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은 달다

by 수지리

나는 신맛을 좋아한다. 과일을 많이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자몽을 참 좋아한다. 어려서 엄마는 아침상에 자몽을 자주 올리셨다. 반을 갈라 칼집을 내서 설탕을 솔솔 뿌려 티스푼과 함께 내시곤 하셨다. 어린 나는 그 맛도 좋았지만 이름이 특히 더 좋았다. 자몽은 나무에서 덩어리 진 송이 형태로 열리는데, 그 모습이 포도송이처럼 보여서 ‘grapefruit’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포도와는 비슷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포도과일일까 궁금해했지만, 당시 내가 어렸을 땐 아무도 답도 해주지 않았고 내가 스스로 찾아볼 수 있는 자료도 없었다. 그래서 난 다 커서야 그 이름의 비밀 아닌 비밀을 알게 되었다.



자몽은 신맛인가, 쓴맛인가? 내 입에 자몽은 시지만 달다. 설탕을 치지 않아도, 내 입맛에는 달다. 엄마는 매일 아침 자몽을 반갈라 접시에 담아 설탕을 솔솔 쳐서 상에 올리셨는데, 나는 설탕을 치지 않고 먹었다. 그리고 티스푼으로 과육 부분을 퍼서 먹었다. 자몽은 달콤한데, 그 껍질이 쌈싸름해서 난 최대한 그 하얀 껍질 부분을 제하고 먹었다. 그러려면 티스푼 궁둥이로 쭉쭉 눌러 자몽 과육이 고이면 그걸 퍼먹으면 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자몽이 내 최애과일은 아니었다. 어린 입맛엔 망고가 훨씬 더 맛있었고, 부드러웠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어 난 다이어트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굶고 살 빼는 건 안된다는 엄마의 지론에 따라, 난 삶은 달걀, 삶은 감자, 그리고 자몽만 먹는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결과는 대만족. 살은 쪽쪽 빠졌고, 그때부터 자몽은 내 최애과일이 되었다. 먹다 보니 점점 그 맛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삶은 달걀, 감자는 워낙 쉽게 조리할 수 있고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어 얼마든 도시락으로도 먹을 수 있었으나, 자몽을 싸들고 다니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손수 흰 껍데기를 전부 벗겨 핑크빛 속살 과육 부분만 쏙 빼서 예쁘게 싸주시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난 자몽은 껍데기를 까지 않으면 먹지 않았고, 껍데기를 깐 자몽은 내 최애과일이 되었다. 다이어트 식단이 너무 내 입맛에 찰떡이라 제법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그러다 체중이 너무 빠져 어느 날엔가 목욕탕에서 쓰러진 채 엄마가 날 발견한 이후, 난 ‘밥심’을 인정하고 다이어트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난 첫 번째 생겼던 아이를 유산했다. 계류유산은 임신 초기 태아가 자궁 내에서 사망했지만, 몸이 이를 인지하지 못해 자연적인 유산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보통 초음파 검사에서 심장박동이 멈춘 것이 발견되며, 산모는 자각 증상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유난히 입덧이 심하고 허리통증이 심해져서 일상생활까지 힘들어졌던 어느 날, 병원에 초음파 검사를 하러 갔다가 아기 심장이 멎은 걸 알았고, 그 자리에서 수술대에 올랐다. 그 이후 난 지금 나의 보배가 된 첫째를 만나기 전까지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아기를 기다렸다. 죽었던 아이가 돌아올 것 같아서이기도 했지만, 바로 아기를 가지지 않으면 다시는 가지지 못할 것 같은 조금은 더 세속적인 욕심에서였다. 그러던 어느 밤 난 꿈에 뺨에 빨간 연지를 찍고 쪽을 두른 한복 입은 여자와 만났다. 그 여자는 나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고, 그 싸한 눈빛에 얼어버린 나는 그 사람이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서워서였을까. 그러자 그 여자가 먼저 얘기했다. “지금 임신인지 아닌지 그게 궁금한 거지? 그지? … 그래, 맞아 너 지금 임신했어.” 나는 꿈에서지만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아기가 건강한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망할 입은 계속 떨어지지 않았다. “어.. 걱정 마. 아기는 아주 건강하니까. 근데, 감당할 수 있겠어?” 그게 무슨 소리일지 너무 궁금하고 걱정되어 그제야 입이 떨어졌다. “왜요? 아기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다급함에 입이 열렸지만, 그 질문 외엔 또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건강하다니깐? 근데 얘 보통 아닌데,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럼요! 나도 이쪽저쪽 날뛰는데 일가견이 있어 어떤 아이든 감당할 수 있어요 “ 그러고 바로 꿈에서 깼다.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궁금했는데 물어보지도 못한 게 아쉬웠다. 그 달 말에 칼같이 25일 주기로 월경을 하던 나는 월경이 나오지 않았고, 임신테스트기를 해보니 두줄이 나왔다. 시간이 흘러 임신 중기에 접어들 때쯤 야근을 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와 퉁퉁 부은 다리를 올려놓고 잠이 든 어느 밤, 꿈속에서 발가벗은 채로 횡단보도에 누워있는 나를 바로 그 여자가 다시 한번 더 찾아와 밤새 다리를 주물러 주고 갔다. 당시 나와 친하게 지내던 신학생은, 아무래도 그 여자는 삼신할머니 같지만, 우리끼린 수호천사로 하자고 하시며 함께 기도 해주셨다.

임신 중에 나는 자몽과 고기를 정말 많이 먹었다. 입덧 때문에 잘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엄마는 또 자몽을 까기 시작하셨다. 엄마가 자몽을 까서 통에 담아 주시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먹는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입안 가득 그 신선하고 달콤(정말 내입엔 달다) 한 자몽향이 퍼지면 쓴 침도 바로 사라졌다. 엄마가 까준 자몽은 비상상비약처럼 냉장고에 꼭 쟁여두곤 했다. 메스꺼울 때마다 꺼내 먹으며 속을 가라앉혔다. 그때 아기는 내 배 속에 있었는데, 우리 엄마에겐 여전히 내가 아기였다.


자몽(grapefruit)과 비슷한 과일인데, 조금 더 큰 사이즈의 pomelo라는 과일이 있다. 자몽보다 훨씬 크고, 껍질이 두껍고, 맛이 더 달거나 순한 편이고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많이 재배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 하나는, 스페인어로는 자몽도 pomelo라고 한다는 거다. 2006년도와 2007년도에 두 번 두 달씩 나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지낸 적이 있다. 2006년도 첫 번째 방문 때는 한인하숙집에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매일 정성껏 내게 밥을 해주셨는데, 아침이면 pomelo를 사다가 스퀴저에 손수 짜서 주스를 만들어주셨다. 매일 아침 같이 수영장에 다녔었는데, 수영하고 돌아오는 길에 pomelo를 사 와 바로 신선하게 짜주셨다. 그래서 난 스페인어로 자몽을 pomelo라고 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 그래서 그 이후 십 년 가까이 자몽은 영어로는 grapefruit, 스페인어로는 pomelo 이렇게 알고 살았다. 그런데 작년에 독일에 오고 나서 슈퍼마켓에 가보니, grapefruit가 있고 pomelo라는 다른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닌가.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른 종류의 다른 과일인데, 스페인어로는 이 두 가지 모두를 같은 이름 pomelo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난 두 가지를 모두 사서 먹어보았고, 당연히 난 자몽(grapefruit)이 더 입에 맞았다. 그 특유의 신맛과 단맛이 예전에 엄마가 까주던 딱 그 자몽이니까.

몇 해 전 한국에 꿀자몽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자몽을 까서 속살만 까서 꿀에 재워 먹는 건데, 유자청이나 딸기청을 담그는 것처럼 유행을 타서 너도 나도 해 먹었다. 친한 언니가 내가 워낙 자몽을 좋아하니, 손수 꿀자몽을 만들어 한통 가져다주었다. 한입 먹으니 정말 달콤한 꿀의 맛이 자몽과 어우러져 맛있었지만, 내가 아는 자몽의 매력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특유의 신맛 뒤에 입안에 찾아오는 단맛. 난 누가 뭐래도 설탕, 꿀이 없이도 자몽이 달고 그 맛이 좋다. 지금도 갈증이 날 때면 자몽을 스퀴저로 짜서 먹는다. 벌컥벌컥 그렇게 자몽주스를 한잔 마시고 나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자유로운 공기와 나의 젊었던 꿈 냄새, 엄마 냄새와 엄마가 손수 까주던 자몽의 맛, 그리고 임신했을 때 나의 메스꺼움을 내려주던 그 시원한 맛이 모두 어우러져 한번에 갈증을 모두 해소해 준다. 남편은 나랑 살면서 자몽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둘째는 나를 닮아 자몽을 잘 먹는다. 아침에 스퀴저로 주스를 착즙 하면, 신선하고 알 굵은 자몽 하나로 딱 한잔 나온다. 자몽 껍데기는 차곡차곡 포개어 버리고, 자몽 주스를 컵에 담아 식탁 위에 올리면 부엌 가득, 식탁 가득 싱싱함이 아침을 깨운다.

엄마가 까주던 자몽, 종이에 과슈, 2025 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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