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치도치상 May 04. 2024

나 상처받았어

정신적 상처, 트라우마는 영원히 치료 불가능한 걸까 

"야, 피가 나는데?"

얼굴 하관 쪽에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아팠습니다. 여드름이 터졌던 겁니다. 화농성 여드림이 턱에 크게 났었거든요.  

"야, 미안해."

저를 뒤돌려차기로 가격한 친구는 사과를 했습니다.  

"괜찮아."

저는 억울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그랬습니다. 저는 기숙사를 탈출해서 피시방을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꼭 자주 가던 애들은 걸리지 않는데 저처럼 처음 기숙사를 탈출하는 애들은 걸리기 마련이죠. 네. 기숙사 사감한테 딱 걸린 겁니다. 다른 애들은 모두 빠져나갔는데요. 


저 때문에 그날 기숙사 새벽 점오를 했고, 아침에 피시방에서 무사 귀환한 애들이 죄다 걸렸던 거죠. 사감은 반성문을 쓰고 부모님께 전화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거부했습니다. 반성문이야 열장이야 더 쓸 수 있는데, 부모님께는 죽기보다 알리기 싫었거든요. 그 날밤 기숙사를 탈출했던 아이들은 저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끈질겼습니다.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그중 싸움 좀 했던 아이가 욕을 하면서 제게 싸움을 걸었고요. 


싸움이 일어나자 패거리 중 한 명은 제 안경을 벗겼습니다. 앞이 보일리가 없죠. 그 아이는 태권도 스텝을 좌우로 밟더니 발차기를 시전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운동신경은 있었던 터라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이리피하고 저리 피하고 있었습니다만. 결국 뒤돌려차기에 여드름이 터진 겁니다. 세게 맞지는 않았는데 곪아 있던 게 터진 거죠. 


벌써 이십 년도 지난 일이네요. 여드름이 터진 거야 뭐 큰 상처는 아니었습니다만. 가끔 생각이 납니다. 지금이야 억울하지는 않지만요. 그때는 그랬습니다. 싸움 좀 한다는 패거리에게 둘러싸여서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제 모습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상처가 있습니다. 보통 이 상처를 트라우마라고 부릅니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정신적 충격 혹은 고통으로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불안한 증세를 겪는 현상을 말합니다. 


 보리스 시륄니크(Boris Cyrulnik)는 트라우마, 아이들이 갖고 있는 내면의 상처를 연구하고 도왔던 심리학자입니다. 그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제2차 대전이 발발할 즈음이었습니다. 나치즘의 영향력 확대로 유럽에 살던 모든 유태인들은 공포에 떨었고 그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치 군인들에게 잡히기 전날 밤 보리스의 부모는 보리스를 양부모에게 미리 맡겨둡니다. 부모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강제 노동 끝에 사망합니다. 


그러나 양부모는 현상금에 눈이 멀어 보리스를 나치에 고발합니다. 보리스 역시 나치 군인들에게 끌려갑니다.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기 전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유태회당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는 유태 회당의 천장에 숨어 며칠을 보내고 극적으로 탈출합니다. 그 후에 농장으로 숨어들어 일하던 중 전쟁이 끝나고, 그는 양육시설에 맡겨져 양육 시설에서 자라납니다. 


 보리스는 자신의 비참한 어린 시절과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의사가 됩니다. 그는 자기가 걸어온 삶에 비추어 이런 질문을 합니다. 누구는 상처로부터 회복이 가능해 보이는 데 누구는 회복이 불가능해 보인다. 탄력 회복성(Resilience)은 어디서 오는가? 


보리스에 따르면 회복력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통해서 키워나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회복력은 다른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고 정서적인 교류를 통해서 자기를 성장시켜 얻게 됩니다. 흔히 강건하고 굳건한 사람들이 상처로부터 회복이 빠른 사람들일 것이라고 보지만, 보리스의 연구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서적으로 풍부하고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는 사람들이 더욱 회복력이 있다고 합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상처를 이만큼 받았으니까 너도 한번 받아봐라는 식으로 세상을 삽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상처를 지녔기에 다른 사람이 지닌 상처도 이해하려고 하고 공감하려 합니다. 둘의 차이는 상처로부터 회복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상처를 잊으라고, 강건하고, 굳세어야 한다고 강요받은 사람은 회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 교류를 통해서 상처로부터 회복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즉, 문제는 상처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상처로부터 어떻게 회복되었는가에 있습니다. 상처가 회복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상처에 함께 아파할 줄 알고, 결국 다른 사람의 상처를 위로하고 낫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상처가 있습니다. 생채기를 낸 사람, 그에게 상처에 대한 일정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게끔 하는 것은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의 몫입니다. 마치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하는 것처럼요. 상처가 있다면 상처에 약을 바르고 회복될 수 있도록 충분히 휴식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 십년도 넘은 일입니다. 저에게 뒤돌려차기를 했던 친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패거리들도요. 그 때야 억울했지만 지금까지 그 감정이 남아있지는 않거든요. 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상처가 회복되는 것을 도우면서요. 


참고문헌 

콜린 외 공저. (2013) 심리의 책. 지식 갤러리. P. 15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