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章
그의 옛 연인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그에게 더 꼬치꼬치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파 볼 수도 없는 일이고. SNS를 파보는 것도 젊은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고 또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디지털 세상에서 겨우 카톡과 뱅킹과 가끔 온라인 쇼핑이나 하는 정도인데, 무슨 수로 그를 파헤쳐 볼 수 있나. 아,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SNS 계정은 있지도 않았다. 내가 ‘모토롤라’부터 ‘아이폰’을 쭈욱 경험하는 동안 그는 전기도 없는 산에서 살았던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이고, 지금 그 이야기를 더 들추거나 하는 건 관계의 진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 인지, 가끔 이성이 잘 발동할 때가 있다. 중년에 연애하면 이런 면에서는 좋은 것 같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데이트...하면, ‘영화 관람’이다.
어떤 여자가, 남자와 단둘이 영화를 본다면, 그 남자는 사귀고 있는 남자이거나 혹은 썸을 타는 남자일 것이다. 데이트가 아닌 경우로, 여자와 남자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는 일일 것이다. 영화를 여러 사람과 볼 때, 남자가 끼일 순 있지만 단둘이 남자와 영활 본다는 것은 적어도 썸 이상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타인’과 영화를 ‘함께’ 본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만큼 취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반영되는 분야도 드물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취향이 잘 맞는 친구와 주로 영화를 보거나, 혼자 가서 만끽하며 영화를 보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를 좋아한다. 주로 예술영화 장르를 좋아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이해가 잘 안되거나 어려운 영화까지 보러 다니진 않았다. 적당히 의미 있고, 메시지가 있고, 문화적인 감성이 담겨있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볼 수 있는데, 더 덧붙이자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의 영화도 좋아하고, 깐느나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보는 것을 즐겨 했다.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는 영화관엘 갔으니까 나는 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영화 관람은 나의 싱글 생활에 매우 좋은 취미였다.
그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물론 내가 영화와 영화관을 선택하고 제안했다.
그에게 ‘나’라는 사람을 좀 더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와 앞으로 함께 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주 가던 예술영화전용관에서 그를 만났다.
“이 영화관을 제가 좀 좋아해요”
“아, 네. 저는 처음 와보네요”
“더 좋은 영화를 고르고 싶었는데, 시간이 잘 안 맞았어요. 이걸로 보시죠”
“네 저는 다 좋습니다.”
영화를 고를 때 나는 꽤나 신중하게 영화를 선택한다.
사이트에서 영화정보를 보고, 포털에서 다시 그 영화를 검색해, 여러 가지 비평이나 평점 등을 살펴보고 선택하는데, 보고 싶은 영화가 시간이 맞질 않아, 나름 평이 좋은 감독의 영화를 선택했다.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꿈, 보셨어요?”
‘아니.. 그 영화를 안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매우 유명한 영화지만,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은 영화다.
주로 영화나 영상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많이 거론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네 봤죠. 그 영화 아시는구나.”
“네, 저는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고흐 그림으로 들어가는 장면들이 잊혀지질 않아요.”
“네? 고흐 그림으로 들어가요?‘
꽤 오래전에 영화를 봤던 터라, 잘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벚꽃 장면과 전쟁 후 군인이 터널을 지나 나오는 장면들만 기억이 났다.
‘고흐 그림이 나왔었나?’
“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이 미술관에서 고흐 그림을 보다가, 그 그림 장면으로 들어가서 영상이 진행이 되는데, 정말 영상이 충격적일 정도로 환상적이었어요.”
‘어라?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구? ...’
영화가 시작되었다. 멋진 건축물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삶이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부담스럽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나 메타포를 담고 있지 않고, 애정 씬도 많지 않아 보여, 그럭저럭 편안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영화의 감독은 모든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와 은유를 심어 놓았다. 매우 일상적이고 디테일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장면 마다 의미로 가득차니, 편하게 보기는 어려운 영화였던 것이다. 내 견해지만, 영화는 참 재미없고, 메시지도 없었다. 아니 감독의 메시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고 해야겠다.
‘어떡하지?’
영화를 보다 말고 함께 나가자고 할 수도 없고, 왜 이렇게 영화 시간은 긴지, 영화를 보는 내내 그야말로 가시방석이었다. 영화는 끝났고, 영화관의 불이 켜졌다.
영화관을 나오는 동안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살짝 그의 표정을 살펴 보았지만 그는 별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휴, 영화가 재미없네요. 미안해요. 이런 영화인 줄 몰랐어요”
그런데 그 남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에고, 다행입니다.”
“네? 뭐가요?”
“저는 엄청 걱정했었어요.”
“네?”
“저도 영화가 너무 별로였거든요. 그런데 혹시 저에게 ‘이 영화, 너무 좋죠?’라고 물어보면 어떡해 하지? 하고 걱정했었거든요. 영화 보는 내내 고민이 되더라구요. 좋은 영화라고 말씀하시면 어떡하나. 그런데, 와, 다행이에요. 하하하 ”
“아, 네. 그러셨구나. 그러실 수 있네요. 하하하”
그 남자는 무거웠던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도 솔직하고 유머러스하게.
나는 집으로 돌아와 영화, 구로자와 아키라의 ‘꿈’을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그의 이야기들을 떠올렸고, 또 그와 앞으로 함께 좋은 영화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는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