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지금처럼 지내자는 남자에게 이제 그만 연락하자는 말과 허그를날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대답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두뇌 회전이 멈춘 게 아니라, 망가진 티브이 두들기면 켜지듯이 모든 시냅스들이 연결이 되며 어떻게 내 남자로 만들지 치열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플랜 1. 기회를 놓치지 마라.
매일같이 연락을 하고 주말에 만나던 사이인데 칼같이 끊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무감이나 업무적인 만남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하고 싶어서, 하루종일 대화를 주고받았기에, 계속 카톡창을 열어보게 된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기회를 만들지 고민하던 차에 울렸다. 카톡이.
남자와 동갑이었던 다른 남자 그룹원이 우리를 단톡에 초대했다. 요지는 연수 뒤풀이 겸 술 한잔 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이기에 상냥한 봉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콜! 을 외치고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디데이, 뭔가 쎄하다. 남자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올 거야?"
"가도 돼?"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나 보기 싫어할 거 같아서"
"와"
플랜 2. 술을 마시고 또 마신다.
셋이 조촐한 뒤풀이를 하고 집이 반대방향인 친구와 헤어진 뒤, 습관이 무섭다고 남자가 바래다준다.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지. "술 한 잔 더 할래?"
룸이 있던 이자카야로 기억난다. 알고 들어간 건 아닌데 아주 만족스럽다. 마주 보고 앉아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동생이 선물한 목걸이를 자랑했다. 남자가 자세히 보려고 옆자리로 옮겨 온다. 반짝반짝 빛나는 십자가 펜던트를 만지작 거리다가 키스를 한다.
커다란 펜던트 목걸이를 선물한 동생에게 감사를.
뒤풀이
플랜 3. 온몸 다해 연애한다.
연애가 시작되고 그날도 나를 기다리는 남자에게 달려갔다. 남자가 팔을 벌려 나를 안아주는 줄 알았더니, 몸을 살짝 틀어 헤드락과 니킥을 동시에 날린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화는 못 내고 왜 그러는지 묻자 아주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한다. "재밌지? 친구들은 그러면 좋아하더라." 내가 니 친구니? 여자친구지?
남자는 내 얼굴을 만지는 걸 좋아한다. 부드러운 손길로 뺨을 쓰다듬거나 입술을 스치듯 만진다면 나 역시 좋아했을 텐데 손바닥을 쫘악 펴고 얼굴을 비빈다. 흡사 강아지 등 쓸어주듯 내 얼굴을 쓸어댄다. 몇 번을 웃으며 화장 지워지니 하지 말라고 했지만 자기랑 헤어지고 집에 갈 건데 왜 그러냐며 이해를 못 한다. 너는 나랑 헤어지고 집에 갈 건데 내가 니 바지 벗겨도 되는 거니? 여자에게 눈썹이란 그런 거야.
플랜 4. 준비된 한방을 날린다.
좋아하는 마음 반, 오기 반으로 시작한 연애에서 오기가 빠져나가고 사랑이 들어왔다. 알면 알수록 진국인 이 남자와 정말 결혼이란 걸 하고 싶다. 원하는 걸 다 해주는데 결혼하자는 말을 안 한다. 연애기간이 6개월이 넘어가면서 연말이 다가오고 이렇게 그냥 30대 중반을 맞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혼전 임신? 고민 안 한 건 아니지만 내 스타일 아니다. 그리고 넘어야 할 가장 높은 산인, 연상연하를 반대하시는 남자의 부모님한테 아이부터 디밀고 시작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살면서 부모님 말씀을 한 번도 거스른 적 없는 착실한 남자와 이렇게 결혼하기엔 내 자존심이 에펠탑이다.
그리고 그날이 오고 말았으니...
12월 31일 남자손에 이끌려 간 예술의 전당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며 베토벤 합창과 함께 불꽃을 터뜨렸다. 추운 날씨에 더 꼭 붙어서 불꽃놀이를 보고 집에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남자는 뿌듯해하며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