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 읽기
한편, 사람들은 여전히 프시케의 아름다움을 칭송했으나 왕자나 귀족은커녕 시정배들조차 그녀에게 지나가는 말로도 청혼하는 일이 없었다. 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혹 프시케가 신들의 노여움을 사지는 않았는지 싶어서 아폴론 신전에 신탁을 청했다. 신탁은 이렇게 전해졌다.
“이 처녀는 인간의 아내가 될 팔자가 아니다. 요사스러운 괴물이 산꼭대기에서 처녀를 기다리고 있구나. 아름다움이란 비와 같아서 모자라면 가뭄이라고 하고 넘치면 홍수라 하지 않더냐.”
아폴론 뜻을 전해 들은 왕은 막내딸 프시케를 불러다가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그러나 프시케는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했다.
“아버지, 아폴론 신의 뜻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제가 괴물의 아내가 될 운명이라니. 그러나 저는 제 발로 가겠습니다.”
운명을 받아들인 그녀는 산꼭대기에 올랐다. 그러나 인정 많은 서풍의 신 제퓌로스가 다가왔다. 제퓌로스는 그녀를 잠들게 하고는 그녀를 꽃이 흐드러지게 핀 한 골짜기에 데려다 놓았다. 골짜기에서 잠에서 깬 프시케는 아름다운 한 궁전을 발견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프시케, 보시는 것은 모두 당신의 재물입니다. 안방으로 드시어 목욕물로 목욕을 하시고 산해진미가 차려진 식탁에서 식사를 하십시오." (이윤기 p. 127-129)
얼굴이 아름답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보다 나을 수 있는 걸까요? 빼어난 미모가 가져다주는 인기와 명성이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편안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프시케의 아름다움은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헤쳐나가려는 자세에 있습니다. 그녀는 인기와 명성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맞서겠다고 했습니다. 신들 역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사람을 돕습니다.
심리 상담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농담이 있습니다. 우리의 라이벌은 점쟁이와 무당이라고. 점을 보고 무당을 찾는 것에 대해 제가 반감이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점을 보고 무당을 찾아 굿을 하는 행위가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기보다는 운명 (만일 있다면)에 순응하는 데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가정폭력을 당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남자는 평생 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할 운명인 건가요? 여자도 만나지 않고 홀로 살아야 할 운명인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부에 큰 상처가 나더라도 여러 치료를 통해서 낫게 됩니다. 물론 상처의 흔적은 남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혹은 트라우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처의 흔적이 마음에 남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마음의 상처를 지닌 채로 살아야 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심리치료라든지 약물 치료라든지) 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점은 운명이 있다 없다 그 운명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라기보다는 내가 어떻게 운명을 헤쳐나갈 것인가 생각하는 태도라고 봅니다.
프시케는 괴물이라던 신랑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그 궁전에서 신혼을 보낸다. 신랑은 늘 한 밤중에 와서 날이 새기 전에 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으로 본 적은 없어도 손끝으로 가늠한 바로는 괴물은 아닌 듯했다. 어느 날 프시케는 신랑에게 오래 망설이던 말을 했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 까닭이 있으시다면 그것이라도 가르쳐주세요.”
에로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데 내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것인가요? 믿어지지 않으면 내 곁을 떠나세요. 의심이 자리 잡은 마음에는 사랑이 깃들지 못해요. 내가 그대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대가 나를 섬기기를 바라지 않고 단지 사랑하기를 바랄 뿐이라서입니다.” (이윤기 p. 129-133)
장난하는 것일까요? 신화라는 것이 논리 혹은 인과관계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 아닙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살이 붙고 훗날에 기록된 것이죠.
우리가 연애를 할 때에 그것이 사랑(에로스)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헤어진 후에야 (사랑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사랑(에로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을 하고 있는 프시케에게는 에로스가 잘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요. 진정한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죠.
한편, 사랑은 신을 섬기듯 서로를 섬기는 일이 아닙니다. 영어로는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사랑을 구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infatuation입니다. 이 infatuation 단계에서는 연인은 서로를 우상화합니다. 신을 섬기듯 말이죠. 물론 행동으로써 섬기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만, 서로를 이상화하고 우상화합니다. 그러나 에로스의 말처럼 사랑은 신을 섬기는(이상화 혹은 우상화) 게 아닙니다.
프시케는 에로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녀의 언니들도 누군지도 모르는 신랑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며 호기심이 가득한 그녀를 설득했다. 마침내 그녀는 에로스가 누구인지 발견했다. 그러나 에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이유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그대를 사랑했기 때문이오. 사랑은 채움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오. 내 말의 이치가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들던가요? 그대에게 따로 벌은 내리지 않겠어요. 사랑이 남아 있다면 영원한 이별보다 더 큰 벌은 없으니까.”
에로스는 프시케를 두고 날아가 버린다. (이윤기 p. 132-138)
우리는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사랑인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검증하고 싶습니다. 확신이 생겼다고 믿는 순간 사랑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검증하려 드는 순간 사랑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확인과 검증은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프시케가 에로스의 얼굴을 본 순간 에로스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프시케는 자신을 떠난 에로스를 찾아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닌다. 그녀는 그곳이 누구를 위한 신전인지도 모른 채 신전을 청소하고 곡물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제단에 바친다. 마침 그 신전은 곡식과 풍요의 신 데메테르의 신전이었고, 데메테르는 프시케에게 에로스의 어머니, 아프로디테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아프로디테로부터 프시케는 많은 시험을 받는다. 결국 지옥까지 내려가 페르세포네까지 만나고 온 프시케는 마침내 에로스를 만난다. (이윤기 p. 139-144)
사랑을 얻는 과정이란 참으로 험난한가 봐요. 다시 사랑(에로스)을 만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가 봅니다. 사랑은 이렇게 과정이자 험난한 굴곡을 지나야 비로소 얻게 된다는 그리스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역시 겪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참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