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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

발리에서 생긴 일 ep22

by 글짓는 목수

“嗬!真是的 这丫头! ”(헉! 아휴~ 정말 이년은)


또 검은 눈동자가 없는 하얀 눈알이 눈앞에 나타났다. 도대체 이년은 왜 이렇게 내 눈앞에서만 자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정말 이년이 시집을 가게 된다면 그 남편은 아마 매일 아침마다 이 공포스러운 장면을 봐야만 할 것이다. 정말 쉽지 않을 거 같다.

그런데 이 년이 시집을 가려면 혼전 순결을 지켜야만 가능할 거 같다. 사랑만 나누고 잠은 따로 자면 상관없겠지만 같은 침대에 아침을 맞이하면 분명 비명소리와 함께 이별을 맞을 것이 분명하다. 나도 처음엔 비명을 질렀다. 지금은 비명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놀라는 건 변함없다.


오늘도 공포스러운 장면에 술 냄새까지 가미되었다. 어제도 달리셨나 보다. 웬웬은 남자만 있으면 술이 술술 들어간다. 나랑 마시면 술맛이 안 난단다. 그래서 나랑 둘이서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과거엔 술 없이는 무슨 낙으로 사나 할 정도로 술과 동고동락 했지만 이젠 술을 거의 안 마시게 되었다.


주(酒:술)님을 배척하고 주(主:주인)님만 섬기던 전 남자 친구 때문에 자연스럽게 술과 멀어졌다고 해야 할까? 그땐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상대에게 지켜야 할 배려라고 생각했다. 몇 년간의 배려는 습관이 되었다. 술도 결국 습관이더라. 술도 안 마시고 맞장구도 잘 치지 않는 나는 웬웬의 술친구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드라마를 보면서 혼자 마신다. 그녀는 내가 쓴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마신다. 어제도 나의 드라마를 보면서 홀로 술을 마시다 잠들었나 보다. 호텔의 거실에 있는 대형 TV가 켜져 있었다. 그 앞 테이블에는 마시다 만 맥주병들이 놓여 있었다.


“哎呦 ,搞得乱七八糟的呀”(어이구 완전 난장판이구만)


나는 그가 먹은 잔해들을 치웠다. 그리고 창문의 커튼을 걷었다. 아직 창 밖의 숲 속은 어둠 속에 가려 있었다. 산속의 어둠과 도시의 어둠은 다르다. 도시의 어둠은 하늘이 어둡고 땅 위가 밝지만 산속의 어둠은 땅 위의 어둠이 하늘 보다 더 어둡다. 도시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빛들이 하늘을 비춘다. 인적이 드문 산속은 하늘에 떠 있는 달빛과 별빛이 어둠이 드리운 숲 속에 빛을 비춘다. 높게 솟은 야자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이곳 숲 속은 야자 잎에 가려진 달빛과 별빛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칠흑같이 어둡다.


“多么寂静的清晨啊”(정말 적막하고 고요한 새벽이네)


발리의 바다를 바라보며 맞이했던 새벽과 숲 속에서 맞이하는 새벽이 대조적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커피물을 끓이고 노트북을 펼쳤다. 커피 물이 끓는 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일 함을 가장 먼저 확인했다.


“这小伙子怎么还没看我的EMAIL呢?”(뭐야 이 남자, 아직 메일 확인도 안 했네, 메일을 잘 안보나?)


그 남자는 아직 메일을 읽지 않았다. 누군가의 답장을 기다리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껴본다. 공모전에 투고를 하고도 기다리지 않던 답장이다. 글을 쓰면서 수없이 많은 메일을 썼지만 기약도 없고 답장도 없는 오랜 시간을 견디다 보니 이젠 메일은 보내는 즉시 잊어버린다. 답장이 온다면 기억이 살아날 것이고 오지 않는다면 기억은 사라져 버린다.


예전에 퇴사 후 집안에서 은둔하며 전 남자친구의 SNS를 드려다 보던 때가 기억난다. 몇 달 동안 그가 업로딩 하는 영상을 훔쳐만 보다가 용기를 내어 댓글을 남겼다. 그때부터 기대와 걱정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두 가지의 낯선 감정이 스며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기대는 그가 나의 댓글을 반가워하는 답글을 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고 걱정은 나의 댓글을 무시하거나 혹여 삭제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그는 아주 빨리 화답을 해주었고 그때부터 그와 나의 편지 같은 댓글 달기가 이어졌다. 짧게 안부를 묻는 댓글에서 점점 댓글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장문의 편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SNS를 들여다보면서 가상현실 속 교류를 이어갔다. 그때는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메말랐던 나의 마음에 감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때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을 떴다. 그때의 사랑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랑의 아주 일부분이었지만 그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 사랑이라는 이 광활한 감정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 감정도 자라고 또 소멸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가 가르쳐준 사랑은 단편적이었지만 그의 사랑을 통해 나는 사랑이란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그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사랑은 학습 중이다. 한 가지 내가 사랑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건 사랑은 증오라는 또 다른 감정을 거쳐야만 그것을 제대로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마냥 좋은 것이 아니다.


나는 과거 전 남친을 천사라고 부르곤 했다. 그 이유인즉, 그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였기도 했지만 그가 나의 삶을 변화시켜 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사는 악마의 변신 전 모습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성경에도 악마가 타락한 천사의 모습이라고 적혀있더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고린도전서] 13:4-7]


과거 그 천사가 타락하기 전에 내게 알려준 사랑의 정의는 인간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건 인간이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모든 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인간 세상이 이렇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삶은 이 사랑의 모든 과정들을 경험하고 깨닫기엔 너무도 짧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의 마지막에 모두가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리라. 사랑이 부족했음을 깨달으며.


좋은 것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랑은 모래성과 같다. 모두가 모래성 위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불안하다. 사랑이 커져가면 커져갈수록 그 불안 또한 커져간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그건 미움라는 완전히 다른 감정을 안겨준다. 웃긴 건 미움 속에서도 사랑을 갈구한다.


♩♬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쓱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내게 긴 여운을 남겨줘요

사랑을, 사랑을 해줘요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새하얀 빛으로 그댈 비춰 줄게요 ♪♫


-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있다. 어젯밤에 새롭게 알게 된 노래였다. 어젯밤에 레스토랑에서 피터가 알려준 노래였다. 웬웬이 피터에게 좋아하는 노래가 있냐는 질문에 그가 알려준 노래였다.


“What is ‘Janabi’s meaning?”(근데 잔나비가 무슨 뜻이에요?)

“This means ‘monkey’ in traditional Korean word. The members of Jannabi were all born in the year of the monkey. That’s why the band becomes ‘Jannabi’ and I’m monkey as well”(잔나비가 한국말로 원숭이라는 또 다른 말이에요. 잔나비 그룹 멤버들이 다 원숭이띠거든요 그래서 잔나비래요, 그리고 저도 원숭이예요)

“Really? We are monkey too ”(어 정말요? 저희도 원숭이 띤데)

“Really? If so, we are all monkeys hahaha”(그래요 우리 다 동갑이네요 하하하)

“Do you know that monkey is very special animal in Bali?”(너희들 아니? 발리에서 원숭이는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걸?)

“what’s that mean?”(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때 카렉이 우리에게 발리의 원숭이 전설을 알려줬다. 오래전부터 발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발리의 신화에는 원숭이가 등장한다고 했다. 하누만(Hanuman)이라는 원숭이 신이 발리에 나타나 악마에게 빼앗긴 발리 왕자의 아내를 악마로부터 구해주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 하누만 신은 강한 힘과 지혜를 가진 신으로 발리섬을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발리인들은 원숭이를 영물로 여기고 발리 곳곳에는 원숭이 형상의 상징물들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 우부드에는 수백 마리의 원숭이가 서식하는 신성한 사원도 있다고 했다.


“Wow, it’s so amazing!”(우아 신기하다)

“Balil is our hometown haha”(이곳이 우리 나와 바라였구먼 하하)

“You know what, there is a performance about the monkey legend in Ubud. What about watching that?”(참, 여기 우부드 시내에서 그 전설에 관련된 공연을 하는데 보러 갈래?)

“Are you serious?”(정말이야?)

“Yes! Yes! Let’s go, I really want to see that.”(그래 그래 가자 가자! 너무 보고 싶다.)

“If so, monkeys are watching monkey performance? hahaha”(그럼 원숭이들끼리 뭉쳐서 원숭이 공연을 보러 가는 건가요? 하하하)


원숭이 네 명이 폭소를 터뜨렸다. 카렉은 우부두 왕궁 근처에서 원숭이 전설 연극이 꽤나 볼만하다고 추천을 했다. 우연의 대화가 우연을 따라서 에피소드와 새로운 사건이 이어지는 이런 상황이 너무 신기했다. 피터로부터 시작된 원숭이 주제는 우리가 하나 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도무지 그 색깔을 알 수 없던 피터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조금씩 호감 쪽으로 기울어 가는 듯했다.


“Peiyun? Do you want to listen the music of Jannabi?”(페이윈님 잔나비 노래 한 번 들어볼래요?)

“Yes, Please”(네, 부탁해요)


피터는 그 자리에서 그 노래를 틀어줬다. 그런데 그 음률이 너무 좋았다. 나는 가사의 내용이 너무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에게 노래가사의 내용이 뭐냐고 물었다. 그런데 가사는 더 좋았다. 그 노래가사가 또 작가의 상상을 자극했다. 한국의 대중가요에서 영감을 얻기는 처음이었다. 음악은 문학과는 달리 국경도 민족도 문화도 초월한다. 그 노래의 가사를 드려다 보니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고 그 미움이 외로움으로 변한 한 남자, 그리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또 다른 사랑을 찾게 되는 내용을 가사로 느껴졌다. 그런데 이제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또한 두려워한다. 사랑을 주저하게 되었다.


사랑의 배신은 미움의 상처를 남긴다. 미움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 점차 외로움으로 변해간다. 외로움은 또 다른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과거의 상처가 사랑을 주저하고 망설이게 한다. 이젠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닫힌 사랑을 하게 된다.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멀어질 수도 없는 그런 감정이다. 노래의 가사는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외로움에 사무친 현대인의 소극적인 사랑을 서정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실현되지 않은 사랑의 감정은 예술로 승화되곤 한다. 그래서 예술은 사랑을 품고 있다. 내가 이야기를 쓰는 것도 이것 때문일 것이라 믿는다. 사랑이 없는 이야기는 앙꼬 없는 찐빵이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의 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미움의 감정을 심어준 건 어쩌면 내가 사랑을 제대로 알아가기 위한 신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기에. 그리고 내가 이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생각하게 된 건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바꿀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젯밤 잔나비들의 만남과 잔나비의 노래 그리고 잔나비의 전설이 한 편의 우연 같은 전설의 이야기가 되어가는 것 같다.


창 밖에는 붉은 여명이 야자수 사이로 비치고 있었고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하누만 상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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