나의 한계임을 알아야 한다. 설교와 전도는 모두 언어를 통해 이뤄진다. 당신의 깊은 뜻을 몰라주는 타인을 원망하고 있는가? 타인은 깊은 뜻을 이해한 당신이 깊은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로 바라볼 뿐이다. 타인을 이해시킬 수 없다면 당신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냐? 너 아메바냐?”
과거 누군가가 내게 했던 말이다. 이 말이 왜 이렇게 뇌리에 남아서 사라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가 하는 말은 도통 알아듣기 힘들었다. 내가 머리가 나쁜 것은 어쩔 수 없다. IQ는 유전이다. 부모를 탓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인간은 IQ가 아닌 또 다른 능력이 있다. EQ이다. 우리는 IQ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진 않는다. 이제 IQ는 AI를 이길 자가 없다. 감성지능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지식에 감성이 더해지면 금상첨화지만 지식만 전달하는 AI는 우리에게 앎(지식)을 전달할 수는 있어도 깨달음(편도체를 자극하는)은 줄 수 없다. 인간은 표정 없는 감동에 익숙지 않다. 그 땐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인격 모독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해한 척해야만 했다. 학교와 사회와 직장은 그랬다. 그래서 항상 더 큰일이 벌어지곤 했다. 관계는 갈수록 더 악화되었고 서로를 힘들어했다.
화자의 목적은 청자의 이해다
대화는 화자의 의도와 생각을 명확하게 오류 없이 전달하기 위함이다. 청자가 이해도가 떨어질 수 있다. 그럼 화자에게는 더 좋은 기회이다. 이해도가 떨어지는 청자를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의 언변과 사고를 가질 수 있는 기회이다. 타인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해와 공감의 시작이다.
지신의 관념(프레임)에만 갇힌 사람들은 이 노력을 하지 않는다. 권위자와 권력자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돈과 힘이 있으면 그런 수고를 덜고 청자의 이해를 생략한 복종을 강요할 수 있다. 우리는 때론 이해도 안 되고 공감도 안 되는 일을 자행하지 않는가. 나는 과거 그랬다. 수도 없이 반복했다. 나중엔 그것이 습관화되면서 나 자신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물림인데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대물림이 이렇게 탄생한다.
당신도 이유를 모르면서 하고 있는 수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관습처럼… 물론 그것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묵시적으로 행해지는 많은 일들이 있다. 그중에 당연하게 습관처럼 하는 말과 행동의 이유를 찾아 올라가다 보면 그것이 잘못이었구나 깨닫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얼마 전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것을 또 한 번 일깨워 준 좋은 책이었다. 어류는 없는데 ‘어류’는 너무나 오랜 세월 우리의 관념을 지배해 왔다. 인지하지 못하는 오류와 잘못을 자행하고 있다.
이해와 공감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돈이 되지 않아서 우리는 종종 그것을 간과하고 넘어간다.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힘들어졌다. 우리가 아이처럼 순수하고 뱀처럼 지혜로울 수 없는 것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해 버리기 때문이다. 순수함(선함, 무해함)이 없는 지식은 지혜가 아니다. 그건 독이다. 우리는 아기로 살 수 없기에 그냥 뱀으로 산다. 타인에게 독을 뿜고 타인을 죽이며 살아간다. 그것이 내(뱀)가 먹이를 먹는 방식이고 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방식이다. 당신은 아이와 뱀, 이 둘을 모두 가지고 살아가는가? 아이처럼 웃으면서 뱀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모순적인 두 가지의 모습을 가졌다면 당신은 순결하고 지혜로운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