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2 Ora et labora
몬테 올리베토 수도원의 성당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았다. 단순한 듯하면서 아름답고, 절제한 듯하면서도 거룩함을 자아낸다. 아마 유럽 여행 중에 화려하고 호화로운 성당을 너무 많이 본 탓일지도 모르겠다. 흰색 대리석 위주의 단순한 공간에서 차분하게 전례에 빠져들 수 있었다.
수도원에 있는 동안 저녁기도부터 끝기도, 다음날 아침기도와 미사를 함께 했다. ‘백의(白衣)의 수도승’ 스물여섯 명이 그레고리오 가락으로 찬미의 노래를 읊었다. 어디 하나 불거진 소리 없이 가지런히 조화된 합창이 울려 퍼진다.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대로 “우리 정신이 우리 목소리와 조화되도록”(RB 19,7)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아름답고 거룩한 전례였다.
수도원 안쪽에 중정(中庭)이 있고, 그 둘레를 네모꼴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회랑의 벽과 천장은 성 베네딕도의 생애를 표현한 프레스코화로 덮여있다. 수도원과 벽화 모두 15세기 작품이다. 수도원 안에는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가 수도했던 토굴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볼 기회는 없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성당 바닥의 대리석 문양이 눈길을 끈다. 베네딕토회 수도원이라면 어디서나 한 번쯤 보게 되는 문구와 마주쳤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하마터면 이 소중한 작품을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제작 연도를 1949년으로 표기했다. 이 가르침은 베네딕토회의 상징이 될 만큼 널리 알려졌다. 더 나아가 모든 수도승 생활의 근본을 이루는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기도와 노동의 단순한 생활은 수도승의 영성을 고양하고 하느님 찬미에 집중하도록 지켜주는 강력한 틀이다. 이 소박한 삶의 반복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나태와 교만을 녹여낸다. 헛된 영광을 꿈꾸는 세속적 욕망을 삭여낸다. 끝내는 겸손, 순명, 사랑 같은 영성의 꽃을 피워낸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수도승의 영혼을 단련하는 최고의 처방전이다.
이 지침은 워낙 유명해서 성 베네딕토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은 『베네딕토 규칙(RB)』이 유일한데, 규칙에는 이런 명시적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규칙 전반에서 기도와 노동은 충분히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규칙에 나타난 성인의 가르침을 압축한 표현으로 보는 게 정확할 듯하다. 9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의 베네딕토회(Benedetto d'Aniane)에서 처음 나타난다는 견해(안셀름 그륀)도 있다.
그러나 기도와 노동의 강조는 베네딕토회만의 고유 전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수도 문화를 싹틔운 이집트 사막에서부터 이미 기도와 노동은 핵심적인 가치로 강조되었다. 베네딕토 성인은 이런 수도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규칙』 역시 사막의 수도 전통과 당시까지 존재했던 여러 수도 규칙을 흡수했다. 따라서 ‘기도하고 일하라’는 표현이 베네딕토 이전에 등장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열어둬야 한다. 관련 논문이 더러 있지만 명확한 결론은 유보하고 있다.
이 수도원에서 자주 보이는 또 하나의 상징은 문장(紋章)이다. 세 개의 언덕 위에 피어난 두 개의 올리브 가지, 그 위로 솟은 하나의 십자가로 문장을 구성했다. 그 아래 라틴어로 “올리브가 평화를 전한다(Pacem Oliva Tulit)”라고 썼다. 수도원 입구에 있는 베르나르도 톨로메이의 동상이 왼손에 이 상징물을 들고 있다.
올리브 가지는 비둘기와 함께 고대부터 평화의 상징으로 쓰였다. 구약에 나오는 대홍수 때 노아의 방주에서 날려 보낸 비둘기는 세 번 만에 올리브 가지를 물고 돌아온다. 그로부터 신의 분노가 풀리고 평화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몬테 올리베토 대수도원은 올리브의 평화를 간직한 이상적인 공동체로 느껴졌다. 짧은 하루를 묵었지만, 참 따듯하고 편안했다. 손님 환대의 정신이 곳곳에 묻어나면서도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았다. 예전에 방문했던 봉쇄 수도원의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봉쇄 수도원의 수도승은 대체로 방문객과의 접촉을 꺼린다. 그분들의 수도 생활을 존중하려고 이쪽에서도 언행을 삼가게 된다. 이곳은 그런 거리낌이 없다. 눈에 띄는 수도승 누구를 붙잡고 말을 붙여도 편안하게 응대해 준다. 언뜻 마주친 수도승의 국적이 다양해 보였다. 문화적 다양성이 이 공동체에 또 다른 활력을 불어넣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한가득 기쁜 표정을 지으며, 그곳에 우리 수도원이 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경남 고성의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수도원을 말한다. 1988년에 이 수도원이 진출해 설립한 공동체이다. 고성 수도원은 설립 30년이 지난 2019년에 아빠스좌 대수도원으로 승격했다.
이보다 먼저 1931년에 스위스에서 6명의 수녀가 중국 연길 지구로 파견되면서 부산 올리베타노 수도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수녀 시인으로 널리 사랑받는 이해인 수녀님이 바로 부산 올리베타노에 계신다. 이로써 올리베타노 연합회의 남·녀 수도원이 나란히 한국에 진출해 신선한 영성의 향기를 흩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