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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밍 Apr 25. 2019

명절을 대하는 자세에 대하여

득(得)보다 실(失)?


설이나 추석이 되면, 신문이나 뉴스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명절 증후군’이라는 아이템으로 한 꼭지씩 기사를 내보낸다. 명절 음식이니, 귀경행렬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는 걸 보니 대한민국 최대 명절인 설이 되긴 됐나 보다.


어김없이 돌아온 명절


하루 종일 기름 냄새 맡으며 음식을 마련해야 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하는 자괴감으로 괜히 남편을 한번 노려보기도 하고, 이번엔 지난번처럼 친정에 가는 시간을 강탈!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벌써 며칠 전부터 남편에게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명절증후군”으로 저기압인 아내 눈치를 보느라 남편도 이미 적잖이 피곤해진 상태이다.


이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명절증후군 전초전이 시작된다.


이번 명절에 당직이 잡혔다는 둘째 동서는 일을 핑계로 명절 당일에 바로 내려온다 한다. 어째 어머님은 순순히 그렇게 하라 하신 모양이다. 일한다고 유세인가 싶은 생각에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동서가 얄밉기 그지없다. 남자들은 방에 모여 앉아 오늘도 어김없이 수다나 떨고 있다. 음식 하는 틈틈이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갖다 바치는 것도 짜증 난다. 엄마를 찾는 어린 조카를 봐야 한다는 핑계로 아이만 안고 있는 막내 동서도 유난스러워 보인다. 사실 나 역시도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애들이 엄마만 찾아대는 통에 애랑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음에도 괜한 짜증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결국은 나와 시어머니만 부엌에서 씨름 중이다. 동그랑땡을 먼저 끝내고 부추전을 구으려는데 어머님이 부추전부터 구으라 다그치신다.

그 순서가 뭐라고… 짜증이 울컥 밀려온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시끌시끌하다.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어진 순간, 굽기가 무섭게 동그랑땡을 집어 드는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고만 먹어!”

머쓱해하며 손을 다시 거두는 아이들에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이놈의 조기구이!

명절 당일 아침…

젤 바쁜 시간이다. 아침부터 방청소를 해야 하고, 다락방에 보관해둔 큰 상들을 하나 둘꺼내 닦아야 한다.

그리고는 전날 해 놓은 음식들을 정해진 그릇에 정갈하게 내놓아야 하는데, 시집온 지 10년이 지나도 이놈의 조기구이를 어떤 접시에 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 접시 말고, 안에 길다란 거 있다”

“이거요?”

“아니 그거 말고 쪼매 길다란 거!”

“이거요?”

“아이고, 야가 시집온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접시 하나 제대로 못 꺼내노!”

그릇 사모으기 좋아하시는 어머님의 찬장 안에는, 이모냥 저모냥으로 생겨먹은 문제의 그 '쪼매 길다란' 접시가 예닐곱 개는 될 거다.  

‘길다란 접시가 한 두 개여야 말이죠, 매년 다른 접시를 내시기도 하시면서…
도대체 그대가 말씀하시는 "쪼매 길다란 접시"는 어떤 접시란 말이오!’





명절을 맞아 불편했던 마음은 아침 차례가 끝난 후 친정 갈 시간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눈치 없이 시댁 식구들과 수다 중인 남편을 보면서 극으로 치닫는다. 아무리 눈치를 보내도 빠져나올 기미가 없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남편을 쿡쿡 찔러본다. 남편은 곧 얘기하겠다며 윙크를 한다.


이제나 저제나 타이밍만 기다리던 남편 때문에 우리는 결국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친정에 도착했고, 오랜만에 동생네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역시 무너졌다. 아쉬워하시던 친정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니 속상하기만 하다.


또 한바탕 시작된 설움..


서울로 돌아오면서 나는 쌓였던 설움이 폭발했다. 귀경 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서러웠던, 억울했던 모든 순간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한번 감정이 터지니, 나도 주체가 안 된다. 이건 아닌데 싶은데도 이미 내 입은 내 입이 아니다. 또 다른 나에 빙의된 듯..).

처가에 늦었다는 미안함으로 하나하나 들어주던 신랑은 점점 격해지며 '정신을 놓아버린' 이 여자의 넋두리에 결국 폭발했다.


“난 뭐 힘든 게 없는 줄 알아? 운전은 쉬워 보여?  매번 명절 때마다 저기압에 짜증내고 투덜대는 당신 받아주는 건 쉬워 보이냐고.. 그만 좀 하자”


대화는 점점 격해지고, 눈치를 보던 아이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서러움이 폭발한 나는 울음을 터트렸고, 남편은 입을 닫아 버렸다.  


전지적 남편 시점

오랜만에 부모님을 찾아뵙는 길이 힘들고 멀지만, 명절은 그 나름의 설렘과 기대가 있다.

남편은 아들 며느리에, 손주들까지 항상 보고 싶어 하셨던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이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번 명절에서 부엌에서 음식 하느라 고생할 아내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명절이 다가오면서 남편은 슬슬 아내의 기운을 살핀다. 웬만한 짜증과 불평은 너그럽게 들어주기로 했고, 내 집에 가 며느리라는 이유로 명절 내내 부엌 대기가 되는 아내에게 최대한 맞춰줄까 다짐했다.


집을 나서는 날 아침. 평년보다 짧은 연휴로 인해 귀경 행렬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때가 된 아내는 조금씩 명절에 대한 불만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누구네 집은 명절에 다 같이 해외여행 간다더만.. 우린 그런 것도 없고”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알면서 왜 그래”

“우리 집에는 언제 갈 거야? 명절 당일에 아침 먹고 바로 가는 거야 알았지?”

“그래 알았어”

“어머님한테 자기가 말씀드려~, 지난번처럼 애들 고모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싫어”
 “알았어, 알았다고”


본가로 내려가는 내내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제발 이번 명절은 싸우지 않고 넘어가야 할 텐데..


사실 남자도 힘들다. 여자들이야 명절 증후군이네 뭐네 하면서 맘 놓고 불평이라도 하고 짜증이라도 내지,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 눈치 보느라 제대로 의사표현도 못한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부싸움이 되어 버린다. 명절이라는 핑계로 내 집에 데려가 '고생' 시키는 일이다 보니 잔뜩 몸을 낮추고 분위기를 살펴야 한다. 그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난 명절엔 차라리 ‘그 꼴난 전 내가 굽고 말지!’라는 생각에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엄마한테 내쫒김을 당했다.  


운전도 어렵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를 한나절. 온 가족을 태우고 가는 혼잡한 고속도로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잠잠하던 통풍이 도졌는지 발목도 시큰거린다. 꽉 막힌 도로에서 액셀로 브레이크로 발을 이리저리 옮기다 보니 점점 더 심해지는 듯하다. 눈도 피로해진다.

집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린 듯 피로가 확 몰려와 방 한편에서 나도 모르게 한잠에 빠졌다. 이를 본 아내가 편하게 낮잠이나 잔다고 빈정대며 흔들어 깨운다. 서운하다.


명절에 집에 내려가면,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설레기도 하지만, 집안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대화 상대를 해 드려야 한다. 사실 좀 피로한 일이다. 아내는 남자들은 하는 일 없이 방 안에서 종일 “수다”만 떤다고 투덜대지만, 방 안에서 하릴없이 노닥거리는 걸로 오해받을 때면 좀 억울하다.

영혼을 반쯤 빼놓고 이 얘기 저 얘기 듣고 있노라면, 방문 밖에서 아내가 시계를 가리키며 한껏 눈치를 준다.

 

‘아차… 처갓집 가야 하는데…’

어디에서 끊고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일어나려니 죄송하고, 분위기를 좀 보자니 아내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그냥 직접 말씀 좀 드리지..’

‘부엌에서 내내 엄마랑 있으면서 자기가 얘기하면 될 걸…’이라는 생각이 살짝 든다.

 

시어머니에게 친정 집 간다고 빨리 나가야 한다고 하는 얘기가 그리 편하게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톡 까놓고, 명절에 본인 부모님에게 인사드리러 가겠다는 얘기인데, 뭐가 저렇게 어려워서 매번 대신해달라는지 모르겠다.  


여보, 내 집이 아니잖아..

사실, 결혼 초반엔 말 한마디 대신 안 해주는 남편이 서운했다. 시어머니와 뭔가 얘기를 섞는다는 거 자체가 불편했으니, 그땐 대신 얘기를 해달라고 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하지만 살다 보니 직접 하는 게 맞긴 하더라.  아침 식사가 끝나고 부엌이 정리되면 이제 우리의 일은 끝났다. 그럼 앞치마를 정리하고 당당히 친정 집으로 향하면 된다. 남편이 대신 얘기해주기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가야 하는 일이다.


명절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녀들은 장성하면서 본인들의 생업을 찾아, 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본가를 떠나 생활한다. 각자 그렇게 바쁘게 살던 자녀들은 추수가 이루어지는 가을에 한번, 해가 바뀌는 설에 한번 그렇게 두 번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각자 생활에 바빠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적었던 형제자매도 고향을 찾는다.

명절은 이렇게 각자 타지에서 생활하던 가족 구성원들이 먹을 것이 풍요로워지는 가을과 새해가 될 때 만나, 고향에서 즐겁게 먹고 마시는 큰 축제이다. (사실 먹고 마시는 것에 여성들의 수고가 필요하다. )

 

자식을 출가시키고 난 뒤 후손들이 보고 싶으신 부모님은 명절이라는 핑계로 아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고,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했던 자식들은 나라가 공휴일로 정해놓은 명절을 기회 삼아 찾아 잠시 일을 접고 고향을 찾는다.  또 평소 보지 못했던 동기들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생각해보니 참으로 아름답고 의미 깊은 날이다.

하지만 즐겁게 먹고 마시는 축제에 이것을 준비하는 여성들의 수고가 필수적이고, 이 수고가 달갑지 않은 주부들은 축제가 축제가 아니게 됐다.  "명절증후군"이라는 말로 함축되는 사회적인 현상만 봐도 그 분위기를 알만하다. 명절 후 이혼율이 급증한다는 조사도 있으니, 뭔가 잘못되긴 잘못됐다. 




"명절증후군"의 직접적 당사자인 우리가 명절을 바라보는 시각을 좀 바꾸면 어떨까.

원치 않는 노동으로 인해 고통받는다는 생각을 버릴 순 없을까.

사랑하는 가족들의 화합을 위해 일 년에 두 번 기분 좋게 수고할 수는 없는 걸까?  


명절은 아이들에게 설렘과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축제이다.  


어린 시절, 경상남도 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명절만 되면 부모님이 예매해 두신 무궁화호 기차의 침대칸을 타고 서울 고모댁으로 갔다. 아빠의 본가가 서울에 있었는데, 그 당시 가장 큰 집에서 사시던 고모 댁에서 명절을 보내곤 했었다.

2층 한편에 넓게 자리한 부엌에서는 큰어머니와 숙모들, 그리고 엄마까지 모여 즐겁게 만두를 빚으셨고, 나를 포함한 사촌형제들은 오며 가며 부엌에 들러 구워놓은 전들이며, 튀김들을 하나 둘 빼먹는 재미를 누렸다.  


큰아버지들과 삼촌들은 거실에 모두 둘러앉아 안부를 물으며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셨고, 아이들도 오랜만에 만난 사촌형제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명절 때마다 멀리(그 당시 진주에서 서울은 천리길이었다.) 시댁을 찾아 음식을 하고 부엌일을 도맡아 하던 울 엄마는 참 수고로우셨을 테다. 어렸던 내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나름의 고달픔과 수고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 수고 덕분에 오랜만에 먼 곳에서 모인 가족들은 즐거운 분위기에서 얘기도 음식도 나눌 수 있었고, 아이들은 명절의 북적임과 풍요로움에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런 것들이 가부장적인 잔재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여자들만 부엌에서 음식을 하고, 남자들은 사랑방에 앉아 갖다 바치는 것들을 여유롭게 먹는 이 광경. (간혹 나를 아는 어떤 지인들은 나를 "가부장적 잔재에 세뇌된 안쓰러운 여성"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명절의 의미를 한번 되새겨 보면 어떨까?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풍요로운 행사에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하는 건 안 되는 일 일까?

사실 명절의 북적임과 준비과정은 아이들이에게도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된다.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어른들에 대한 공경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꽉 막힌 고속도로를 지나 시댁으로 가 기름 냄새 풀풀 풍기는 수고가, 아이들에겐 풍요로운 먹거리로 가득한 축제가 되는 일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농도 짙은 사랑을 받는 기간이기도 하니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명절을 축제로 만들어 준 데는 우리 인생 선배들의 수고가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그 수고를 담당해 보면 어떨까.


우리의 명절이, 당신은 아직도, 여전히, 가부장적 시대의 잔재로만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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