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구름과 햇살로 채운 십자가

04-01 성 갈가노 수도원

by Peregrinante in Spem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십자가를 보았다고 하면 아마 좀 정상이 아니라고 의심받을지도 모르겠다. 2025년 9월 13일 오전 10시 반쯤 이탈리아 중부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나는 분명히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 바람과 구름과 햇살로 채운 하늘 위의 십자가, 이제 그 이야기를 전해야겠다.


첫 기억은 어느 다큐멘터리 영상이었다. 지붕도 없이 뻥 뚫린 수도원에 성악가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이탈리아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였다. 쏘울이 가득한 그의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셀린 디옹이나 사라 브라이트만과 함께 부른 그의 노래는 간절한 기도의 마음과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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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상 매체에 소개된 ‘안드레아 보첼리의 음악 여행’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광과 음악을 담아낸 다큐멘터리였다. 보첼리는 아내·친구와 함께 바티칸을 출발해 그의 고향 마을까지 300㎞가 넘는 거리를 말을 타고 여행했다. 3주 동안의 여정 중 유적지 등 특별한 장소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공연을 펼쳤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시에나를 지날 때는 폐허가 된 어느 수도원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함께 불렀다. 그래미상을 받은 미국 가수 토리 켈리와 화음을 맞췄다. 가스펠 합창단과 기타 합주단도 함께했다. 감동적인 장면으로 기억에 남았지만, 어느 수도원인지 찾아볼 생각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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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EBS의 세계테마기행에 다시 이 수도원이 나왔다. 성 갈가노 수도원(Abbazia di San Galgano)이라 했다. 마침 수도원 순례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꼭 찾아보고 싶었다. 시에나에서 아시시 가는 길에 조금 둘러 가면 될만한 위치였다. 가서 홀로라도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리라.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은 13세기에 건립된 시토회의 수도원이었다.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기근과 역병, 약탈 등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점차 수도원으로서 기능을 잃고 쇠퇴했다. 18세기에 종탑과 성당 지붕이 무너지자 완전히 버려졌다. 지금은 지붕도 없이 벽과 창문 일부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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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갈가노는 12세기에 기사로 활약하다가 칼을 버리고 회심한 성인이다. 더 이상 살상의 무기인 칼을 쓰지 않기로 결심하고 언덕 꼭대기 바위에 칼을 꽂았다. 그가 죽은 뒤 지역 주교는 그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 성당에는 검이 꽂힌 바위가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몬테시에피 은수처(Eremo di Montesiepi)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수도원에서 빤히 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갈가노는 검을 버린 뒤 영적이고 은둔적인 삶을 살았다. 생애 마지막 시기에는 시토회와 접촉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그의 은수처가 있던 자리에 시토회 수도원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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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황량한 모습을 상상했지만, 아니었다. 폐허가 된 수도원에 심심찮게 사람들이 찾아온다. 시에나에서 한 번쯤 들러볼 만한 명소로 소문이 났다. 자동차로 채 한 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였다. 현재 성 갈가노 재단이라는 단체가 관리하며 입장료도 받고 있다. 무너진 건물과 함께 옛 수도원의 필사실과 작업실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이 수도원이 이목을 끄는 이유는 그 위치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하는 토스카나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수도원이 있다. 차도에서 벗어나 들판을 가로지르는 진입로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다. 푸른 초원과 야트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마치 기도하는 수도승처럼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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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품에 안긴 수도원 성당은 지붕도 없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십자가 모양이다. 두 팔을 벌린 채 벌렁 누워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십자가가 하늘에 떠 있다. 그 사이로 바람과 구름이 흘러간다. 대지를 축복하는 하늘의 은총이 눈 부신 햇살로 쏟아져 내린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안드레아 보첼리가 왜 여기서 '할렐루야'(by Leonard Cohen)를 선곡했는지 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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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다할 수 없다. 지붕은 사라지고 벽체는 무너져 내렸다. 인간이 떠나고 그들이 받들던 신의 위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묘하게 영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당신 발걸음을 들어 옮기소서, 이 영원한 폐허로!” (시편 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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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이곳은 살아있는 수도원이다. 푸른 들판의 산천초목이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다. 바람이 말씀을 전하고 새들이 시편을 읊조린다. 들판의 농부들이 겸허한 기도를 바친다. 고요와 침묵 속에 기도와 찬미가 흐른다. 해 뜰 녘부터 해 질 녘까지 대자연이 함께 드리는 장엄 미사가 펼쳐진다. 온갖 피조물이 함께 드리는 대지 위의 미사이다.


예로부터 자연은 제2의 성경이라 했다. 말씀은 대지 위에 흩뿌려져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낸다.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그 숨결이 다시 퍼진다. 폐허가 된 수도원 성당에서 장엄 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한참 서 있었다. 허물 많은 삶을 보속하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사고 우러러 기도했다. 이로써 이 폐허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수도원이 되었다. 늘 찬미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마음의 수도원,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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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 나올 때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원래 자갈이 깔린 바닥에 하얀 카펫을 펼치고 통로를 만든다. 제대 위치에 테이블을 놓고 꽃장식을 서두른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모양새이다. 이 아름다운 무너진 성당이 결혼식 장소로 쓰이는 모양이다. 예식 시간을 물어보니 12시라고 했다. 신부 입장까지 지켜보며 박수로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신혼부부의 앞날에 햇살 같은 축복이 있기를 마음으로 빌어주고 발길을 돌렸다. 한참 걸어 나오다가 오픈카를 탄 채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신랑·신부를 만났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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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셔요, 나의 연인이여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 시골에서 밤을 지내요. 아침 일찍 포도밭으로 나가 포도나무 꽃이 피었는지 꽃망울이 열렸는지 석류나무 꽃이 망울졌는지 우리 보아요. 거기에서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바치겠어요.” (아가 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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