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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 Sep 05. 2023

여자가 멀쩡한 정신으로 아이 둘을 낳게 되는 과정   

어쩌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제목 <여자가 멀쩡한 정신으로 아이 둘을 낳게 되는 과정>은 책 <<돌봄과 작업>> 정서경 작가님 편에서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아이가 이미 하나 있지만 또 다른 아이를 낳는 일은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첫 아이가 두 돌 즈음 지나자 혹시 둘째를 가지면 어떨까에 대한 생각을 최초로 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 있어 그렇게까지 한 가지 일을 오래 고심한 일은 없었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이만큼 깊고 넓은 스펙트럼으로 진지하게 다가간 최초의 분야. 아이를 낳고 난 후 벌어질 일들을 다각도로 상상해 냈다는 사실에, 내가 이토록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구나 놀라고 만다.     


 - 둘째를 낳는다면? 나는 회사를 계속 다닐 것인가? 그렇다면 둘째는 누가 키우는가? 회사를 그만둘 것인가? 그럼 돈은 누가 버는가?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아프게 된다면? 돌봄 공백이 생길 경우 나는 또 어디서 어떻게 도움을 구해야 하나.      


 한 번의 경험으로도 충분한 육아 고충이 두 세배로 차고 넘칠 것이 눈에 뻔한 그 길을 나는 미치지 않고서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머리털이 온전하게 보존된 중년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얄팍한 커리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이를 핑계로 매번 빠지게 되는 모임을, 친구들을 나는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남편과 나의 관계가 부서지지는 않을까. 나의 노후는 과연 안전한가.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나의 온 인생을 들여다보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보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더하고 빼지 않고 무턱대고 한 생명을 받아들일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온 생애가 같이 온다는 말처럼, 두 번째 아이가 나에게 온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껏 유지한 세 가족 체제가 뒤흔들리는 변화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제로퍼제로


 ‘둘째를 낳는다’ 면으로 시작하는 가정법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너, 진짜 할 수 있어? 또 그 기나긴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 갈 자신 있냐고.” 나는 나를 마음껏 몰아붙이다가 결국엔 “나는 온전히 나로 살고 싶어. 두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나는 꽤나 이성적인 사람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 모든 상상력을 성급히 갈무리 지었다. 내 그릇은 두 아이를 품을 만큼 크지 않다고, 이번 생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건 내 알 바 아니라고 털어낸다. 나는 멀쩡한 여자였으므로.     

      

 그런데 말이다. 그건 내 알바 아니라고 자뭇 외동확정이라 말하고 다니던 나는 주위의 사람들이 둘째 소식을 전해올 때마다 미어캣처럼 머리털을 곤두세우며 놀랐다. “뭐라고? 두울째?” 아니 다들 육아가 힘들다고 하면서 둘째를 낳는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나만큼 육아가 힘들지 않은 건지 혹은 힘들지만 그럼에도 또 한 명을 더 키워보겠다는 마음이 큰 사람들인 걸까. 그렇다면 나는 그만큼의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인 걸까. 누군가의 둘째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내 마음은 이토록 어지러워졌다.      


 그러곤 곧 어떤 감정으로 휘몰아쳤는데 바로 “나도 둘째를 낳아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질문으로 곧장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그래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어마무시한 ‘답 없는 출구’ 속으로 수없이 드나드 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쩌면 나도 두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했다. 놀이터에서 함께 노는 형제들이나 학교를 갈 때 서로의 손을 붙잡고 등교하는 남매들 그리고 아직 어리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나름대로 내 아이와 짝을 맞춰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약간의 부담감이 일렁였다. 하지만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아이를 외롭게 만들지 않기 위해, 나중에 부모 장례식장에 홀로 남겨질 아이를 위해”와 같은 어떤 목적을 위해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건 내가 생각하는 바가 아니었다. 우리가 만들어온 ‘세 가족’이 이루어놓은 작은 우주에서 함께 뛰놀고 다투고 화해하며 결국에는 서로를 사랑할 존재를 만나느냐의 문제였다.   



   

이렇게 까지 마음을 먹게 된 데에는 코로나 19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기도 했고 나의 원가족의 문제가 결합하기도 했다. 큰 아이가 여섯 살이 되자마자 우리는 “생기면 낳자”라는 어정쩡한 말로 두 번째 아이를 초대하고자 용기를 냈다. 어쩌면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영원히 하지 않았을 용기일지도 모른다.           


치솟는 물가, 불안정한 고용 현장, 삶을 뒤흔드는 기후 위기 등 말도 못 하게 살기 팍팍한 이 지구에 새로운 아이가 탄생했다. 둘째 고민은 낳아야 사라진다는 말처럼 나는 더 이상 둘째 고민은 하지 않는, 그러나 멀쩡한 정신으로 두 아이를 낳은 여자가 되었다. 일생일대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고 가장 놀랍고도 대단한 결정이었기에 나는 내가 참 대단하다. 스스로 그 기나긴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와 다시금 아이를 품고 세상에 내놓고 온갖 생의 감각을 느끼고 버무리며 하루하루를 멀쩡히 살아내고 있다.


당신도 참 대단하다. 이미 한 아이가 있지만 또 다른 아이를 품을지 생각하는 엄마들 혹은 그냥 이 땅의 모든 엄마들에게 왠지 애틋하고 뭉클한 감정이 솟아오르는 날이다. 매일매일 우리는 참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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