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영성 고전] 3
신을 찾는 사람에게 신은 늘 오묘한 존재다. 알 듯 말 듯하고 알쏭달쏭하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조차 신을 잘 모른다. 이해하기도 느끼기도 어렵다. 평생을 기도로 살아온 노 수도자가 겸손히 말했다. “하느님은 그렇게 만만하신 분이 아니랍니다.” 그 말 뒤에 감춰진 고뇌의 세월이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일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은총과 축복으로 다가올 뿐이다.
신은 곧 신비이다. 신비란 신의 비밀이니, 신과 신비는 사실상 동의어이다. 신앙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신비에 다가서려는 인간의 안타까운 몸짓이다. 신을 신비로 규정하고 그 비밀의 정원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 노력이 신비주의 신학이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수도 전통 안에는 신비신학의 흐름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신비신학」(De mystica theologia)이다. 5세기 말 또는 6세기 초쯤 출현한 글이다. 그리 길지 않다. 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는 이 작품의 영문 번역본은 7쪽 정도이다. 읽기 쉬운 글은 아니다. 좋은 해설과 연구서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수도 영성을 공부하면서 한 번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신비신학은 수도 생활이라는 외투를 입고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어권에서 나온 이 작품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 이후 신비주의 신학과 신앙 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기울었다는 논란도 따랐다. 저자는 신약성경(사도 17,34)에도 등장하는 디오니시우스(Dionysius)였다.
나중에 문서 고증과 해석학의 검증을 거치면서 이 저자는 가짜로 드러났다. 저술에 스며든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용어와 개념으로 미루어 5세기 말 이후의 인물로 평가됐다. 익명의 동기는 불분명하지만, 이 작품이 이미 확보한 신뢰와 평가는 훼손되지 않았다. 신비신학은 이 작품과 더불어 공식 용어로 자리 잡았다. ‘거룩한 어둠’, ‘무지’ 같은 신비신학의 주요 개념도 이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 익명의 현인을 위(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라 부른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 신은 밝은 빛이다. 빛은 온 세상을 고루 비춘다. 스스로 환하게 빛나기에 결코 감출 수 없다. 일등능제천년암(一燈能除千年闇)이라 했다. 작은 등불 하나가 능히 천년의 어둠을 물리친다. 빛 앞에서 어둠은 스스로 소멸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신앙은 빛을 따라 걷는 여정이다. 그 길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드러나는 밝은 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신을 향한 길에서 필연적으로 어둠과 무지와 혼돈을 겪게 된다는 주장이 있다. 신은 빛이지만, 불완전한 인간은 쉽사리 그 빛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부족한 지혜와 언어로는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묘사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신비신학이 출발하는 위치는 바로 이 지점이다.
구약 탈출기는 인간이 신을 만나는 장면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다. 모세는 광야의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속 불꽃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의 음성을 듣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신은 구름 속에 계신다. “이제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너에게 다가가겠다.”(19,9)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었다.”(24,15) 마침내 신은 어둠 속에서 말한다.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33,20)
교부들은 이 장면에서 신비를 읽는다. “모세가 하느님의 모습을 본 것은 빛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후 하느님은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모세가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 더욱 훌륭하게 되었을 때는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보았다.” 요컨대 모세는 구름의 단계, 어둠의 단계를 거쳐서야 비로소 신을 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혼은 진보를 거듭할수록 감각적인 세상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된다. 그 과정에서 마치 구름 속에 든 것처럼 만물의 외관이 흐릿해지고,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어둠에 휩싸인다.
“여기에서 영혼은 ‘거룩한 어둠’에 싸여 사방이 차단되어 버린다. 이제 영혼은 감각이나 이성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벗어나 있기에 유일하게 남은 관상의 대상이란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바로 여기에 계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1)
그레고리우스가 설파한 ‘거룩한 어둠’(또는 신의 어둠)은 이후 신비신학의 핵심 주제가 된다. 영혼은 진보할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어둠 속으로 나아가며, 그런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신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사용하던 감각과 지각, 언어와 논리, 이성과 사고 체계를 모두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어둠에 빠져들었을 때만 신을 체험할 수 있다.
위(僞)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은 이러한 교부 신학을 이어받는다. 「신비신학」은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실천적 권고 형식이다. “사랑하는 티모테오, 신비적 관상을 신실하게 수련하려면 모든 감각과 지적인 활동을,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존재와 비존재까지도 전부 버리시오.” “당신 자신과 모든 사람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무아경에 의해서,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된 당신은 존재를 초월하여 거룩한 어둠의 빛으로 순수하게 들어 올려질 것입니다.” (이봉우 옮김, *2)
이 단계쯤 되면 언어는 그 소용을 잃는다. “이해력을 초월한 어둠 속으로 들어갈 즈음에는 말이 간결해질 뿐 아니라 아예 말이 완전히 없어지고 이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이성은 낮은 데서 초월적인 곳으로 상승함에 따라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더 한계가 줄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완전히 상승하였을 때 이성은 말이 완전히 없어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배성옥 옮김, *3)
디오니시우스는 또 다른 저술(「De Divinis nominibus」)에서 더 분명하게 말한다.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하느님은 모름으로써 알 수 있는 분인즉” “이해를 포기하고 눈부신 빛과 하나가 되어 그 빛 속에서 또한 그 빛으로부터 가없이 심오한 지혜로 밝혀질 때 우리는 가장 거룩하게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다.” (*4)
신은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이 견해는 노자(老子) 『도덕경』의 저 유명한 첫 구절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를 연상시킨다. 신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면 이미 틀린 것이다. 부정신학(否定神學)이라는 용어가 여기서 탄생한다. 모름을 통한 앎, 부정을 통한 긍정이다.
신은 이처럼 오묘하고 신비한 영역이니, 이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신을 역설하는 사람을 경계하리라. 차라리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그 회의와 고뇌의 구도자를 따르리라.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욥기 38,19)
(*1) 『서양 신비 사상의 기원』 (앤드루 라우스, 배성옥 옮김, 2001, 분도출판사)
(*2) 『신비신학』 (윌리엄 존스턴, 이봉우 옮김, 2007, 분도출판사)
(*3) 『서양 신비 사상의 기원』
(*4) 『서양 신비 사상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