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술통은 포도즙으로 넘치리라

03-04 수도원과 와인

by Peregrinante in Sp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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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은 최고급 와인 산지로도 유명하다. 완만한 경사의 구릉지는 풍광도 아름답지만, 대부분 석회질이라 물 빠짐이 좋다. 햇살과 바람, 토양이 포도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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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 올리베토 수도원은 상당한 규모의 농장을 경영하며 포도와 올리브 등 농작물을 생산해 왔다. 농작물 재배부터 가공, 생산, 판매를 담당하는 별도의 농업 법인을 두고 있다. 1319년 설립 이래 ‘기도하고 일하라’는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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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은 700년 넘게 이어온 전통이다. 수도원 지하에는 14세기 초반에 만든 유서 깊은 와인 저장고가 있다. 그 규모로 보아 이 지역 농부들의 포도까지 수집하고 저장하는 중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2만 평(7ha)의 농장에서 수만 그루의 포도를 재배한다. 수도승의 기도와 노동이 스며든 열매로 질 좋은 포도주를 생산한다. 단순하면서도 중후한 맛이 느껴지는 최고급 와인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여러 종류의 와인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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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9 토스카나〉는 수도원 설립 700주년 기념으로 출시했다. 명칭에 설립 연도를 사용하고, 라벨에는 수도원 모습을 그려 넣었다. 수도원 와인답게 화려함보다는 단순하고 깊은 맛을 지녔다고 설명한다. 〈모나코 로쏘〉는 레드와인이다. 라벨에 수도복을 입은 수도승의 모습을 실루엣으로 표현했다. 이탈리아 고유 품종의 포도로 만드는 로제와인은 단맛이 훨씬 적고 드라이하다고 한다. 〈쌍투스〉는 미사용 포도주이다. 이탈리아 고품질 청포도 품종인 베르멘띠노로 만든 수도원 고유의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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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술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도, 최후의 만찬에도 포도주가 나온다. 유럽의 많은 수도원이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생산한다. 수도원의 포도밭은 건강한 노동과 자급자족의 상징이었다.


“그러면 네 곳간은 그득 차고 네 술통은 포도즙으로 넘치리라.” (잠언 3,10)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수도원은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을 발전시켜 온 일등 공신이다. 각 성당에서 필요한 미사주 생산을 대부분 수도원이 맡았다. 미사주는 미사 중에 그리스도의 성혈로 변한다. 수도승들은 최고의 미사주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자연환경을 고려해 품종을 개량하고 양조법을 연구해 오늘날의 와인 제조 기술을 탄생시켰다.


포도주 라벨에 클로(clos), 클로스터(kloster), 에르미타주(hermitage), 생 아베(St. Abbaye) 같은 단어가 들어 있으면 생산지가 수도원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들은 수도원, 기도실, 은수처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유럽의 포도 재배 기술은 가톨릭 선교사를 통해 해외로 전파되었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칠레, 아르헨티나 등의 와인 산업은 선교사가 심은 포도나무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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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가운데 베네딕토회와 시토회는 포도주 생산의 양대 산맥이었다. 지금도 이 두 수도회는 유럽과 신대륙에서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수도회가 배출한 최고의 와인 전문가로 베네딕토회의 동 페리뇽(Dom Pérignon)이 있다. 그는 프랑스 베네딕토회의 수도승이었다. 샹파뉴 지역이 대부분 레드 와인을 생산하던 시절에 샴페인 연구에 매달렸다. 갖가지 실험으로 최적의 배합 비율을 찾아내 ‘샴페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샴페인 병과 마개를 철사로 두르는 방식이 그의 작품이다. 오늘날 최고급 샴페인 브랜드인 ‘동 페리뇽’은 그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시토에서 출발한 시토회도 와인 생산의 명가였다. 시토회는 11세기 베네딕토회의 수도승 성 로베르토가 개혁을 목표로 설립한 수도회이다. 더 엄격한 기도와 노동을 실천하기 위해 수도원 농장에서 포도를 재배했다. 프랑스 중부에 속하는 부르고뉴 지역의 토양과 기후에 맞도록 꾸준히 포도 품종을 개량했다. 오늘날 부르고뉴 산 와인이 맛과 향에서 뛰어난 평가를 받는 것은 이 수도회의 공이다.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는 시토회의 와인으로 지금까지도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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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내세우는 와인도 있다. 프랑스 와인의 하나인 샤토뇌프 뒤 파프(Châteauneuf du Pape)는 ‘교황의 새로운 성(城)’이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실제로 교황이 머물던 성의 이름이면서, 그 성이 있는 마을의 이름이 되고, 그 마을에서 생산하는 와인의 이름이 되었다. 이 와인은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아비뇽 유수’의 유산이다. 아비뇽의 첫 교황인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출신의 와인 애호가였다. 아비뇽에 교황청을 새로 짓고 주변 지역의 와인 생산을 적극 장려했다. 후임 교황 요한 22세는 아비뇽 북쪽에 여름 궁전을 따로 짓고, 마을에서 생산된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 이 궁전의 이름이 마을 이름과 포도주 이름의 유래가 됐다. 아비뇽 유수가 끝난 뒤에도 이 지역은 ‘교황의 와인’ 생산지로 명성을 유지하며 성장했다. 마을 산꼭대기에 있던 성은 프랑스 혁명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파괴되고 성벽 일부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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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 올리베토 수도원의 기념품 매점에서 포도주를 몇 병 사고 싶었다. 와인 한 병을 들었다 놓으며 몇 번이나 망설였다. 순례 여정이 아직 많이 남은 터라 차마 그 무거운 걸 들고 올 수는 없었다. 다행히 한국의 고성 올리베따노 수도원에서도 판매한다고 한다. 뒤늦게라도 꼭 700년의 풍미를 간직한 〈1319 토스카나〉를 마시며 순례 여정을 추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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