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그 약속, "우리 모녀 사이처럼 지내보아요"
며느리여서 며느리로만 살려는데, 자꾸 딸이 되라시면...
결혼을 하고 나서 우리 중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진부하고 식상한 관계 제안.
“우리 모녀 사이처럼 지내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모녀처럼 지내는 게 가능할까?
실제로 간혹 그런 고부관계를 보기는 한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친정엄마에게 하듯이 반말로 얘기를 하기도 하고, 그런 며느리를 시어머니는 허허하며 받아주시고.
일반적이지 않아 보이는 이 관계는 들여다보면 사실 한쪽의, 엄밀히 말하면 전적으로 시어머니의 완전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야자타임을 할 때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도발을 전적으로 받아주는 형태와 같은..
깨 놓고 말해 미션 임파서블.
"널 딸처럼 생각한다"
시어머니로부터 이 말을 듣게 되면 우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 테다.
'딸처럼 생각하신다고? 그럼 내가 명절에 아파서 안 간다고 해도 이해해 주시려나?'
'시댁에서 그럼 늦잠 자도 될까.. 딸인데?'
'친정엄마한테 하듯이 이것저것 부탁할 수 있을까?'
'부부싸움하면 내 편 들어주시려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며느리로 대하시면서 말로만 딸이라고 말씀하셔..'
우리 시어머니가 들으시면 좀 서운해하시려나… 그래도 며느리 입장에서 시어머니는 그저 시어머니이다.
결코 친정엄마에게 하듯이 대할 수 없다. 시어머니 역시도 진짜 "딸"처럼 행동하는 며느리를 진심으로 받아주실 수 있을까?
어머니는 거짓말을 하시는 게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딸처럼 대하시려 부단히 노력하신다.
당신이 처음 시집와서 겪은 시댁과 그 당시의 엄하고 무서웠던 시어머니를 생각해볼 때면, 당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새벽부터 일어나 문안인사에, 매 끼니 차려 바치던 식사에, 부르면 군말 없이 달려와야 했던 그 시절의 며느리.
당신이 시부모님을 모시던 방식에 비하면, 지금 며느리는 거의 딸과 진배없이 편하게 대해주고 계신 게 맞다.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과 함께 집으로 온 며느리가 고마워, 오느라 애썼다며 이것저것 맛난 것도 내어주시고, “딸”처럼 다른 거 안 시키고 설거지만 하도록 하고 있다. 매일 저녁 시부모님 이부자리까지 봐드리던 젊은 시절의 당신과는 달리, 손수 아들 며느리가 잘 방에 이부자리도 가져다 놓았다. 보일러도 빵빵 히 틀어놓았다. “딸”을 대하듯이..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최선의 노력을 하셨다.
하지만 며느리 입장은 다르다. 일단 시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가시방석이다. 그냥 앉아있으라시지만, 어머님이 엉덩이를 떼실 때마다 내 엉덩이도 저절로 들썩인다. 딱히 힘든 일이 아니지만, 하하호호 얘기꽃을 피우는 다른 집 식구들을 등 뒤에 두고, 싱크대에 머리를 박고 설거지를 하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심정적으로 불편한 일이다. 딸처럼 대해주시려 애쓰시는 게 눈에 보여 감사하지만, 내 맘은 이미 내 맘이 아니다.
이러다 보니, 딸처럼 대해주는대도 불편해하는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서운해진다. 서운함이 쌓여 결국 불쑥, 버럭 진심이 나와버리기도 한다.
며느리 역시 아직도 시어머니가 어려워 죽겠는데, 생글생글 딸처럼 행동하려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미친척하고 딸처럼 남편 흉을 늘어놨다가 결국 한 소리 들었다.
"그만해라 얘, 니 남편 같은 남자 없다"
누구나 아는 불편한 진실.
미안한 얘기지만, 어머님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
그걸 절대 탓하자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아이를 키워보니 그 입장 백 프로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모성의 본능을 거스르면서까지 "굳이", "왜" 며느리와의 "모녀관계"에 집착하시는지 모르겠다.
(정말 모녀관계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딸 같이 싹싹하게 굴어주는 며느리"를 바라시는 게 본심이 아닐까 싶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화목한 고부관계를 위해 엄마와 딸처럼 지내볼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뭔가 이슈가 생길 때면 나도 모르게 숨어있는 의도를 찾거나, 피할 구실을 찾게 된다. 우리 역시 결정적인 순간엔 "며느리"로 선을 긋지 않는가?
굳이 딸처럼 다가가려고 무리하지 마라.
누가 맞고 누가 틀렸고의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생각 차이와 세대차이가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그냥 그 관계 자체에서 생성되는 불편함과 불가능함이다.
해서, 고부관계는 모녀관계가 결코 될 수 없다.
두 사람을 위한 최선은 그저 서로 존중하는 “건강한” 고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친정엄마가 되려 하지 말고 그저 좋은 시어머니가 되면 된다.
젊은 며느리를 이해하고 배려해주면 된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바람직한 며느리가 되면 될 뿐이다.
서로 간의 예의를 지키며 적정한 선을 유지하면서, 결혼으로 인해 새로이 생성된 이 관계를 잘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고부관계는 남편, 아들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평생을 보낸 두 여성의 만남이다. 새롭게 형성된 관계를,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한 이상적인 관계에 대입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새롭게 형성된 “고부관계” 그 자체로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면 된다.
세월이 가면 둘 사이에 친정 엄마와는 다른 끈끈함이 형성되기도 하고, 다른 형태로 더 가까워지기도 한다.
갈등과 반목, 화해를 겪고 신뢰가 쌓여 단단해진 고부관계는, 결혼생활에 있어 모녀관계와는 다른 또 다른 의지처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 서로 모녀관계에 대한 로망은 이제 그만 내려놓으시길...
어머니~ 저 딸 못해요~ 그냥 며느리 할게요~
인생 최대 난제_고부갈등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