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일등, 출생률은 뒤에서부터 일등, 자살률은 앞에서 일등
예시 1.
"단 한 번도 엄마는 칭찬한 적이 없어요."
어눌한 우리말 발음의 여자아이는 사람들 앞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습니다. 성당은 아이의 울음소리 외에 초침 소리만 들렸습니다. 아이 또래의 고교생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부모님들은 마치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인 것처럼 입을 꾹 닫고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면서 아이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10년도 더 된 일입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저는 뉴욕의 한인 성당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피정 (일종의 기도회) 프로그램에 스태프로 참여했습니다. 그 프로그램 말미에 기도 모임 시간이 있었고 부모님들도 그 자리에 초대되었습니다.
보통 이민 2세 아이들은 우리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미국 문화에 어릴 때부터 젖어 살았기에 이들에게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가 모국어입니다. 반면 이민 1세대는 우리말이 더 편합니다. 이 분들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인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분들의 사고방식은 이민을 오던 시대에 멈추어 있습니다. 60년대 이민 온 사람들은 60년대 사고방식, 70년대 이민 온 사람들은 70년대, 2000년에 온 사람들은 2000년대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에 계속 살고 있었다면 문화가 변화하는 속도에 따라서 사고방식 역시 함께 바뀌었을 겁니다. 이민을 오신 분들이야 오랜 시간 동안 한국 문화를 접하지 못한 채로 타지에서 삶을 영위했기에 그렇습니다. 요즘 60대, 70대 한국에 사는 어르신들도 많은 분들이 스마트폰도 사용하시고 유튜브도 보시고 하잖아요. 한국이야 변화 속도가 워낙 빠르고, 유행에도 민감하기에 연세가 지긋이 들어도 첨단 문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민을 가신 분들은 한국의 어르신들에 비해서도 그렇지 못합니다.
재밌게도 영어가 모국어인 이민 2세들도 부모님의 문화적 유산을 받았습니다. 우리말 몇 마디 못하지만 그들의 우리말 표현은 70년대, 80년대에 사용하던 표현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자아비판"의 문화적 속성 역시 고스란히 이어받았습니다. 이런 걸 보면 문화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사람의 가치관을 지배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시 2.
저도 과외고 학원이고 중학생 때까지 여럿 다녔습니다. 중학생 때는 KAIST 학생에게 수학 과외를 받았고요. 제 친구들 몇 명의 엄마들과 저희 엄마는 대전에서 이름 있다는 학원의 최고 선생님들만 뽑아 반을 따로 만들어 학원에 다니게 했습니다. 전 중학교 2년 동안 고등학교의 국, 영, 수, 사, 과를 모조리 미리 배웠습니다. 네, 벌써 30년 전에 선행학습을 했습니다.
전 덕분에 고등학교 국, 영, 수, 사, 과 수업을 들으며 잠만 잤습니다. 다 배운 내용이라 흥미가 없었어요. 수업시간에는 주로 자고 점심, 저녁 먹고 농구하고, 청소시간에도 농구하고, 야자시간에도 몰래 나와 농구를 했습니다. 그렇게 제 고교시간은 지나갔습니다. 뉴욕에 가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공교육이 매우 잘못되어서 사교육을 질리도록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수능을 보고 자살하는 애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엔 어떤지 모르지만, 2010년 후반까지도 기러기 가족은 뉴욕에 많았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고등교육이 엉망이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엉망인 공교육 덕분에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아빠는 한국에서 돈 벌고, 아이들과 엄마는 미국에서 조기 유학을 시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차라리 미국에서 조기 유학시키는 게 더 싸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뉴욕 플러싱에 가면 학원이 여럿 있습니다. SAT (미국의 일종의 수능)를 준비해 주는 학원도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애들을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내긴 했는데 학교수업을 쫓아가지 못한다는 판단을 부모님들이 하셨나 봅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셈이죠. 네, 모순입니다. 한국의 사교육을 받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미국에 왔는데 또 미국에서 사교육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교포들이 모여사는 뉴욕 플러싱이 아닌 교외지역에 사는 이민 2세들은요. 학원 안 다닙니다. 보통 지역의 중고등학교 잘 마치고 대학교 갑니다. 과외고 학원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대학 입학을 위해서 그 지역에서 방과 후 활동, 오케스트라든지 축구라든지 지역 봉사활동이라든지 등은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해하는 과외고 학원은 없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공교육 시스템이 큰 문제가 있어서 내가 사교육을 받은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네 문제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문화와 사고방식이었겠죠.
예시 3.
요즘 자살률이 "세계 최고"로 높다며 미디어와 정부에서 난리입니다. 정신 건강 업계에서 일하는 저로서는 이 난리가 반갑습니다. 세계 최고가 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되었는데 이제야 난리가 난 게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정부와 미디어가 관심을 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살 충동이 있는 분들과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도움이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단지 자살이 사회 외적인 시스템 때문에 혹은 뇌가 잘못 판단을 해서 등의 단순한 접근을 고집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자살이라는 행동이 다양한 원인과 요인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특히, 문화와 가치관에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걸 정부와 미디어가 다뤄주면 좋을 것 같아요.
특히, 미디어는 "극단적인 선택"이라면서 음조를 낮추어 마치 자살이 선택인 것처럼 얘기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자살을 한 유가족 등을 고려한 표현인 것 같긴 합니다. 알겠습니다. 알겠는데요. 그러면 자살이 마치 내가 어쩔 수 없으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으로 들립니다. 자살은 선택할 수 있는 한 방법인 건가요? 그래서 저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이 불쾌합니다.
자살은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 잘못된 행동입니다.
예시 4.
저도 14개월 아기를 키웁니다. 출산율 최저라는 꼬리표는 오래전부터 있었다네요. 그런데 지하철을 타면 정말 아이들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임산부석에 임산부가 앉아있는 걸 드물게 봅니다. 진짜 아이들이 없긴 없나 봅니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도 자살처럼 다양한 복합적인 원인과 요인으로 인한 결과겠죠. 그런데 정말 시스템이 잘못되어서 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회 시스템이 엉망이라서 아이를 낳지 않는 거다? 정말일까요? 물론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수는 없죠. 그런데 그게 다일까요? 정말 이런저런 이유, 집값이 비싸서, 직장 때문에, 높은 사교육비 때문에 일까요?
저는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는 질문을 고쳐서 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이유가 충족된다면 아이를 낳으시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해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러면 생각해 보겠다"라고 답할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당장 낳겠다."라고 대답하시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저는 문화와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서 아이를 낳지 않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생각해 보겠다."라고 하지 않을까요? 아이를 낳는 것보다 자신에게 더 중요한 일들을 해야 하니 아이를 낳지 않는 거겠죠. 좋은 직장에 다니고, 돈을 더 많이 벌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하고, 자기실현도 하고 등등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들이 많으니까요.
자신에게 중요한 일들, 다른 가치관을 지닌 분들을 판단할 자격은 제게 없습니다. 반대로 누구도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전 생각합니다. 가치관은 일종의 기호인데 제가 짜장면을 좋아한다고 네가 잘못된 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전 웃겠죠?
저도 아이들이 많아지면 좋을 것 같긴 합니다. 그러면 제 아이에게 친구들이 더 많이 생길 수 있는 거니까요. 어린이집에도 친구가 달랑 2명밖에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출생률을 올릴 수 있는지 모릅니다. 반면,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가치관을 어떻게 바꾸나요? 짜장면이 좋은데 갑자기 내일부터 짬뽕을 먹어야 한다고, 짜장면은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요? 기호와 가치관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것인데 바꿀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지금 정부와 미디어가 출생률에 대해서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문화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조금이나마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현금성 지원에서 멈추지 말고요.
첫 단추는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겠죠. 제 생각에는 현행 교육과정에도 포함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성교육과 더불어서 다른 성별, 엄마, 아빠, 가족이 무엇인지, 연애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이런 것부터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꼭 가르친다기보다는 아이들이 생각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 토론하고 하면 금상첨화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