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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감추고

발리에서 생긴 일 ep20

by 글짓는 목수

이제 마리는 이모가 간절히 바라던 소원을 다 이뤄줬다.

그다음은 또 뭘까? 그때였다.


“안녕! 마리, 난 존(John)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너 우리 찬양 팀에 들어오지 않을래?”

“내가 왜?”

“왜라니? 너의 그런 음악적 재능을 그냥 놔둔다고? 하나님을 위해 써야지”

“싫은데.”

“…”

예배가 끝나고 한 청년이 마리에게 다가왔다. 그 청년은 교회의 찬양 팀을 이끌고 있는 리더였다. 마리도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찬양팀 드럼을 맡고 있는 남자였다. 그의 드럼 실력이 남다르다는 것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청년부 예배 때 그의 드럼 실력이 유난히도 귀에 들어왔다. 그는 드럼을 치면서 서브 보컬로 노래까지 하면서 찬양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아이였다.


그의 뒤에는 일렉기타와 통기타를 매고 있는 두 남자가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 멀리서 또 다른 두 여자가 팔짱을 끼고 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메인 보컬과 건반을 맡고 있는 여자 멤버들이었다.


“우리 팀에 플루트 연주자가 없는데 네가 우리 찬양팀에 플루트 연주를 좀 맡아주면 안 되겠니?”

“그래, 그런 재능을 썩히면 안 되지 않겠니?”

“맞아, Join with us. We need you. ” (우리와 함께 해, 우린 네가 필요해)


이제 뒤에 서 있던 두 남자들도 그의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한 남자는 한국말이 어눌했다. 한인이민자 2세대였던 모양이다.


“난 분명 싫다고 했는데…”

“마리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겠니? 이게 뭐 우리 좋자고 하는 일만은 아니잖아, 안 그래?”

“야! 이 손 좀 치우지 그래?”


존은 그녀를 설득하려 친근감을 보이며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슬며시 손을 올리며 말을 건넸다. 마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존에게 말했다. 순간 마리는 과거 한국에서의 기억들이 또 올랐다. 학교 밴드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왕따를 당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마리는 다시는 밴드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플루트를 무기로 사용하는 일은 없길 바랐다.


“어.. 미안! 근데 한 번만 더 생각해봐 주라”

“거 참, 되게 비싸게 구는 구만.”

“Yes, you don’t need to be angry like this?”(그래, 뭐 그렇게 기분 나쁘게 생각할 필요까진 없잖아?)


존이 어깨에 올린 손을 내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때 뒤에 있던 두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순간 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플루트를 꽉 움켜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가자 가자”

“왜 가? 우리가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야야 그만해 가자, 미안해 마리야, 다음에 또 보자. 그리고 다시 한번만 생각해 봐”


존은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는 찬양팀원들을 데리고 그녀 곁에서 멀어졌다. 마리는 그제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뺐다.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트라우마가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뇌를 거치지 않고 몸이 바로 반응한다. 마리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마리는 최근에 플루트를 업그레이드했다. 기존에 쓰던 니켈도금 플루트에서 티타늄으로 재질로 바꾸었다. 그동안 틈틈이 플루트 과외를 하며 모든 돈으로 적잖은 돈을 들여서 구매했다.


이젠 절대 무공에 절대무기까지 갖추었다. 천하무적이 되었다. 이제 절대 부서질 일이 없다. 만약 부서진다면 아마 그건 그녀의 플루트에 얻어맞은 무언가 일 것이다. 물론 그녀가 그것을 무기로 쓰기 위해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까칠한 그녀의 성격이 언제 손에 쥔 악기를 무기로 바꾸어 버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두려웠다.


이곳까지 와서 예무(藝武 : 예술과 무술) 가의 명성을 얻고 싶진 않았다. 이제 어느새 어엿한 20대의 성인으로 자란 그녀의 곤봉 무술은 더 이상 사회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어떤 폭력도 용납되지 않는 호주 사회에서 그녀가 그 기량을 발휘했다간 철창신세를 면치 못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무술을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플루트 같은 곤봉이 쥐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녀는 플루트를 불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플루트를 휘두를 때도 플루트와 혼연일체가 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건 그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생긴 아니 찾아낸 능력이라고 봐야겠다.


마리는 어린 시절 엄마의 극성적인 다방면의 멀티 조기교육으로 초등학교 저학년 때 리듬체조를 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름 체조 선수의 기질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리듬 체조에는 여러 가지 종목이 포함되어 있다. 그 여러 가지 종목의 기량이 골고루 뛰어나야 한다. 하지만 마리는 유독 곤봉 체조에서만 특출 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나머지 4가지 종목인 리본, 공, 줄, 후프 종목은 그저 그런 수준 아니면 수준 미달이었다.


그녀는 곤봉만 손에 쥐어지면 마치 곤봉과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음악의 리듬에 맞춰 곤봉이 손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녀가 선보이는 곤봉 체조는 항상 거의 심사 위원들의 만장일치 만점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머지 4개 종목은 꽝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리듬체조 선수의 꿈을 조기 종료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누가 알았겠는가. 플루트가 손에 쥐어질 줄은. 곤봉보다 더 긴 플루트는 더 화려하고 현란한 곤봉 기술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것이 체조 경기가 아닌 일상에서라는 것이 달랐을 뿐.


“마리야, 다시 생각 좀 해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후부터 존의 러브콜이 시작되었다. 존은 마리에게 끊임없는 밴드 가입 권유를 이어갔다. 이모의 소원이 이뤄지지 또 다른 이가 자신에게 소원을 빈다. 그 모습이 마치 인재 영입을 빙자한 구애의 모습 같아 보였다. 교회에서 청년들 사이에 이제 마리와 존의 관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아무도 대놓고 얘기하진 못했지만 둘의 썸 타는 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마리가 교회에 나타나기만 하면 존은 마치 마리의 그림자라도 된 것처럼 그녀를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야~! 너 자꾸 이럴래? 그만 따라다니시지!”

“그러니까 우리 밴드에 들어와 줘”

“휘익!”

“허걱~”


마리는 갑자기 등에 둘러 매고 있던 대나무 플루트 케이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공중에서 한 번 회전하더니 순식간에 존의 코 10cm 앞에서 멈췄다. 플루트의 회전운동이 일으킨 바람이 존의 앞머리를 휘날렸다.


“존! 경고하겠어. 이제 그만해! 더 이상 계속 나를 따라다니면 이 플루트가 너를 공격할지도 몰라”

“내가 맞아서 너의 마음이 바뀔 수만 있다면 기꺼이 맞아줄 수도 있어”

“헐! 너 정말 미쳤구나”

“그래 미쳤지 너에게”

“으아아아악~ 꺼져! 이 자식아~!”


마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플루트를 다시 등에 매고 돌아섰다. 그날 이후부터 마리는 그가 교회에서 자신에게 접근할 때마다 등에 메고 다니는 플루트를 휘둘러 그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래서 존은 마리의 반경 1.5m 안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악기가 점점 무기화되어 가고 있었다. 아직은 전략 무기로 쓰이고 있지만 언제 이것이 전술 무기로 쓰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전술 무기가 되는 순간 또다시 과거의 악몽이 되풀이될지도 모른다.


“권사님, 잘 지내셨죠?”

“아이고 우리 존 목자님 오셨어, 어여 들어와”

“야~ 너 뭐야? 왜 우리 집에 온 거야?”

“마리야, 무슨 말버릇이니, 존은 내 손님으로 온 거야, 오늘부터 존은 우리 목장 식구가 되기로 했어”

“헐~ 이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존이 마리의 집에까지 찾아왔다. 존은 시미치 떼는 척하며 집안 깊숙이 들어와 주방에서 이모의 저녁식사 준비를 도왔다. 매주 교회의 어르신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모임에 존이 들어온 것이었다.


누가 봐도 존이 낄 자리가 아니었다. 환갑이 넘은 어르신들 틈에 청년이 끼어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원래 자신의 소모임의 리더였다. 그런데 그 모임의 리더 자리를 다른 이에게 내려놓고 마리 이모의 모임의 멤버로 들어온 것이었다. 물론 거기엔 마리가 끼어있는 모임이었다.


마리는 이모가 주최하는 교회 어르신들과의 저녁 모임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그 어떤 다른 교회 모임과 활동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이모의 확답을 받았다. 그런데 노인들의 모임에 두 젊은 남녀가 함께 하게 되었다. 어르신들 사이에서 그 둘은 계속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엮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선남선녀가 따로 없구먼”

“그려, 그려, 아이고 곱다 고브와 어쩜 이리도 고울까”

“우리도 이런 때가 있었는디 말이여, 안 그려?


그럴 때마다. 마리는 얼굴이 붉어졌다.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반면에 존은 그런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그렇게 마리는 매주 불편한 모임을 이어가야 했다. 마리의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야~ 존! 너 정말 혼날래?

“읍.. 왜에? 정말 그 플루트로 날 치려고?”


플루트가 또다시 존의 얼굴 앞으로 날아들었다. 순간 이동을 하듯 눈앞에 날아든 플루트가 조명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존이 움찔하며 말했다.


“우리 이모님 목장 모임에서 당장 나가!”

“왜? 네가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는 거 같은데… 하하”

“정말 너 맞고 싶니?

“그래 쳐라 쳐! 쳐서 너의 마음이 풀린다면야.”

“헐! 미친! 너 도대체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음… 글쎄 너도 잘 알 텐데…”

“좋아, 좋아. 알았어 밴드에 들어갈게”

“와우~! 정말이야?”

“그런데 조건이 있어, 난 플루트를 불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난 그냥 서브 보컬로 옆에서 노래만 할게, 됐지?”

“플루트 연주자가 노래를 하겠다고? 같이 합주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싫어? 싫으면 관둬!”

“Ok 오케이, 뭐든 좋아 밴드에 들어온다면야 히히히”


그렇게 마리는 다시 밴드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마리는 두려웠다. 독주에만 익숙해진 자신이 다른 악기들과의 합주 속에 어우러질 수 있을지… 그녀의 독주는 언제나 돋보였고 누구나 들으면 빠져드는 그런 떨림과 울림을 선사했다.


그녀의 플루트 소리는 아주 맑고 투명하며 또한 강한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 강한 색깔이 다른 악기들의 음을 덮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다른 악기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왔었다. 플루트는 마치 자신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너무 밝은 별은 다른 별들의 빛을 가려버린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빛을 감추고 그들 속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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