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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할머니의 사과상자와 분홍 보자기

by 우슬초



아픈데 원인을 모르면 참 답답하다.

원인을 알아야 치료가 가능한 법. 원인을 모르면 치료도 어려워진다.

동물의 경우도 그러하다.


미르는 등을 활처럼 휜 자세로, 저러다 갈비뼈가 부러지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로 격하게 기침을 했다.


"미르가 왜 저래?"


헛구역질까지 하는 미르를 보고 가족들이 걱정스럽게 묻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모르겠어, 나도."


원인을 알기 위해 그동안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처음 미르의 기침 증세가 시작되었을 무렵에 동네 병원 원장님께 말씀드렸더니 동영상을 찍어서 보여달라고 했다. 집에서는 자주 기침을 하던 미르가 병원에만 데려가면 기침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카메라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미르가 기침을 할 것 같으면 재빨리 동영상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촬영한 동영상을 담당 수의사께 보여드렸다.

기관지협착증이 의심된다고 했다.

나는 미르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원장님은 엑스레이 검사를 진행하셨다.

증세는 분명 기관지협착증이 맞는데 엑스레이 소견상으로는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확히 원인을 알고 싶으면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하셨다.


큰 도시의 제법 유명한 병원을 찾아가 봤지만 그곳에서도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그곳의 수의사께서는 확실한 원인을 찾으려면 정밀검사를 해보는 수밖에 없다며 모 대학의 동물병원을 추천해 주었다. 비싼 검사비용이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그즈음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 이번만큼은 꼭 원인을 찾아 제대로 치료해 줄 수 있기를 바라며 대학동물병원에 진료를 예약했다.


매일같이 고통스럽게 기침하는 미르를 지켜보면서 나도 같이 괴로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호흡에 관련된 문제였다.

하루를 살아도 미르가 편하게 숨을 쉬며 살기를 바랐다.


이모 차를 얻어 타고 도착한 대학동물병원에서 인상 깊은 분들을 만났다.

먼저, 대형견을 데리고 온 외국인 부부와 그분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할아버지.

그분들은 우리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분들의 반려견은 몸집이 큰 편이었는데 어떤 견종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오지랖이 발동해서 어디가 아파서 왔는지 물어봤고 놀라운 얘기를 듣게 된다.


"1년 넘게 치료 중인데 병원비로 외제차 한 대 값이 나갔어요."


외제차 한 대 값이라니!!!


나는 꽤나 놀랐다. 반려견의 치료에 그 정도 거액을 지출하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훗날 내가 같은 입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와, 엄청나다!'라는 말을 속으로 연발했었다.


또 한 분, 존경스러웠던 분이 있다. 우리보다 늦게 대기실에 도착한 할머니였다. 체구가 작고 연세가 꽤 많아 보였는데, 분홍 보자기로 감싼 사과상자를 양손으로 들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할머니, 어떻게 오셨어요?"


두꺼운 종이로 만든 사과박스를 바닥에 내려놓는 할머니에게 병원직원이 다가가 여쭈었다.


"우리 애가 아파서 왔어요."


할머니는 분홍 보자기의 매듭을 서둘러 풀었다. 그리고 테이핑이 안 된 사과상자의 윗면을 열어젖혔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사과상자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있던 누런 소형견 한 마리가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봤다. 요즘 말로 적자면 '자브종', 흔히들 말하는 믹스견이었다.


병원 직원이 예약은 하셨냐고 묻자 할머니께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애기 다니는 병원 선생님이 전화로 예약해 줬다고 하던데."


그러나 데스크직원이 확인한 결과 할머니 이름으로는 예약이 되어있지 않았다.


"할머님, 먼저 예약을 하셔야 진료를 보실 수 있어요."


병원 직원분이 안타까워하며 설명을 드렸고, 할머니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하소연했다.


"동네병원에서 못 고친다고, 여기로 가야 살 수 있다고 해서 택시 타고 왔다오."


동네병원 수의사와 할머니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난감해하는 병원 직원에게 할머니가 절박하게 말씀하셨다.


"우리 애 좀 살려줘요."


그분이 어떤 심정으로 먼 거리를, 꽤 많이 나오는 택시비까지 지불하며 달려왔는지 십분 이해가 되었다. 거기 있던 다른 분들도 그 할머님과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날 대기실에 있던 견주들 모두가 할머니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며 병원 직원들이 유연성을 발휘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나도 같은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미르 보호자님!"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르를 데리고 이모와 함께 직원이 안내하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나는 할머니를 몇 번이고 돌아봤다. 어렵게 오신 길이니 진료를 받고 가실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분홍 보자기로 감싼 사과상자,

그 안에 얌전히 들어가 앉아있던 순한 눈망울의 강아지,

사랑하는 개의 병을 고쳐주고 싶어 먼 길을 달려온 할머니.


미르와 함께 했던 추억을 하나씩 꺼내던 중에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할머니의 개는 무사히 진료를 받고 돌아갔을까?

할머니는 그 개와 어떻게 이별하셨을까?


연세가 많은 분들께서 반려견을 키우며 이런 말씀을 하는 걸 종종 듣곤 한다.


"내가 얘보다 하루 늦게 죽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이셨다.

그날 우리가 만났던 할머니도 같은 생각을 하셨으리라.

그만큼 개가 사람에게 주는 사랑은 크고도 깊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반려인들의 개를 향한 사랑 또한 그러하다.

그 사랑의 대상이 '개'라는 이유로 가볍게 여겨지거나 폄훼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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