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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29. 2022

오래된 것의 슬픔.

2017. 11. 21.

2017. 11. 21.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새벽에 뒤척이다 빔을 켰다.

믿지 못할 괴담, 그러나 실화인 사건들을 다룬 다큐를 보았다.

하지만 결국 다시 졸려서 잠이 들었는데 가위에 눌렸다.

힘든 밤을 보낸 탓으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우리 집에 숙박하여 만나게 된, 그리하여 아직도 연락하며 지내는 무자녀 부부의 전화였다.

(편의상 A부부, B부부라고 하자.)  


A부부는 우리에게 홀딱 반해서 제주로 얼마 전 이사를 왔고, B부부는 제주도 부동산이 너무 비싸다고 남해에 터를 잡고 있다. 대신 B부부는 제주도를 자주 방문한다.

이들 부부에게서 저녁을 같이 먹자는 제안을 받아서 함께 고기를 구워 먹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했을 무렵, 후식이 나왔을 때 술기운 탓인지 내가 야한 얘기를 하나 꺼냈다.

마침 그전에 나누던 대화 주제가 판타지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장 기억에 남는 판타지 한 정사에 대해 하나씩 얘기를 꺼내게 되었다.

 A부부는 고속도로 갓길 옆 야산과 호주 야영장에서의 경험을 얘기했다.

B부부는 바닷가 불 꺼진 카페 옆과 찜질방을....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는데, 나는 아내에게 허락받고 얘기하겠다고 하니, 다들 나를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니들 손에 죽는 게 차라리 낫지. 어차피 이걸 말하면 아내에게 죽어. 아내가 날 죽일 때 어떻게 하는지 알아?”


그랬더니 궁금한 건 또 못 참는 친구들이라 주먹을 풀고 내 입만 쳐다본다. 그래서 이건 말해 줬다.

“조금씩 말려 죽이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말이야. 와이프가 한 달간 여행 가면서 텔레비전을 처분하고 간 거 아니?”


이 말을 꺼내자 여성들은 ‘그게 뭐?’ 하는 표정인데, 남성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너무 불쌍한 표정으로 나를 위로해 줬다.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거니?"


야한 얘기는 촛불을 켜고....



2017. 11. 22.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새벽 3시 30분에 깼다. 어제 마신 음주 때문에 속이 좋지 않았다.

모과차를 마시고 다시 잠을 청했는데 기차를 타는 꿈을 꾸었다. 좌석 번호가 흐릿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는데 그 와중에 또 깼다.

과음은 역시 숙면을 방해하고 뇌세포와 성기능을 파괴한다.


한 시간 여 잠을 잤을까?

문득 눈을 떴는데 아내가 보고 싶었다.

잠들 때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옆에 없는 게 더 힘들다.

당신의 볼에 가만히 키스하는 상상을 하며 다시 이부자리로 파고든다.

날씨까지 추워졌는데 그녀연락두절이다.


숙소 수영장이라고 한다. 연락 두절될만했네.


아침 6시.

애들 밥을 주러 나갔다. 일상이다.

모로가 잘 가르쳐서 이젠 자기 집에 똥오줌을 싸지 않는다.  아침 6시에 꼬박 일어나야 하지만 이제 애기들 보는 게 훨씬 수월하다.


참! 어제는 라네가 지나가는 관광객을 따라가 사라진 바람에 고생했다.  이웃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라네가 돌아다니고 있다며 신고를 했다. 거의 맨발로 달려가서 라네를 끌고 오는데 주인 속도 모르고 헤벌레 웃고 있다. 늘 애들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없고, 가둬 두거나 목줄을 하는 건 또 싫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가둬 두는 선택을 한다.


애들 단속을 끝내고 땔감을 구하러 나간다.



2017. 11. 23.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아내에게 그동안 보아 온 태국의 집은 어땠는지 알려달라고 문자를 넣었는데 새벽까지 답이 없다.


그녀가 참고했다는 집들,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결국 하루 지나 연락이 왔다. 내가 보낸 톡을 보긴 봤느냐고 물으니 배터리가 없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그냥 잤다고 한다.

참고했다는 집들 사진을 보여줬는데 너무 비현실적이라 어이가 없었다.



내가 너무 연락을 재촉하는 걸까? 아내가 나에게 너무 무심한 걸까?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녀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과 배신감이 서로 마주쳐서 내 마음엔  천둥번개가 치고 있다.

오래된 나와 우리 집에 대해 하나도 묻지 않을 만큼 그곳은 그렇게 좋은 곳일까?


2017. 11. 24.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이제 일주일 남았다.

만남의 시간이 임박해 올수록 조금씩 설렘이 올라온다.

아내는 지금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절망하고 있겠지?

다음 여행은 내가 떠날 차례다. 내가 여행을 다녀온 뒤에 아내의 다음 여행도 있다. (돌아가며 여행을 떠나고 남은 자가 강아지를 보살피기로, 함께 세운 원칙)

그래서 난 여행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다. 그럼 그녀도 이젠 여행을 가지 못한다.


아내에게는 이렇게 말해야지.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행복. 소소한 기쁨들,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다고.

아내에게 복수하게 되니 설렌다.


기분이 좋으니 늘 반복되던 일상도 새롭게 느껴졌다. 애들 씻겨주고 밥 먹이고 청소하고 정원을 다듬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이런 것들이 즐겁다.


해바라기가 모두 눈동자라고 해도, 아내는 나에게서 매력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게 없으니까....


이병률 시인의 대학시절 여자 친구인 ‘이원’이란 작가의 책을 읽었다. ‘산책 안에 담은 것들’이란 책보다는 ‘최소의 발견’이란 책이 훨씬 좋았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내는 내 모습 어디에서고 이제 매력을 발견할 수 없었던 거다.


이건 내 잘못인가?

그녀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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