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방대승불교의 명상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대승불교의 명상은 시대별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초기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하였을 때의 북방불교와 지금의 불교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초기 불교는 경전 중심의 불교철학 중심이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많은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이 들어오고, 이것을 정리하는 과정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하는데, 시대별·주제별로 정리하고 분류하였다.
이 과정이 지난 후, 천태종의 천태지관(天台止觀)이라는 남방불교에 기초한 수행법이 들어왔으나, 널리 퍼지지 못했다. 이후, 화엄종을 비롯한 여러 종파들이 명멸했지만, 교학(敎學)중심의 학문적인 불교에 가까웠다. 이에 중국의 풍토에 맞는 고유 수행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것이 당(唐)나라의 선종(禪宗)이다.
양나라 무제 때 중국으로 넘어온 초조(初祖) 달마대사에서 6대를 내려가 혜능(惠能)대사의 시대가 되면서, 중국의 선종은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이후 여러 선종의 종파가 만들어지면서, 이른바 ‘선(禪)의 황금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선지식(善知識)들의 수많은 선문답(禪問答)은 화두선(話頭禪)으로 지칭된다. 그러다가 송대(宋代)의 대혜종고 선사에 의해서, 이런 선문답의 핵심적인 부분을 정리하여 만들어진 1,700개의 화두(話頭) 혹은 공안(公案)를 간(看)하는 것을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간(看)의 의미는 ‘세밀하게 살피어 본다’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렇게 정리된 화두 혹은 공안은, 선수행을 할 때, 오히려 의식을 제한하게 되고, 또한 화두/공안을 학문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으로, 말은 선종이지만, 사실상 교종이 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그렇게 송나라에 이르러 선의 황금시대는 저물게 된다.
모든 명상의 핵심은 이론이 아니라 수행이다.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에 체득하는 것이 명상의 요체이다. 수많은 이론으로 자신을 감싸도, 한 시간 명상한 것만 못하다. 그러나, 선(禪)명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행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구성되었고, 어느새, 이론이 수행보다 앞서는 상태가 된다.
초기불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붓다 당시에는 수행과 계율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붓다 입멸후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불교는 이론화되고,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서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 시절의 불교를 부파불교시대라고 부른다.
서구심리명상과는 달리 남방불교이든 북방불교이든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 깨달음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불교의 기본 철학인 사성제(四聖諦)를 살펴보면, 괴로움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도(道)라고 하여, ‘괴로움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깨달음의 목표로 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선종에서는, 생리적인 욕구에 근거한 인간이 생각과 감정을 통해 욕망을 이루려는 과정에서 괴로움의 싹이 튼다고 보았다. 즉, 생리적인 욕구(식욕, 성욕, 수면욕)가 사회적인 욕망(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괴로움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생각과 감정은 ‘자아(自我)’를 근거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자아’가 개입하게 되고, 또한, ‘자아’가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자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세계’, 즉 생각 이전, 감정 이전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생각에 의한 판단(간택 揀擇)과 감정에 의한 미움과 좋아함(증애 憎愛)의 바탕을 이루는 심층의식(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인지하는가?
사회학자인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란 책을 보면, ‘인지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인지혁명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관념 즉 상상력에서 인지 혁명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추상적인 개념이 이즈음에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 정신, 국가, 도덕, 정의 등의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관념의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렇게 관념 혹은 개념에 대한 언어가 만들어지면서 ‘자아’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이런 자아라는 개념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지는 논리적인 생각을 가진 인간을 이전의 인류와는 확연히 다른 종으로 구분 짓게 만든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고 감정을 통해 자신을 인지한다. 그리고 생각을 통해 세상, 나, (세상과 나의) 관계성을 인지하여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 이렇듯 추상적인 개념을 통한 인지혁명과 언어의 발달은 ‘자아’에 대한 인식을 하게 했고, 인간과 기타 동물을 구분 짓는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자아’를 인식하게 되면서, 기존의 생존을 위한 괴로움이 아닌 새로운 개념의 괴로움을 알게 된다. 그것은 생노병사의 괴로움이다. 생로병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아를 인식하게 되면서, 생노병사의 인식이 생겨나고, 이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 나아가 존재의 생성과 사멸을 인식하게 되면서, ‘자아의 유한성’, 즉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괴로움을 알게 된다. 이것은 동물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 느끼는 ‘죽음의 공포’와는 다르다.
선(禪)명상에서는 이렇게 괴로움을 인식하는 자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세계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언어(言語) 이전, 문자(文字) 이전의 의식 세계로 바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 언어 이전, 문자 이전의 의식 세계를 심층의식(잠재의식과 무의식)이라고 한다. 그렇게 직접 들어가는 데 필요한 도구가 화두(話頭)이다.
화두(話頭) - 의심의 주제
의심(疑心) - 근본에 대한 의문이 일어난 상태
의정(疑情) - 의심이 뭉쳐 한 덩어리가 된 상태. 의심 그 자체가 되며, 생각이나 의지로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과 내가 한 덩어리가 된 상태
의단(疑團) - 의정이 더 뭉쳐져서 하나의 단단한 환단(還丹)처럼 된 상태. 이 의단을 가지고 심층의식(잠재의식과 무의식)을 뚫어낸다.
인간 본질에 대한 고민을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일어난 상태를 ‘의심’이라고 하고, 근원적인 의문을 ‘화두’라고 할 수 있다. 화두를 들고 의심이 깊어지면, 의심이 뭉쳐져서 한 덩어리가 되는데, 이 상태를 ‘의정’이라고 한다. 의심 그 자체가 되며, 생각이나 의지로 의심을 하는 상태가 아니라, 의심과 내가 한 덩어리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정을 더 몰아붙여서 단단하고 작은 환단처럼 만들고, 이 의단을 가지고 표면의식 아래에 숨어있는 심층의식을 뚫어내는 것이다.
심층의식을 뚫어낸다고 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분별망상(分別妄想)의 정식(情識)을 타파한다고 하는 것이다. 전도몽상(顚倒夢想)이 사라지고, 본래의 성품이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다.
분별망상의 정식에서 분별이란 늘 의미 없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고, 망상은 의미 없는 허망한 생각이고, 정식이란 중생의 마음을 의미한다. 즉, 의미 없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허망한 생각에 빠진 중생의 마음을 타파한다는 뜻이다. 전도몽상은 앞뒤가 뒤바뀐 꿈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고 본래의 성품이란 분별과 증애가 사라진 언어 이전의 마음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