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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밍 Jun 24. 2019

어른들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다시 아이가 되어가는 그분들..

나이 들면 애가 된다잖아요..


잠시 미국에서 지내야 했던 일 년 여 시간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어머님의 칠순 생신이 있던 해였는데, 미룰 수도 당길 수도 없었던 일정이라 난감했다.

매 해 돌아오는 그냥 그런 생신이라면 모르겠으나, 노년의 마지막 잔치가 될 수 있는 칠순이라 우리 부부는 내내 마음에 걸려했었다.


근데 사실 그런 우리 마음과는 달리 당사자이신 어머님은 아주 쿨하셨다.


"니들 돌아와서 하면 되지"




미국에서 지낸 지 4개월쯤 지났을 때, 어머님의 칠순 생신이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고민 고민하던 우리 부부는 "니들 돌아와서 하면 되지"라는 어머님을 말씀을 철떡 같이 믿고, 평소 생신 때처럼 전화를 드리고 용돈을 부쳐드렸다.


"칠순인데 같이 못 있어 드려서 죄송해요"

"됐다마, 와서 하면 되지 뭐"


그렇게 우리는 뭔지 모를 불안함과 찝찝함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을 받았었다.


미국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짐 정리가 끝나자마자 우리 가족은 귀국 인사 차 시댁을 찾았다.

시끌벅적 상봉식(?)을 마치고는 식사를 하는 자리, 아버님이 대뜸 한소리를 하셨다.


"내, 너들 안 볼라 했다!"

"네?"

"네 엄마 칠순인데, 아무 연락도 없고, 선물도 없고, 그러는 거 아니다!"


이미 시기 및 상황에 적절했던 세리머니를 했던 우리로서는 아버님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적잖이 당황했다.

우린 나란히 세리머니의 주인공이셨던 어머님을 바라봤다. 아버님의 오해를 풀어주실 거라는 기대와 함께...

하지만, 어머님의 말씀은 우릴 더 당황하게 했다.


"그래, 내가 아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무 섭섭하더라"

"?!"


당신 생신 일이니, 당신 입으로 말하기 구차스러워서 말씀을 안 하셨다고 했다. 마침 아버님이 대신 말을 꺼내셨으니, 이왕 말 나온 거 얘기하신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그 후 십 여분 가량을 먹던 숟가락을 어정쩡하게 잡은 채로 두 분의 역정을 들어야 했다.


분명 괜찮다고 하셨고, 그럼에도 우린 빼먹지 않고 평소 생신대로 축하인사를 건넸고, 당신 역시 기분 좋게 인사를 받으셨음에도, 몇 개월 지나 생각하니 억울하고 서운하셨던 건가 싶었다.

용돈도 안 받으셨다고 하셨다. 보내드렸다 하니, 들어온 게 없다고 하셨다.


그냥 들어 넘기지 못하는 못돼 먹은 성격을 가진 나로서는 그저 네네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목조목 최대한 나긋나긋 설명에 들어갔다. 소용없었다.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억울하고 서운하셔서 그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셨다. 난 나대로 억울하고 분통 터졌다.  당장 통장 내역이라도 훑어야 하는 심정이었다.




우리 친정아버지는 올해 일흔아홉이시다. 오랜 기자 생활 덕에 남다른 예민함과 집요함을 자랑하신다. 젊은 시절 날고 기셨다는 아버지는 지지하던 대통령 후보자가 낙선했다는 이유로 근 3년간 TV도 보지 않으셨던 강단있고 소신 있는 분이시다.


그런 아버지는 나이가 드시면서 그 집요함과 예민함이 약간 이상한 방향으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내가 담배꽁초를 어디다 버렸는지 모르겠다.. 불나는 거 아니냐?"


피웠던 담배꽁초는 꼭 확인해 물이 담긴 병에 넣어두셨다가 버리셨는데, 숫자가 맞지 않으면 하루 종일 찾아 헤매셨다. 마치 군인들이 사격훈련 후 탄피를 찾아 헤매듯이..


온 식구가 3시간 거리의 농장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기억나지 않는 담배꽁초의 행방에 다 왔던 길을 돌려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어느 날은 동사무소에서 신분확인 차 건냈다 돌려받은 주민등록증의 행방을 모르겠다시며, 새벽시간 온 식구가 자는 방의 불을 다 켜고 찾아 헤매셨다. 무심결에 주머니에 넣으셨던 걸 찾아내 지갑 안 쪽에 꽃아 두신 후에야 다시 잠자리에 드셨다.


장기간 여행을 가기라도 해야 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새벽부터 분주하셨다.

집안 구석구석 뒤져 성냥과 라이터를 모으셨다. 그리고 그것들을 한데 모아 비닐팩에 담은 뒤 냉동실에 넣으셨다.


"아빠! 뭐 하시는 거예요??"

"불 나~"

"그게 왜 지 혼자 불이 나요~?"
"모르지, 이게...."


그렇게 혼자만의 세상에서 소설을 쓰셨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스트레스가 되셨던 걸까..30여년간 피셨던 담배를 한번에 끊어버리셨다.)


괜한 일에 혼자 서운해하셨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설명하고 이해시켜드려도 그저 당신만의 세계에, 생각에 사로잡혀 계셨다.


옛날이야기를 나누다가 울컥 눈물도 흘리셨다. 별 일 아닌 일에 혼자 화가 나셨다가 혼자 또 풀어지기도 하셨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아빠도 참.. 애도 아니고..'






몇 년 전 감동적으로 본 영화가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세기의 미남인 불혹의 브레드 피트의 리즈시절(CG의 도움이긴 하나)을 볼 수 있다는 앙큼 발랄한 목적이 있었지만, 내용 자체가 주는 감동과 깊은 울림 때문인지 내가 꼽는 명작 중 하나에 들어간다.


조로증을 갖고 태어난 아이. 쭈글쭈글한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한 양로원 앞에 버려진 벤자민은 양로원을 운영하며 노인들을 돌보던 마음 좋은 여인의 손에 길러진다. 노인의 모습으로 그곳 노인들과 함께..

그 모습도, 그 행동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십 년의 나이차에도 세대차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잘 소통하고 더 잘 이해한다.



노인과 아이는 결국 같은 내면을 갖게 되는 건가..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은 청년시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서로의 시간이 거꾸로 가는 탓에 결국은 각자의 인생을 살게 된다. 세월이 지나 노인이 된 여인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옛 마을로 돌아오고, 아이의 모습이지만, 치매 노인이 된 벤자민 역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양로원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재회한다.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벤자민은 갓난아이가 되고, 노인이 된 사랑하는 여인의 품에서 눈을 감는다.

갓난아이가 된 벤자민이 여인을 가만히 바라본 후 편안히 눈을 감는 장면은 떠올릴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은 결국 0에서 시작해 상승했다가 정점을 만난 후에는 다시 0으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겉모습은 한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그 내면은 결국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결국 그렇게 아이가 되는 게 아닐까.

 



어른들은 확실히 나이가 들면서 아이가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태도로 우리를 당황시키시고, 때론 우릴 분노케 한다.


우린 어르고 달래보기도 하고,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따져보기도 한다. 같이 화를 내고 한바탕 싸우기로 하고, 모른 척 내버려두기도 한다. 그랬다가 괜히 마음이 아파 다시 돌아보기도 하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입장만 바뀌었을 뿐이지 우린 그분들과 여전히 동일한 관계를 형성 중이다.


대책 없이 떼를 썼던 기억, 말도 안 되게 변덕을 부렸던 기억, 괜히 오해하고 내 감정에 빠져 울며불며 진상을 피웠던 기억.  어린 시절 그렇게 속을 썩였던 우리가, 부모님은 얼마만큼 이해가 되셨을까? 얼러도 보고 달래도 보고, 회초리도 드셨다. 대책 없던 떼 부림에 같이 호통을 치시고 매를 드셨다가 걱정되는 마음에 또 아이의 방문을 슬며시 열어 보셨을 테다.


노인이 되신 어른들은 아이가 되셨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드려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서너 살 된 아이에게 그런 설명이 무의미하듯이..


이젠 우리 차례인가 싶다. 어린 시절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행동을 생각을 그저 사랑으로 보듬어 주셨던 어른들을, 이제 우리가 그렇게 이해해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결혼한 지 14년.

아이 셋을 낳고 키우며 세상과 가정과 부대끼며 살다 보니, 세상 야리야리하던 눈물 많던 그 소녀에게도 탄탄한 감정의 맷집이 생겼다. 시댁이 이제 그리 무섭지 않아 졌고, 부모님에게 아닌 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직 내 맷집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막무가내"의 일들이 종종 벌어지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젠 우리 차례야"라는 생각을 하려 한다. 어린 시절 바닥에 드러누워 바비 인형을 사달라고 세상 떠나가라 진상을 부렸던 그때를 생각하며, 말없이 일으켜 앉혀 얼르고 달래줬던 부모님을 떠올리며, 마음 가득 이해해 보려 한다.


확실히 그분들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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