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에스터 페렐 - 세 번째 -
“사랑했기에 계약했고 계약했다면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계약이 종료되면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야 하고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계약 속에서 또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성장하는 방식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토트넘의 주장이자 영웅 손흥민이 최근 부진에 빠졌다. 그의 이적설이 돌고 있다. 그 부진의 원인은 다양하고 복합적이겠지만 팀과 손흥민 사이에 권태가 찾아든 것이 아닐까? 과거 그 누구보다 팀을 사랑했고 팀 또한 그를 사랑했으며 그 서로 간의 사랑이 자신과 팀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신과 팀은 하나 된 계약 속에서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그 계약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 서로는 계산기를 두드린다. 그래도 몸값이 나갈 때 제 값을 받고 보내느냐 아니면 그와의 관계를 더 이어가느냐? 사랑과 열정이 식었다면 이것을 다시 살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거대 자본이 오고 가는 스포츠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자신이 사랑하고 또다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하고 팀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다른 대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서로에게 윈윈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을 자신의 성장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활력을 잃어버린 사랑을 살리려 발버둥 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새로운 사랑으로 활력을 찾고 자신을 성장할 기회로 만드는 것이 나을까?
남녀의 사랑을 스포츠 세계의 관점에서 생각해 봤다. 최근 읽고 있는 책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이 많은 상념을 불러온다. 신문기사를 읽다가 손흥민 선수의 소식이 눈에 들어왔고 책 속의 내용과 그의 이적설이 연결되었다.
나의 글을 오랜 시간 읽어오신 독자들은 이런 나의 엉뚱함을 이해하시면 읽어가시리라 믿는다. 아닌 분들은 ‘그게 무슨 연관성이 있냐?’며 나를 또라이 글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상관하지 않는다. 이쯤 쓰니 초연해진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자가 또라이다. 불륜과 외도라는 주제는 민감하고 찝찝하지만 또한 흥미롭다. 글을 쓸 때도 이 두 가지의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더 흥미롭다.
“결혼이라는 계약은 사랑을 의무화한다. 그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이 나를 성장시킨다”
이 말에 동의하는가. 난 이것을 스포츠에 비유해서 설명해 볼까 한다. 기량이 뛰어난 운동선수가 시장에 나오면 누군가는 그 선수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시간을 가지고 그의 경기를 관람하고 분석하면서 선수에 대한 관심을 키워간다. 관심이 호감으로 발전하고 호감이 사랑이 되면 계약이 성사된다. 그럼 서로가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서로가 만족하는 계약 조건 안에서 서로를 소유하며 공식적으로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
계약 전에는 자연스럽게 사랑했지만 계약이 성립되고 나서는 의무적이고 책임 있게 사랑해야 한다. 사랑에 의무와 책임감이 더해지면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건 사랑에 믿음이 더해진 경우이다. 선수가 팀(원)과 감독을 신뢰하면 그 팀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사랑이 믿음으로 연결되면 벌어지는 일이다. 다수가 함께 하는 팀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력이다. 이 힘은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에 기반한다.
물론 그 시작은 사랑이어야 한다. 내가 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은 생겨나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하니 좀 이상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건 열정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한다. 이 열정이 계속 불타오를 수 있는가에 대해 묻고 싶다.
사랑과 믿음이 유지되려면 소망이 있어야 한다. 팀이 향해가야 할 목표이자 지향점이다. 이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있어야 한다. 승리와 성장을 전제하는 스포츠의 세계는 이 공통의 목표를 위해 함께 한다. 현실 세계도 마찬가지다.
계약이란 공통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서로의 사랑과 믿음을 유지시켜야 할 공통의 목표가 바로 소망이다. 이건 희망과 목표 혹은 욕망과 성취이라는 다른 표현들로 얘기할 수 있다. 현실 세계가 아니라면 사랑과 믿음으로 족하지만 우리는 가시적인 성과와 성장을 보여줘야만 하는 현실에서 이 소망이 사랑과 믿음을 지속하게 한다. 현실의 부부가 사랑과 믿음이 무너져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공통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소망이라기보다는 욕망 혹은 목표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마음이 떠났기에 소망을 이룰 가능성도 떨어지지만 욕망과 목표에 대한 미련이 서로를 붙잡아 두는 케이스 일 것이다. 소망이 욕망으로 변하면 나보다 상대가 더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성장하는 자는 사랑한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리려면 사랑해야 한다. 팀과 감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그럼 내가 더 많이 뛰고 노력한다. 진심은 언젠가 통하게 되어 있다. 사랑이 믿음으로 바뀌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사랑만 하고 믿음이 생기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건 사랑이 인내하지 않은 결과이다. 손흥민 선수가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는 것은 사랑과 인내를 통해 믿음을 끌어내는 능력을 지닌 선수였기 때문 아니던가? 또한 공통의 목표(소망)를 달성하는데 아주 큰 기여를 했다.
그가 팀의 주장을 단 이유도 그 때문이다. 팀원들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는 필드의 동반자가 그였다. 그는 다른 선수들이 도와주는 어시스터 역할을 십분 발휘했다. 남들보다 더 뛰고 더 참고 더 겸손했기 때문이다. 이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다. 이런 자세가 서로를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
언제나 분석되기 마련이고 그 시너지 효과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밝혀진다. 빛나는 자를 잠시 가릴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드러나는 법이다. 그때는 자신이 받게 되는 물질적 보상 못지않게 자신이 성장했다는 것 또한 발견하게 된다. 그건 모두 그동안 사랑(열정)이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면…
자본주의적으로 사랑하는 방식은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1% 미만으로 떨어지고 마이너스로 향해 간다면 경제는 파탄 나고 삶이 고통으로 변해간다.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사랑 또한 성장해야 한다. 사랑에 정체란 없다. 퇴보(미움) 아니면 성장 두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성장이란 언제나 정량화(숫치화)가 가능해야 한다. 성적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관계는 계약의 종료 혹은 파기로 향해 간다. 그 판단은 아주 신속하고 치밀하게 계산된다. 이혼(계약 파기)이 아주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변하는 것과 흡사하지 않는가? 맺어질 때는 관대하고 호의적이지만 헤어질 때는 그러기 쉽지 않다. 실익을 따지게 된다.
회복인가 전환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기존의 상태의 변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방식은 보통 시스템(정책)의 변경과 인적 구조 조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존의 방식과 인원을 그대로 유지한 채 회복을 시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변화하고 싶다면 환경과 관계를 바꾸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자신만의 의지로 현상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의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은가?
기회비용의 회피
문제는 계약을 종료하지 않고 혹은 중도 파기 하지 않고 성장하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건 계약 위반인 것이다. 팀과의 계약을 유지한 채로 다른 비공식 채널에서 사랑(열정)을 쏟아붓는 것이다. 이건 다른 말로 물질적 지원과 보존은 기존의 계약에서 공급받으면서 열정과 사랑은 딴 데 가서 쏟는 것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건 경제학적으로 설명하면 기회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비공식적이고 비밀리에 행해지는 선택이다. 모든 선택은 기회비용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불륜과 외도는 기회비용을 회피하려는 인간 본성이 만들어낸 선택이다. 하지만 이건 당장의 기회비용이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이 선택과 지속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기회비용은 커진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다자연애 (Compersion)
인간은 영민한 동물 아니던가. 그런 기회비용을 회피하고자 누군가는 서로가 합의하에 외도를 허용하기도 한다. 그럼 이건 상호 합의 하에 이뤄진 이상적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까? 쌍방의 계약을 유지한 채 쌍방에게 계약 위반을 서로 눈감아 주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 또한 경제적 물질적 이유가 크다. 서로가 갈라지면 누릴 수 있는 것 또한 반으로 줄어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은 로봇이 아니기에 서로의 그것을 용인한다는 이성적인 태도 뒤에는 감정적 불신과 미움이 커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만약 그것이 없다면 그건 아마도 무관심으로 변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관계에서 가장 최악의 상황이 무관심인 것을 감안하면 이미 인간적 관계가 아닌 사회적 경제적 계약으로만 묶여있는 상태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사랑과 기만 사이
앞에서 사랑만이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사랑 없이도 성장과 성공을 이룰 수 있다. 문제는 사랑 없는 성장과 성공은 공허하다. 마음이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공허함과 자주 마주하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이런 고민은 언제나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잘 생각해 보라. 사랑할 때는 이런 고민이 스며들 수 없다. 사랑의 힘이 삶의 활력과 생기와 의욕을 불러온다. 그것이 다른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많은 이가 결혼 생활을 지키기 위해 결혼 생활 밖으로 눈을 돌린다.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외도는 배신인 동시에 갈망과 상실의 표현이기도 하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 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사랑이 상실된 곳에 머물기 위해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차선책이지만 최선책이 된다. 결혼 계약을 파기하고 사랑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상처받고 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남녀는 어쩌면 자신을 둘러싼 많은 관계(가족, 친구, 친척등)와 현재의 물질적 경제적 수준을 누리면서 사랑을 하고 싶다. 그래서 불륜의 길을 선택한다.
사랑이 사라지고 성장이 멈췄다면 계약을 종료하고 다른 팀으로 옮겨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새로운 환경과 관계가 새로운 사랑을 불러내고 믿음과 성장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새로운 환경과 관계가 나를 성장으로 이끌고 또한 현재 누리는 것 혹은 그 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사랑에는 모험과 용기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건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두렵기에 우리는 확실한 계약(안전망)을 유지 한 채 다른 사랑을 꿈꾼다. 이건 분명 계약 위반이며 불공정 거래이다. 불륜의 사랑이 음지에서 기만으로 번식하는 이유이다.
사랑이 기만과 함께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바로 불륜이다.
사랑의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