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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치도치상 Nov 25. 2023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질문의 경계에서

성경이나 탈무드를 읽다 보면 유독 질문을 하고 서로 논쟁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야곱은 하느님과 밤새 씨름을 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과 씨름한 자라는 이름입니다. 욥은 자신이 받는 고통이 정당한지를 끊임없이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스라엘 민족은 질문하고 논쟁하는 데에 정통했습니다. 법정에서 이기고 싶으면 유태인을 찾아가라는 말이 뉴욕에서 통용됩니다. 삼천 년 동안 율법에 대한 논쟁에 이골이 난 민족이기에 법정에서 역시 논쟁하는 데에 매우 능통합니다.


이처럼 유대-그리스도교 문화 (Judeo-Christian culture)에서는 질문을 하고 논쟁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유대-그리스도교 문화는 질문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상에 대한 순명을 강조합니다. 의구심(questioning)을 갖지 않는 편을 선호합니다. 질문은 권위에 대한 반항 혹은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흥미롭습니다. 본래 유대 그리스도교 문화는 하느님과 씨름을 할 정도로 질문과 논쟁을 중요시하고 당연시합니다. 질문을 하는 행위는 자연스럽습니다. 좋은 질문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국 그리스도교 문화(유대 문화가 빠진)에서 질문은 배격해야 할 행위입니다.


예전에 EBS에서 ‘우리는 왜 질문하지 않는가’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유치원,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실의 모습을 비춥니다.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선생님의 질문에 서로 대답하고 질문하느라 바쁩니다. 교실에 생동감이 넘칩니다. 차츰 학년이 올라갈수록 생동감은 적어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을 하는 학생들은 존재합니다.


중학생이 되자 교실에 생동감은 사라집니다. 적막감과 고요함 중에 선생님의 강의 목소리만 들립니다. 학생들은 받아 적기에 분주합니다. 쏟아지는 정보를 처리하느라 바쁘기에 질문은 자취를 감춥니다. 이어 고등학교 교실에서 학생의 절반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잡니다. 깨어있는 학생들 역시 고개를 푹 숙이고 선생님의 강의를 듣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교실에서 잤습니다. 중학생 때 선행학습 학원을 다니면서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배웠었거든요. 고등학교에 막상 들어오자 재미가 없었습니다. 흥미와 호기심은 교육의 주요한 동기인데 선행학습으로 흥미도 호기심도 꺾여버린 것이었죠.


고등학교 교실의 모습은 대학 교실까지 이어집니다. 교수가 질문이 있는지 수업의 중간중간에 묻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답하지 않습니다. 왜 질문을 하지 않는지 한 대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질문을 하게 되면 수업이 길어질지도 모르고 혹여나 다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더군요. 어떤 학생은 자신이 바보 같은 질문을 할까 봐 두렵다고도 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질문을 하는 것은 바쁜 한국 사회에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고요. 학교뿐만 아니라 기업도 질문을 바라지 않는다고요. 그런 걸 보면 수능은 한국 사회를 비추는 좋은 예시라고 하더군요. 내 생각보다는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하죠. 내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상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더욱이 문제의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 예시 중 한 가지를 택하면 되니 굳이 사고를 요구하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시간이 오래 지체될 뿐인 것이죠.


앞서 저는 철학자이자 신학자며 심리학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세 가지 역할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철학자는 인간 이성과 사고에 대해 질문합니다. 신학자는 신의 섭리에 대해 연구합니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학의 경우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에 대한 신앙이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신의 섭리는 결국 인간에 대한 섭리로 연결됩니다. 즉, 신학자 역시 인간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심리학자 역시 질문합니다. 심리상담의 본질은 내담자가 자신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함께하면서 상담자는 내담자가 스스로 길을 잘 찾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개입합니다. 그중 하나가 질문입니다.


저는 특별히 적절한 질문을 하도록 노력합니다. 충고를 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 어떤 것이 옳은 지를 가르치는 것은 상담자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상담자를 찾아오기 이전의 내담자의 지인들은 그에게 충분한 충고를 주고 방향을 제시하고 어떤 선택이 옳은 지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똑같은 역할을 상담자가 할 필요는 없죠. 더욱이 그러한 충고, 방향을 가리킴, 대중 윤리에 기댄 판단은 내담자의 가치와 철학에 위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담자마다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상담을 참여하기에 다른 상담자의 방법론을 재단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저의 상담 철학이 그렇다는 겁니다.


잘난 스승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자랑합니다. 훌륭한 스승은 훌륭한 조언을 줍니다. 참된 스승은 좋은 질문을 던집니다. 잘난 스승도, 훌륭한 스승도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스승을 만나기란 참 어렵습니다.


제 목표는 참된 상담자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내담자가 되돌아볼 수 있도록 돕고, 스스로를 성찰하고, 어떤 선택과 행동이 자신의 가치관과 부합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만으로 저는 상담자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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