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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해결할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요?

AX Kickoff 1. 도구가 아닌 목표에 집중하기

by 최프로

단계별 AI 도입을 위해 먼저 방향을 설정할 TF가 필요하다는 제안에 따라, 각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회의실, 송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모두 바쁘신 와중에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작은 시작처럼 보이겠지만, 우리가 여기서 만들어낼 변화가 우리 회사 미래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 믿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노트북만 바라보고 뭔가를 계속 작성하는 사람, 급하게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 등.. 아직 온전히 프로젝트에 집중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자 간단한 자기소개를 진행한 뒤, 저는 어색한 분위기도 전환할 깰 겸 준비해 온 포스트잇과 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이스브레이킹을 할 겸 각자 이 프로젝트를 통해 'AI로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자유롭게 적어서 저 앞 보드에 붙여주시겠어요?


잠깐의 정적. 하지만 곧 각자 펜을 들어 써 내려가기 시작하고 10분 지난 후, 화이트보드는 'n8', 'vibe coding', 'nano banana', 'RAG' 등등 그야말로 최신 AI 관련 용어로 가득 찼습니다. TF에 참여한다고 하니 아마 각자 유튜브도 좀 보고 검색도 열심히 해본 것 같더군요.


화려한 기술의 이름들로 가득 찬 화이트보드를 바라보며, 우리가 해결할 첫 번째 과제가 무엇인지 더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집중할 것은 드릴이 아닌 구멍입니다.


경영학에는 ‘마케팅 근시안(Marketing Myopia)’이라는 유명한 개념이 있습니다. 기업이 자신이 판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에만 몰두한 나머지, 고객이 진짜로 원하는 근본적인 가치를 놓치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코닥'의 예를 들 수 있죠.



코닥은 1975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개발했지만, 그 기술을 스스로 외면했습니다. 당시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던 필름 사업에 위협이 되는 카니발리제이션을 우려했기 때문이죠.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필름과 화학약품을 파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그 뒤 코닥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지금은 패션 브랜드 중 하나로만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쉽게 표현 달을 보라고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우리가 바라봐야 할 ‘달’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명쾌한 답은 시어도어 레빗 교수의 유명한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1/4인치 드릴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1/4인치 구멍을 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드릴’은 바로 조금 전 우리가 화이트보드에서 봤던 그 화려한 AI 기술과 도구들입니다. 반면 ‘구멍’은 우리가 그 드릴을 사용해 해결하고 싶은 조직의 명백한 ‘문제’를 의미하죠. 코닥 역시 자신들의 고객의 가치를 중심에 두지 않고 제품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패한 겁니다.


ChatGPT Image 2025년 10월 13일 오전 01_22_20.png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잊고 멋진 도구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AI를 통해 해결하려는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AI 회사가 아닌 AI를 활용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AI 능력 평가 시험 같은 것에 도전하는 것도 우리의 목표는 아니죠. 따라서 우리의 AI 너머를 봐야 합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 보다, 열 사람의 한걸음을...


그럼 왜 우리는 자꾸 ‘구멍’이 아닌 ‘드릴’, 즉 ‘도구’에 집중하게 되는 걸까요? 기업은 본능적으로 퍼포먼스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항상 최고의 성과를 내야 하니,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 스터디를 벤치마킹하고 이왕이면 ‘장비발’로라도 앞서나가고 싶어 하죠.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회사의 업무 생산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만약 소수의 에이스 몇몇만 AI를 활용해서 될 일이라면, 그들만 따로 모아서 집중교육을 진행하는 편이 낫습니다. 조직 전체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내디딜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기업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지금 우리에겐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해답은 '작은 성공'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업무로 돌아가 봅시다. 너무 당연해서, 또는 너무 간단한 일이라서 우리가 비효율적이라고, 개선할 수 있다고 느끼지도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리 신기하고 대단한 기술이라도 1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한 거창한 기능 보다, 한두 시간 배우면 내일부터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AI 효능감'을 느끼기에 더 좋습니다.


‘이거 하나 바뀌었는데 이렇게 편해지네?’하는 경험들이 쌓이면 AI에 대한 불안감이나 시니컬한 반응이 ‘한번 써볼까?’하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직 내에 확산을 해나갈 수 있죠.


혹시 야구를 좋아하신다면, ‘고급 야구’라는 표현을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볼넷으로 출루하고 희생 번트나 도루로 주자를 진루시킨 뒤, 희생플라이로 착실하게 한 점씩 만들어내는 걸 말하죠. 멋진 홈런이나 몰아치는 안타도 좋지만 현실을 보면 모든 선수가 홈런 타자가 될 수는 없죠. 아무리 치는 타자라도 안타칠 확률은 30%에 불과합니다. 1군에 모여 있는 에이스들 조차 10번에 7~8번을 실패한다는 거죠.


하지만 팀이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 점’입니다. 선수들이 홈런이나 안타를 치기를 기대하기보다 누군가 번트를 대고, 누군가는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결국 점수를 내도록 하는 것이 진짜 혁신을 하는 방법입니다.


ChatGPT Image 2025년 10월 13일 오전 01_14_17.png 때로는 멋진 홈런 한 방 보다 번트 하나가 더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야구 이야기 그만하고.. 그래서 우리의 목표는 ‘n8n’으로 자동화나 ‘RAG’ 시스템 구축 같은 화려한 기술로 현혹(?)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사소한 불편함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빼앗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내어 해결해 주는 세심한 코치가 돼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만들어 낸 ‘1점’이야말로, 조직 내에 긍정적인 경험을 선물하는 가장 값진 승리가 될 것입니다.




측정할 수 없다면 관리할 수 없다.


AI 전문가라고 해서 왔더니 웬 드릴과 야구 타령인가? 하고 헷갈려하는 것 같던 TF 멤버들도 차츰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잠깐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TF의 두 가지 중요한 원칙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화려한 AI 기술적 도전이 아닌, 우리가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에 집중한다.
둘째, 거창한 홈런이 아닌, 모두가 조금씩 참여할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성공부터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지막 한 가지 기준을 덧붙였습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 KPI를 만드는 것이죠.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AI를 쓰면 업무를 개선할 수 있다’ 같은 막연한 구호가 아니라, ‘보고서 작성 시간을 주 2시간에서 30분으로 단축한다’처럼 구체적인 숫자로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측정 가능한 목표는 무엇으로 세울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오늘 마지막이자, 세 번째 세션에서 함께 이야기해 보도록 하고, 일단 잠시 쉬었다가 두 번째 세션을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PPT 슬라이드를 다음으로 넘기자, 다음 세션의 제목이 나타났습니다.


인간과 AI의 역할 나누기


쉬는 시간이 됐지만, 대부분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회의실 뒤쪽에 마련된 다과 앞에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죠. 개발팀 이 차장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노트북에 빠르게 메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흩어져 있던 점들이 서서히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뚫을 자리는 찾은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방법을 찾아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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