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나한테 청혼하라고! 가 생략된 이 말을 남자는 알아 들었을까? 그래도 나름 시험 보고 들어간 직장에서 밥벌이하는데 이 정도는 알겠지. 이것도 모르면 앞으로 이 험한 세상 같이 헤쳐나갈 수 없겠다.
기. 기다림의 철학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고 밥을 먹고 근무를 하고 퇴근을 한다. 바뀐 거는 그 후의 일상이다. 일찍 집에 가봤자 무한 재생될 오만 생각이 버거울 테고,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건 엄마의 질문이었다. "요즘 무슨 일 있니?" 있지만 조만간 좋은 일 만들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큰 딸의 의지였다. 그러려면 당분간은 기다려야 하고 그 기다림이 조급함을 가져오면 안 되니 즐기기로 했다.
남자와 연애를 하는 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던 잔잔한 영화도 봤고, 쇼핑도 하고, 맛집도 가고, 약속이 없으면 결혼한 동생네 집에 가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선수권 대회를 준비하는 것처럼 지냈다. 너무 집중하며 잘 먹어서 살마저 쪘으니 우울감 해소를 위한 폭식으로 포장하자.
아, 물론 남자의 연락은 없다.
승. 기다림의 흔적
그날은 나의 연애사를 알고 있는 동생들과 술을 마시며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안 해도 됐다. 퇴근 후 명동에 위치한 맛있다는 고깃집에서 참이슬 프레쉬를 들이키며 '연락 오겠지?' '올 거야!' '안 오면 딴 남자 만나!' '근데 연락 오겠지?'를 반복하며 먹어라 부어라를 하던 중 옆 테이블에 양복 무리가 자리를 잡았다. 술을 마시다 보니 이야기가 섞이고 술잔이 섞이고 명함이 돌아다니는데, 고등학교 선후배가 서로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우연으로 자연스레 테이블은 합쳐졌다. 2차로 데낄라를 외치며 홍대까지 이동해 먹고 마시고 놀다 집에 왔는데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직접 커플템으로 만들어서 하고 다녔던 묵주 팔찌가 사라졌다.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지나친 모든 곳에 연락을 해 봐도 없다 하니 우울한 마음 담아 카카오스토리에 흔적을 남겼다. 이 날 많이 울었다.
아, 손이 오그라든다.
이 스토리를 제외한 모든 스토리를 비공개로 전환하였고, 이틀 후 이 글도 비공개로 전환했다. 카카오 스토리에 데이트 사진들이며 내 생각들을 꾸준히 올리는 걸 알고 있는 남자이기에 분명히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전. 기다림의 결과
모든 스토리가 비공개로 전환된 그날, 드디어 연락이 왔다. 울리는 전화에 바로 받고 싶은 마음은 친구와 약속 중이라는 핑계로 고이 접어 두고 두 번을 받지 않으니 '문자가 수신되었습니다.' 만나자는 남자의 문자에 빼곡히 잡아놓은 스케줄 중에서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날에 보기로 했고, 그날 역시 다른 일정이 있었기에 밤늦은 시간으로 약속을 정했다.
나의 동선을 알고 있던 남자는 내 일정이 끝나는 곳으로 와서 기다렸고 함께 우리 집 앞으로 가는 동안에도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결혼하자고 할 것도 아닌데 만나자고 한 거면 천하의 몹쓸 놈이 되는 상황에서 분명해야 할 말이 있을 터였다. 드디어 집 앞에 도착하고 뒷자리에 숨겨놓은 꽃과 함께한 청혼은 내가 생각한 아름다운 결론과 일치했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벅차오르니 정말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내가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부모님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몇 차례 선도 보고, 나에 대한 사랑과 나의 됨됨이도 어필하고, 그 무엇보다 출근 전에 성당에 들러서 성체조배를 빠지지 않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뜻을 어기면서 연상과 결혼을 하려는 아들의 어떤 모습을 보고 허락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건 남자의 노력이었다. 그렇게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재개하고 드디어 부모님을 뵙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아침부터 아니 전날부터 피부관리도 하고 인사말도 연습하고 카카오스토리에 떨리는 마음 살포시 남기고 잠이 들었다.
결. 기다림의 반전
약속시간 보다 이른 시간에 데리러 온 남자는 산정호수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분명 집에서 뵙기로 한 거 같은데 긴장하며 따라 들어가니 부모님은 보이지 않으셨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키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헤어지고 오래."
이번에는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거 같았다. 눈물이 차오르지만 남자에게 물어봐야 했다. 어떻게 할 건지 어렵지만 물어봐야만 했다. 인사를 하러 가기로 한 순간에는 찬성을 하셨는데 어제 갑자기 헤어지고 오라 하셨고, 부모님의 반대를 꺾을 확률은 10% 안쪽인 거 같다. 힘들 거 같다. 그래도 방법을 찾아보자.
솔직한 남자의 말에 안도가 되었다. 매 순간이 신중하고 솔직한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사실임에 틀림없고 본인이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으니 분명 찾아낼 것이다. 이 남자는 그런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