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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Nov 28. 2022

어쨌든 추억

2017. 11. 16

2017. 11. 16. (BY 아내, IN 치앙라이)

이제 정말 딱 2주 남았다.

남편은 내가 오기만 기다리는 눈치다.

과연 정말 우린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 사실 어쩌면 마음먹는 게 제일 중요하고, 어떻게든 결정이 나면 그 결정에 맞게 현실을 맞추는 방법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문제는 역시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와서 살게 되었다는 가정 하에, 그 후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지금 생각해 둘 일이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강아지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좀 심각하다.

만약 녀석들을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린 그냥 국내 어딘가로 방향을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고민들을 혼자 하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이제 이곳을 즐기자.

이제 몇 가지 물건들을 좀 사고, 며칠 뒤엔 무반으로 이동할까 검토 중이다.

이제 2주 남았다. 이 시간이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마음껏 누리자!

모든 결정권이 나에게 있는 자유를 누리자!


슬리퍼를 사고....


달콤한 케이크를 먹고....
뭐야.... 술?




2017. 11. 16. 목.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오늘은 이상하게 아내가 너무 보고 싶어 불쑥 한숨이 나온 날이다. 볼을 비비고 장난치고 싶었다. 예전 그렇게 낄낄대며, 숨 막힐 듯 웃어젖히던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보았다.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많이 웃고 천진난만하게 따뜻한 추억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재산이며, 그런 걸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최상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나 음악, 그림 따위보다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유일한 위로가 될 추억 말이다.


추억을 창조하는 것!

어떻게 해야 할까? 기억에 오래 남을 추억을 생성하는 것. 그것은 타오르는 불꽃같은 치솟음 가운데 발생하는 것이다. 며칠 전의 나를 돌이켜보면 그런 침잠의 세계에선 도저히 추억 같은 건 남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창조적 삶은 우울했던 기억들마저 태워버리는 뜨거움이 있다. 좋은 시간들은 분명 많았을 것이다.

다만 그중에서 몇 개나 다시 떠올릴 수 있는지 자문해 보면 한심한 수준이다.


아내의 살 내음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홀아비가 된 지 겨우 17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침대에서 드디어 홀아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둥지를 만들지 않는 흰제비갈매기



2017. 11. 17.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중문에 드로잉 수업을 들으러 왔다.

요즘은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글은 마치 내가 쓴 것처럼 익숙하고 편한 무엇이 있다. (가식적인 기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수업이 끝났다.

수업은 에곤 쉴레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학교에서 반항아였고 부모가 거의 자녀들에게 무관심한 환경이었지만 뛰어난 재능 하나로 성공한 화가였다. 하지만 사랑 대신 돈 많은 집 딸에게 장가를 간다. 아무리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난 예술인이라도 굶는 건 견디기 힘든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이중섭 작가나 김영갑 작가는 얼마나 대단한가?

아무튼 에곤 쉴레는 결혼 후 독감으로 부인을 보내고 자신도 독감으로 사망한다.

그의 그림 특징은 굵고 강렬한 선, 뒤틀림에 있었다.

유연한 그림보다 이런 그림이 좋다.

보다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내 글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2017. 11. 18.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사료가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 다음 주까지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다.

도서관에 가서 다음 달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과 에코 백 선물을 받아왔다.

가는 김에 대여 책 완독하고 초서도 마치고 나니 오후 4시, 아이들은 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도 좋지만 너무 혼자 지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다.

왜 미혼 남녀들이 굳이 결혼하려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일단 가장 안 좋은 건 일상의 소소한 대화가 없다는 것이다.

소소한 대화가 왜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명시할 순 없어도, 혼자 지내게 되니 혼잣말이 늘게 된 점을 보면 대화는 우리의 무의식이 꼭 필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임을 알게 된다.


차라리 24시간 꿈만 꾸고 싶다. 꿈에서 저런 델 놀러 갔다.


무엇보다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사건도 생겼다. 대화가 사라지니까 진짜 치매가 왔다. 단어도 생각이 나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느라 온 집, 온 마당을 돌아다닌다. 강아지가 고개를 처박고 코를 킁킁 대듯 온 마당을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분명 치매환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울증이란 것도 나와는 상관없는 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알지 못한 사이에 슬그머니 자란 손톱처럼 무섭게 찾아온다. 정신없이 쏘다니다 숲에서 길을 잃은 채 밤을 맞는 것과 같다.



2017. 11. 19. (BY 페이지 유, IN 제주도)

아내에게서 연락도 없고 연락한 문자에 답도 없다. 그쪽 장기거주자와 여행자 몇이 저녁에 어울리기로 했다는데..... 여기 시간으로 12시 넘어 ‘잘 자.’라는 두 글자만 남겼다.

저렇게 극단의 짧은 문장 속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도 답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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