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독방에 앉으십시오

06-02 거룩한 은수처

by Peregrinante in Spem

성 로무알도는 은수생활과 공동생활을 결합한 이상적인 수도 생활을 실현했다. 은수처와 수도원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공존하는 형태를 구상했다. 이를 위해 수도승이 홀로 기도와 노동, 관상에 몰두할 수 있도록 서로 분리된 여러 개의 암자를 짓고, 그 가까이에 공동생활을 위한 수도원을 두는 형태로 수도 생활의 개혁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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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말돌리의 은수처와 수도원은 약 3km 떨어져 있다. 수도원에서 산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해발 1,100m 높이에 ‘사크로 에레모(Sacro Eremo)’로 불리는 성지가 있다. ‘거룩한 은수처’라는 뜻으로, 수도승 로무알도가 처음 암자를 짓고 살았던 곳이다. 이 은수처의 설립이 1012년이니 천 년을 훌쩍 넘겼다.


수도원에서 아침기도와 식사를 마치고 사크로 에레모로 향했다. 주일 낮 미사는 그곳에서 드리고 싶었다. 수도원에서 은수처까지는 빽빽한 수림을 통과하는 숲길이다. 비포장이긴 하지만 자동차도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시간이 넉넉했으므로 신발 끈을 조이고 숲길을 걸었다. 비가 살짝 뿌린 뒤라 좀 쌀쌀했다. 오르다 보니 이내 숨이 차고 몸이 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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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오솔길을 예상했지만, 수목이 우거져 어둑했다. 곰이라도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드문드문 걷는 사람이 있어 무섭진 않았다. 은수처의 미사 시간에 맞춰 가는 사람들이다. 이 지역 전체가 국립공원에 속한다. 수도원과 은수처도 모두 국립공원 안에 있다. 더 늦게 왔더라면 멋진 단풍이라도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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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 걸어서 도착했다. 사크로 에레모는 산 중턱의 비탈진 터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주위를 무성한 수림이 감싸고 있다. 등산용 앱을 켜보니 고도 1,140m로 나온다. 30분 간격으로 안내 관람을 제공해 잠시 기다려야 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옛 은수처의 유적이 있고, 오른쪽에는 성당이 보인다. 그 너머로 수도승이 살고 있는 봉쇄구역이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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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로무알도의 암자(cella)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원(텃밭)을 끼고 있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토굴 같은 느낌을 준다. 입구에는 철망이 달린 작은 창문이 있다. 나무 문짝을 단 작은 문은 음식을 넣어주는 용도였다고 한다. 밖에서 음식을 넣어 두면 안쪽에도 똑같은 문이 있어 음식을 꺼낼 수 있는 구조였다. 성인이 살았던 공간에는 딱딱한 나무 침대와 기도용 탁자 등이 남아 있다. 추위를 막기 위해 천장과 바닥도 모두 목재로 마감했다. 로무알도는 이곳에 모두 다섯 개의 암자를 짓고, 그중 하나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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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 수도승의 공간. 그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간직한 방. 그 영성의 향기가 세월을 넘어 지금도 피어나는 곳. 깊은 숲속의 사막! 이 헐벗은 광야! 나는 수도승의 동선을 생각하며 침실에서 기도실로, 복도를 거쳐 텃밭으로 몇 바퀴를 걸어 보았다. 몇 걸음 안 되는 이 공간에서 걸음마다 찬미를 놓았겠구나. 이 작은 독방에서 온 세상과 인간을 위해 기도했구나.


“가서 독방에 앉으십시오. 그러면 독방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압바 모세) (*1)


성당은 원래 기도소가 있던 곳에 1713년 새로 지은 건축물이다. 정면 외벽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 베네딕토와 성 로무알도의 상을 좌우로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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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어서면 머리 위로 두 천사의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그 한 가운데에 두 마리의 비둘기가 같은 잔의 물을 마시고 있다. 수도 생활의 두 측면인 관상과 활동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나는 다른 해석을 떠올렸다. 로무알도 성인이 추구했던 은수생활과 공동생활을 상징한다고. 두 생활은 언뜻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귀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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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미사에는 수도승 열 명이 함께 했다. 저 아래 수도원과 비교하면 절반 정도인 셈이다. 저분들이 저 이집트 사막의 초기 수도 문화에서 발원한 고독한 은수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 전까지는 기도와 미사도 독방에서 홀로 드렸다고 한다. 지금은 미사와 성무일도를 성당에서 함께 드리고, 식사도 같이한다.


그날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었다. 수도원에서 피정을 마치고 이곳까지 올라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함께 불러, 풍성한 전례로 진행되었다. 미사를 마친 수도승들은 곧바로 암자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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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승이 살고 있는 봉쇄 구역은 방문객이 들어갈 수 없다. 철망 사이로 기와를 얹은 작은 독채가 여러 개 보였다. 대략 스무 채쯤 되는 듯했다. 암자마다 담장을 둘러친 텃밭 또는 정원이 딸려 있다. 아마 성 로무알도의 은수처 유적과 거의 똑같은 구조일 거라고 짐작했다. 날이 추우니 난로를 피우는지 몇 군데 지붕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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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크로 에레모에 도착하면 입구에 카페와 기념품 매점이 가장 먼저 보인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주문해 마시며 매장을 둘러봤다. 진열장에 리큐어, 와인, 화장품, 꿀, 버섯, 오일, 초콜릿, 사탕 등의 제품이 즐비하다. 까말돌리 화장품은 국내의 한 업체가 직수입 독점계약을 체결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 여행 전문 카페에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꼭 사 와야 하는 품목으로 꼽는 글도 보인다.


리큐어는 알코올에 식물성 약초, 허브, 벌꿀 등을 섞어서 만든다. 예전에는 치료 약으로 쓰였다. 까말돌리 수도승들은 로무알도 생존 당시부터 이런 의약품을 만들어 환자 치료에 활용해 왔다. 지금은 수도승의 노동이 깃든 친환경 상품으로 인기가 있다. 이런 매장을 전통 약방(Antica Farmacia)이라고 불렀다. 그 뒷방에서 약을 조제하던 옛 장비와 시설도 둘러볼 수 있었다.



(*1) 사막 교부들의 금언 (베네딕타 와드 엮음, 허성석 옮김, 2017, 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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